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식의 명료화’를 위한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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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식의 명료화’를 위한 헌신
  • 한현
  • 승인 2018.02.14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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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가톨릭일꾼세미나 공개 인터뷰_한현 아녜스
한현 아녜스. 사진=한상봉

인성회에 관하여

저는 1982년부터 1991년 인성회가 가톨릭사회복지회로 바뀌기 전까지 12년 정도 그곳에서 활동했어요. 지학순 주교가 담당 주교가 되어 1975년 시작한 인성회(仁成會)는 아시아주교회의 사회사목위원회에 속하는 기구이기도 했는데, 1967년 바오로 6세 교종이 발표한 회칙 <민족발전>에서 제시한 ‘인간발전’에 주목하는 기구였어요. 인간발전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통합적인 개념인데, 먹고사는 문제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변화와 영적 성장까지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개념입니다. 당장의 필요에 응답하는 긴급구호와 자선활동, 그리고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요.

인성회에서는 신앙생활과 사회활동을 통합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외국자료들을 번역해 소책자로 발간하고, 읽기 어려운 사회회칙을 쉽게 풀어놓은 소책자들도 번역했어요. 결국 인성회가 사회복지와 사회운동을 통합적으로 보면서 일을 했던 거죠. “사랑으로 가진 바를 나누자”는 사순절 모금 운동 등 긴급구호나 자선활동뿐 아니라 노동자, 빈민, 농민들을 위한 사회운동도 중요했습니다. 

<하나되어>, <참사람되어>에 관하여

우리나라에 우루과이라운드 등 수입개방이 시작되면서 도시 소비자와 생산자를 연결해보자는 취지에서 ‘천주교민족자주생활운동’ 같은 거창한 이름으로 간행물을 내다가, 그게 <하나되어>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여기서는 사회현실, 신앙문제, 공동체운동 관련해서 이런저런 소식과 번역물들을 실었어요. 특히 공동체에 관심이 많아서 남미나 필리핀 등 아시아교회의 ‘그리스도교기초공동체’(BCC) 같은 것을 가톨릭농민회 분회나 천주교도시빈민회, 가톨릭노동사목 등에서 찾아보려고 했어요.

1992년 인성회를 정리하면서 제대로 공동체를 살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사람되어>라는 잡지를 시작했어요. “되어”라고 쓴 것은 여전히 우리 삶은 ‘진행형’이라는 뜻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신앙과 활동의 통합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신앙에서 힘을 받지 못한다면 굳이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신앙이 장식품이 아니잖아요. 저는 신앙이 우리 삶에서 외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요. 활동가들처럼 모세는 현실에서 신앙으로 간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신앙에서 시작해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방식을 따르든 아브라함의 방식을 따르든 결국 신앙과 활동은 통합되어야 합니다.

 

사진=신유진

도로시 데이와 환대의 집에 관하여

저는 사람에게 쏠리는 성격은 아닙니다. 도로시 데이의 삶과 생각을 존경하지만 미치도록 좋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일꾼과 환대의 집에 마음이 끌린 것은 이것 자체가 하나의 교회, 그것도 바람직한 교회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굉장히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닮고 싶었어요. 이분들이 표현하는 내용도 시공간을 떠나서 보편적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한국에서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꾼운동을 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좀 게으르기도 하고, 미국과 한국교회의 상황이 좀 다른 것 같아서요.

어차피 일을 하고 환대의 집을 만들려면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기부문화가 발달한 미국과 달리 한국교회에서는 교계와 상관없이 자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요. 교계에 속해 있어야 신뢰도 받고 돈도 모이는데, 그래서 교계와 독립적으로 일을 한다는 게 어렵죠. 신부라도 한 사람 붙어줘야 돈이 모이죠. 사실 그들처럼 똑같은 일을 할 필요는 없어요. 가톨릭일꾼의 지향점을 우리 현실에서 그냥 접목하면 되는 것이잖아요. 가난한 이들 돌보는 것도 어떤 사람이 한 두 사람 돌볼 여력이 있으면 돌보면 되는 거고요. 어찌보면 한국에서는 의식의 명료화 작업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몇 사람이라도 모여서 좋은 글을 읽고 토론하면서 신앙과 활동에 대해 식별하는 작업이 중요하죠. 미국 환대의 집이 절대적 기준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현 아녜스. 사진=신유진

의식의 명료화 작업에 관하여

<참사람되어>를 시작한 지 벌써 25년이 되어 가는데, 소모임을 하면서 활동은 각자 자기 현장에서 알아서 하는 거죠. 사회현실과 교회에 관한 거시적인 담론이나 분석들은 다른 매체나 책에서 많이 다루고 있으니 거기서 참고하면 될 텐데, 우리들 신앙에 관한 문제는 교회든 어디든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으니까, 그걸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이 모임에서는 비교적 비슷한 생각을 지닌 이들이 모여서 그런 자기 확신을 더 강화해 가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본당이나 교회는 ‘정거장’ 정도로 생각해요.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죠. 여기서 힘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게 쉽지 않고 오래 머물 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것은 분명한 신앙적 확신 속에서 세상에 나가서 사는 거죠. 지금은 예전보다 환경이 많이 나아져서, 우리들의 신앙을 명료화 하는데 교회나 교회 공식기구의 도움을 안 받아도 해나갈 수 있어요. 본당활동이라는 게 사실 세상과 직결되는 게 별로 많지 않아요. 그저 본당구조 자체를 유지시키기 위한 활동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본당은 너무 제도화 되어 있어서 의식의 명료화 작업을 하기가 대단히 힘들어요. 자기 신앙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본당이 더 안전한 공간인지 잘 모르겠어요. 본당에 신앙인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신앙이 뭔지 잘 알아야 해요. 그냥 세례를 받았다고 다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죠. 본당이란 ‘일종의 회원들을 한데 모아놓은 곳’이죠. 교회 밖에서 활동하면서도 성사생활이야 원하면 주변에 있는 본당에 가서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가톨릭일꾼들도 열심한 신자들은 근처 성당에서 매일미사도 하고 성무일도도 하잖아요.

활동자금, 돈에 관하여

교회 안에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필요한 곳에 돈이 쓰이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사회사목 활동가들이 돈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는데, 그렇다면 가난한 활동가들은 돈과 상관없이, 아니면 형편이 닿는 대로 가능한 일을 창의적으로 찾아봐야 해요. 돈이 없어도 가능한 일을 찾는 거죠. 돈 때문에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고 믿습니다. 돈 때문에 우거지상을 쓰지 말고, 자유롭게 편안하게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진=신유진

기쁘게 활동하려면

활동하면서 늘 기뻐야 한다고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제가 좋아하던 배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이 세상을 늘 웃고 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고. 사람이 어떻게 항상 웃고 살수 있겠어요. 내가 편안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웃을 수도 있겠지만, 주변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을 보면 함께 아파하고 울고 찡그리게 되잖아요.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중요한 것은 이런 외적인 표현이 아니고 마음 속이겠죠.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정말 소중한 일인지 점검해보고,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 봐야죠.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웃지 않느냐?”고 누가 물으면,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웃건 말건.” 하고 가볍게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해요.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을 유지하는데 힘을 주는 무언가와 적극적으로 맞닿아 있어야 해요. 우리가 부정적이고 어둔 모습을 너무 많이 볼 적에 반대로 이름다운 모습을 찾아나서야 해요. 어느 성당에 미사 강론이 영 그렇다 싶으면, 신부님 타박하지 말고 정말 좋은 강론을 하는 곳을 찾아 나설 수도 있죠. 기존의 것에 꽉 매여 있을 필요는 없는 거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 관하여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다른 이들을 배제하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닌 시간과 재원이 제한적인 것이어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는 이유는 이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평등한 시민으로 세우려면 이들에게 시간과 재원을 우선적으로 나누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만 인성회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저는 가난한 이들 당사자 보다는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그들을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이를테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는 일꾼들을 양성하는 게 시급하다는 생각입니다.

도로시 데이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도로시 데이는 괴로움에 위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 출산에 대한 기쁨 때문에 하느님께 다가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였던 그녀가 개종한 게 아니라, 여러 계기를 통해 하느님께 돌아선 회심자라는 말이지요. 도로시는 회심 이후에 자신이 그동안 샛길로 갔으며, 이제는 하느님 안에서 가야할 길을 찾았다고 전합니다. 도로시에게는 자신의 급진적인 활동과 신앙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자기 활동의 의미를 신앙 안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고백에서 힘을 얻는 거지요.

그래서 도로시 데이는 자기 삶을 “하느님이 안 계셨으면 아무 의미도 없었을 삶”이라고 고백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해방자’나 ‘구세주’로 고백하곤 하지만, 도로시에게 하느님은 아주 개별적인 체험 안에서 만난 분입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느끼는 ‘하느님 중심주의’가 사회적 실천과 모순되지 않았던 거지요. 물론 도로시 데이에게 교회는 예수님도 떼어버릴 수 없었던 ‘십자가’로 여겨졌지만, 예수님과 교계를 동일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계와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도로시에게는 ‘회심’이‘선물’처럼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한현 아녜스
<참사람되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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