[홍성담] 예수, 반란의 시대에 사랑이란 열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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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예수, 반란의 시대에 사랑이란 열쇠로
  • 홍성담
  • 승인 2018.02.1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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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동 목사를 기리며] 제사와 밥상공동체, 두 이야기의 합류-1

[홍성담의 제사와 밥상공동체, 두 이야기의 합류-1]

예수는 왜 예루살렘으로 죽음의 행진을 했을까.
그이가 활동하던 갈릴래아는 어떤 땅이었을까.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삶을 추구했을까.
유대인들에게 로마제국은 무엇이었을까.
그이는 사촌형 요한을 만나기 전까지 청년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그이의 사후 1백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에게 각인된 예언자는 요한이었는데 그이를 중심에 둔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지난 2천년을 장악하게 되었을까.
아비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처녀 마리아와 결혼한 요셉은 당대의 진정한 페미니스트란 말인가.
그이는 왜 어머니를 ‘여인이여!’라고 불렀을까.
그이는 동료들과 함께 자신의 고향마을에 갔다가 고향사람들의 돌팔매질에 우왕좌왕, 동료들까지 버리고 왜 혼자서 줄행랑을 쳤을까.
그이와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관계일까.
그이를 은전 몇 닢에 팔아 넘겼다는 총무 유다는 그이에게 어떤 사람일까.

‘의문’은 창조의 여백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꽃피우기 위한 정원이다. 이야기는 의문들과 의문들의 이합집산과 충돌, 갈등 속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경험과 역사, 삶, 각자가 은밀하게 간직한 한(恨)이 덧대어지고 보충되어 보편성을 갖춘 거대한 서사가 된다.

예수의 본격적인 활동의 대부분은 고통의 땅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갈릴래아 호수 강변을 따라 마을이 발달했다. 호수의 크기는 남북 21km, 동서 11km, 둘레 약 53km의 상당히 큰 담수호다. 당시의 하이웨이는 물길이다. 동료들 중에 어부가 있었기도 했지만, 그이의 활동 대부분은 물길을 따라 이루어졌다. 당시의 최첨단 운송수단은 선박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최고급 벤츠 승용차에 다름없는 배를 운용할 정도로 그이의 활동조직은 탄탄했다.

그런데, 예수는 왜 예루살렘으로 죽음의 행진을 했을까.

반란과 헤로데의 집권

그이가 태어나기 이십여년전부터 죽기까지 1세대 즉, 약 50 여년간 유대땅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간추려본다. 그이의 사후 약 십년후에 태어났던 ‘플라비우스 요제푸스’가 기록한 <고대 유대사>를 참고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들이 활동하던 갈릴리는 평화로웠다. 그러나 신년 초부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서서히 상황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작년 유월절에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던 기억이 다시 유월절을 앞두고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광야에서 외치는 랍비들이나 지하의 젤로트는 일년전 예루살렘에서 죽었던 동료들의 복수를 공공연히 외쳤다. 그들은 벌써 신년부터 이번 유월절 행사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에 갈멜산 인근에서 2천명이나 되는 헤로데왕의 퇴역 노병들이 왕실 군대와 싸워 팔레스틴 지역을 탈취했다. 요르단 강 근처의 베다라마다 궁전이 페레아 지역의 반란자들에 의해서 불태워졌다. 미천한 목동출신의 아드롱가이우스 형제 네 명이 사해 인근지역을 휩쓸며 스스로 왕의 칭호를 붙였다. 그들은 로마인들과 왕당파들을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서북쪽에서 한나절 거리의 엠마오 근처를 지나는 로마공로에서 옥수수와 무기를 군단에 수송하고 있던 로마군 부대를 포위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로마군 백부장 아리우스와 약 1백여명의 로마 병사들이 사살되었다. 그들 반란 세력들은 집과 땅을 잃은 유민들이 합세하면서 더욱 세력이 커졌다.

그들은 평소에 숲속이나 광야에 숨어 있다가 조직책의 연락을 받고 신속하게 모여 일을 감행한 이후에 또 바람처럼 흩어졌다. 예루살렘 당국은 그러한 반란세력들의 움직임에 속수무책이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사십명의 청년들이 성전을 습격했다. 그들은 한낮이라서 성전에 많은 사람들이 배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 대문 위에 있는 금 독수리상을 끈으로 끌어내려 도끼로 산산조각 내버렸다. 성전 안에 어떠한 상이나 흉상이나 살아있는 피조물을 세우는 것을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 대문 위에 금 독수리상을 세웠다는 이유와 독수리 상은 다름 아닌 로마황제를 상징하는 우상이라는 것이 유대 백성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청년 사십명이 모두 잡혀서 헤로데 앞에 끌려왔다. 헤로데가 분노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느냐. 그런 짓은 당연히 사형감이다. 그들은 오히려 기쁜 표정으로 헤로데에게 떳떳하게 맞서며 대답했다.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 행한 것이고, 또 그 일로 우리가 죽어야 더 큰 행복이 주어지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는 그들을 공회에 끌고 나가서, 체제전복을 하려는 대역죄인이므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을 선동한 랍비 마티아스와 청년들 중 주모자 아홉명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설상가상으로 로마에서는 커다란 정변이 일어났다. 로마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친위대장 세야누스가 황제의 자리를 탐하다가 발각되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처형당했다. 이것은 유다의 총독 빌라도와 유대 의회에 즉각 큰 영향을 미쳤다. 세야누스의 도움으로 총독의 지위에 오른 빌라도는 언제든 본국으로 소환될 처지에 몰린 것이다. 의회는 의회대로 그동안 누려 왔던 특권이 로마의 정변 때문에 박탈당하는 게 아닐까 하고 전전긍긍 했다. 시카리 패들은 유대민중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들을 살해하여 로마와 유대권력층에게 떠넘기는 마타도어 테러를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공공연한 장소에서 자행했다.

유대백성들은 그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는 유월절 때 출현한다고 믿고 있었다. 백성들의 민족적 흥분은 다가오는 유월절을 기해서 절정에 달했다. 유대 땅은 다시 요동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백성들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광야의 랍비들과 각 지역에서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는 조직들에게 예리고의 1차 회동을 알리는 전통이 돌았다.“(소설‘동행’/홍성담/웹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연재/2014년)

위에 간추려서 열거한 사건들만 보더라도 당시의 유대땅은 21세기 분단 한반도보다도 훨씬 더 복잡다단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유대 민중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갈등과 분노와 증오가 유대 땅 곳곳에 가득했다. 신의 이야기 ‘경전’은 지배자들의 이해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주는 신의 약속이 되어버렸다.

 

그림=홍성담

괴물과 오랫동안 싸우다 보면 괴물을 닮아간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충돌은 18세기 이후의 인류에게 가장 재밌는 담론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것들 모두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판을 만들고 있으나, 그러나 이 두개의 론(論)이 어차피 진리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제외한 천지만물이 파괴되면 인간도 파멸되는 것이고, 인간이 파멸되면 천지만물도 파괴된다는 것이 바로 ‘진리’일 것이다. 그만큼 론(論)이란, 서로 상대적 개념을 끌어와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창조론 중심의 이야기에 굳이 진화론의 가장 최근 버전인 뇌과학 이야기를 잠깐 언급하여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의 유대 민중들에 대한 생각과 삶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BC 63년 로마 폼페이 장군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유대 예루살렘을 식민통치하게 된다. 이후 BC 38년에는 로마의 식민지가 된 유대의 통치권자 힐카누스 왕가의 내분 정권다툼으로 외세들이 개입된 유대지역은 외세의 전쟁터가 된다. BC 37년에 이두매 총독인 안티파터 아들 헤로데가 로마로부터 왕권을 책봉 받으면서, 이방인 출신의 유대의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유대지역은 로마 속주국이 되는 동시에 이방인이 유대를 통치하는 헤로데왕 시대는 왕권의 정통성 시비로 인해 사회는 더욱 불안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관습을 보존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최종적인 권위는 로마법에 따라 수행되었으며 로마군대에 의해 통제되는 식민지 정책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유대 민중은 로마당국과 헤로데왕과 대제사장의 3중 구조의 수탈 속에서 그 고통은 엄청났을 것이다.

심리학에 자주 등장하는 부정적 동일시(negative identification)에 대한 해석은 우리 속담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즉, ‘시집살이 심하게 산 며느리가 엄한 시어머니 된다’ 또는 ‘맞고 자란 아이가 폭력 남편 된다’라는 말이 있다. ‘괴물과 오랫동안 싸우다 보면 괴물을 닮아간다’라는 말도 있다. 즉, 자기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상대방의 특성을 그대로 내면화하는 것을 ‘부정적 동일시’라고 한다. 특히 국가간, 민족간 전쟁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살인행위를 정의라는 미명아래 그대로 따라하는 것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생명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공포, 분노, 두려움, 슬픔, 증오, 고통은 생존에 필요한 ‘1차적 감정’으로써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뇌의 최하부에 있는 가장 원시적인 뇌, 즉 ‘파충류의 뇌’에서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이다.(폴 맥클린 <진화에서의 삼위일체의 뇌>1990/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B.V)

일본군국주의의 식민지로 36년, 한국전쟁 당시 학살의 공포, 5.16 쿠데타 이후 군부독재의 장기간에 걸쳐 강요된 압제의 경험에 대한 ‘부정적 동일시’가 우리시대에 아직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좌파들을 총살하라’고 공공연하게 외치거나, 자식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세월호특별법’을 제정해 달라고 단식투쟁을 하는 유가족들 앞에서 통닭과 햄버거와 자장면, 피자 등등을 쌓아놓고 아귀아귀 퍼먹는 소위 ‘폭식투쟁’의 모습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당장 평양을 폭격해달라고 미국에게 애원하는 오늘의 대한민국 상황을 상상해보자. 정보가 늦고 훨씬 부족했던 예수 당시의 유대는 어떤 상황이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1차적 감정’이 절제되고 승화되어 타인에 대한 공감과 좀 더 차원 높은 긍정적인 행동이나 합리적인 판단이, 뇌의 가장 진화된 부분인 뇌의 신피질, 전전두엽에서 작동하기 까지는 자기성찰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위의 책)

예수는 자기성찰의 시간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조건을 ‘사랑’이라고 설파한다. ‘사랑’이 ‘자기성찰의 시간’을 껴안을 때 우리는 영성(靈性,Spirituality)을 느낀다.

예수, ‘사랑’이라는 열쇠

총체적으로 썩어버린 유대 땅은 죽음과 직면한 자기성찰을 담은 민중들의 투쟁이 아니면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없다는 생각 앞에서 예수는 방황한다.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신 앞에 바로 설 수 없다는 그이의 절망감이 궁극적으로 ‘사랑’을 외치게 된다.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랑’이라는 열쇠, 그러나 아무도 그이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이의 최측근들조차 저 두 가지 명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국가’나 ‘정부’ 쯤으로 이해하는 제자들은 ‘새 세상이 오면 나는 국무총리를 할 테니, 너는 장관을 해라’ 라며 서로 도래할 새로운 세상에서의 자리다툼으로 매일 언쟁을 벌이고 그것은 곧 동료들끼리 불신으로 번졌다. 그이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 중에도 그 불신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이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제자들마저도 그럴진대 민중들의 몰이해와 불신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이가 갈릴래아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까운 길을 마다하고 요르단 강을 따라 먼 길을 선택했던 것도 요한 사후로 강가에 흩어져 살던 옛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러나 유대 민중들이 새로운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절실한 마음만큼이나, 이곳저곳에서 선지자연하며 나타나는 인물들에 대한 불신도 비례했다.

욕망의 수채구멍처럼 썩어빠진 예루살렘을 보면서 그이의 조급한 마음에 울화통이 폭발한다. 성전을 뒤엎은 후에 이곳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책망한다.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다시는 이런 부패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자신이 이 모든 썩어빠진 상황들을 부둥켜안고 저승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몰이해한 제자들과 당대의 민중들, 그리고 유대 땅의 상황이 자꾸만 멈칫거리는 그이에게 죽음을 재촉했다.

 

몬바에르니 프세우도(Monvaerni Pseudo)의 '최후의 만찬', 15세기, 루브르 박물관

내 몸으로 마지막 제사를...

그이는 자신의 몸으로 마지막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이 처참한 광경을 최측근들인 제자들에게 기어코 보여주고 싶었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 19-20)

물론 당시엔 제자들이 그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 식사가 최후의 만찬이 될 것 인지 아무도 몰랐다. 지금 그들이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이의 살점과 핏물인줄도 몰랐다.

자신의 몸으로 제사를 지낸 그이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여전히 멈칫거렸다. 홀로 숲속에 들어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피가 되도록 죽음에서 벗어나는 기도를 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죽음을 피할 방법도 없었다. 절망에 빠진 그이가 숲에서 나오자 제자들은 그이에게 다가오는 죽음과는 상관없이 피곤에 지쳐서 자고 있었다. 그이는 자빠져 자고 있는 제자들의 옆구리를 발로 차서 깨우며 외쳤다. ‘육신의 피곤함을 이리도 견딜 수 없느냐’

곧이어 군사들이 그이를 체포하자 동료들은 그이를 지켜주기는커녕 너나나나 할 것 없이 먼저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이가 대제사장 집의 뜰에 끌려와 조사를 받고 있을 때, 베드로 역시 한 동료의 안내를 받아 뜰에 들어와서 그이의 등 뒤에 섰다. 저들은 그이의 죄를 확정하기 위해서 증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이가 고개를 뒤로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과 눈이 잠깐 마주쳤다. 베드로의 증언으로 그이의 죄는 확정되었고, 대신에 베드로와 더불어 예루살렘 어딘가에 숨어있는 동료들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새벽닭 울음소리가 세 번째 들리는 순간이었다.

신격에 대한 반란 사건, 지금으로 치면 ‘국가반란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사건으로 처리되지 않고 그이 한 사람만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동료들은 로마 군사들과 헤롯과 대제사장의 사병들에 의해 몇 겹으로 포위되었던 예루살렘을 단 한 번의 검문검색도 없이 벗어나서 갈릴리까지 무사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결국 유다에서 베드로까지 자의든, 타의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동료들은 그이를 유대의 지배 권력에게 팔아 넘겼다. 그이가 진즉부터 눈치를 챌 만큼, 동료들의 배신은 조직적으로 그이에게 가해졌다.

동료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그이를 희생제물로 바쳤다는 자책감에 오랜 시간을 시달렸을 것이다. 결국 자기들이 그이의 살점을 씹어 먹고, 그이의 피를 마신 댓가로 살아남았다는 자책이 그이의 생각과 말씀을 한 목숨 다 하도록 세상 끝까지 증언하리라는 맹세를 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동료들은 그이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이의 살과 피로 제사를 지냈다.

오늘도 사람들은 그이의 살점을 한입 베어 물고 그이의 피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제사를 지내며 명멸하는 현대 그리스도교를 유지시키고 있다.

2천년전, 예수가 동료들과 함께 했던 ‘최후의 밥상공동체’에서 자기 몸으로 제사를 지내어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를 만들었던 그 장엄한 사실은 인류역사상 가장 거룩한 퍼포먼스가 되었던 것이다. 

 

홍성담
판화가, 1984년에 광주오월민중항쟁 연작판화 ‘새벽’을 제작했고, 1989년 평양축전에 '민족민중 미술인 전국연합' 이 공동 제작한 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슬라이드를 보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한국작가, 일본과 동아시아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연작 ‘야스쿠니의 미망’ 전시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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