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항쟁과 천주교] 열아홉 명의 광주대교구 신부들, 단식에 돌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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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항쟁과 천주교] 열아홉 명의 광주대교구 신부들, 단식에 돌입하다
  • 이명준
  • 승인 2018.02.12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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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호헌조치에 대한 천주교계의 반응-2
단식 5일째를 맞이하고 있는 광주교구 사제들의 모습(1987.04.25)_사진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13호헌조치에 대한 집단적 항거는 광주의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광주대교구 소속 신부 60여명은 4월 16일 임동성당에서 윤공희 대주교 집전으로 ‘성유축성미사’를 올리던 날 자연스럽게 만나 저항을 준비했다. 전두환의 호헌조치가 내린 뒤 사흘만이었다. 신부들은 “4·13폭거로 국민을 기만하고 대통령 직선제의 열망을 배신한 현 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위한 십자가를 지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나흘 뒤인 부활절 이후 첫 화요일인 4월 21일, 남재희(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신부 등 사제 12명은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를 드리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금남로 광주 가톨릭센터 6층 소성당과 부속실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성명서가 창문 밖 금남로로 뿌려졌다. 물로 입술만 적시는 목숨을 건 처절한 단식이었다. 이 소식은 전국으로 퍼졌고, 동조 단식·농성·지지 성명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천주교 신부들에 이어 개신교 목사·장로들도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종교인들의 목숨 건 단식은 정세를 관망하던 지식인들을 일깨웠고, 시민들을 저항으로 인도했다.

광주대교구 사제단의 단식기도를 시작한 신부들은 남재희, 안호석, 임병태, 송홍철, 김희항, 이재휘, 김재기, 강종훈, 이준형, 박성열, 표재현, 황양주 신부 12명이었다가, 곧 이어 오요안, 박철수, 윤용남, 김승희, 정규완, 이천수, 강영석 신부 등 일곱 명이 같이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단식기도에 참여한 광주대교구 신부는 총 19명이 되었다.

신부들이 발표한 성명서는 “빼앗긴 정부를 선택할 국민의 권리”로서 ‘직선제 개헌’이 국민적 요구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 손으로”라는 구호를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성명서 마지막에는 단식기도에 참여한 신부들이 친필로 서명을 하였다.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를 드리며>

현 독재체제의 고수를 골자로 하는 <4·13특별담화>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기대를 일방적으로 말살시켰을 뿐 아니라, 다시 한 번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도덕성과 그 약속에 대해 책임을 지는 윤리성이 현 정권에는 도무지 없음을 드러내는 폭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통치권자의 마음을 비운 결단을 기대하였지만, 막상 내려진 이른바 ‘고뇌에 찬 결단’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국민에게는 슬픔을 안겨 주었고, 이 땅 위에는 다시금 최루탄이 그칠 줄 모르고 터지며 국민의 눈과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김수환 추기경 ’87년 부활절 메시지)

우리는 지난 일 년 동안 개헌 공방의 과정을 지켜보며, 현 정권이 유신의 잔재를 청산하고 국민 모두가 나라의 주인으로서 기본 인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민주화를 이룰 수 있도록 명예롭게 퇴진함으로써, 12·12군사쿠데타와 5·18광주민중학살의 죄과와 그 후의 학정을 속죄하게 되기를 국민 모두와 함께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국민의 여망과 기원은 지난 일 년 동안 어느 정권 하에서도 볼 수 없었던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건대학생 시위사건, 박종철 군 고문살해사건, 적법한 집회를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경찰 작전으로 봉쇄하는 것 등등으로 매번 배신당해 왔습니다. 또한 민주화를 위한 개헌 논의를 전개하면서도, 민주화를 외치다 용공조작에 의해 옥살이를 하고 있는 수천 명의 학생 및 양심수들의 사면과 민주인사들의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번 <4·13특별담화>는 현 정권이 개헌 논의 시작부터 민주화의 의지를 조금도 가지지 않았으며, 단지 개헌 논의를 장기집권의 연장의 술수로서만 이용해 왔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민주화에 있어서 선진과 후진이 따로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하고,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하는 천부적인 기본 인권이기 때문에 여하한 이유에 의해서도 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문제의 핵심은 민주화를 실천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년 2월에 단임을 실천하겠다는 결의는 우리 헌정사상 처음의 일이 될지 모르나, 개헌을 하겠다는 현행 헌법에 의한 차기 대통령 선출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유신 이래 독재권력에 의해 빼앗긴 ‘정부를 선택할 국민의 권리’를 되찾자는 민의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평화와 자유의 대제전인 서울올림픽이 현 독재체제 유지의 근거가 도저히 될 수는 없습니다.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국민이 군사독재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와 선택으로 탄생된 정부에 의해 국민의 축복 속에 서울올림픽이 치루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단임이나 올림픽이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지, 국민이 단임이나 올림픽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이 부활절 메시지에서 “현실의 정치가 아무리 허망하고 사회의 모든 현상이 아무리 어두워보여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 및 사랑의 불을 지피며 살면, 주님은 억압된 민중의 짓밟힌 인간성을 반드시 살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밝히신 믿음을 함께 하며, 이 나라 이 백성을 섬기라고 파견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민주화를 위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또한 참담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우리들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속죄하기 위해 오늘부터 무기한 단식기도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단식기도 중 우리는 아래와 같은 우리의 기도 지향이 진리와 공의의 원천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가납되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여러분들께서도 저희들의 기도에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 유신 이래 빼앗긴 정부를 선택할 국민의 권리 회복을 위해
1. 양심수 및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과 민주 인사들의 복권을 위해
1. 옭아맨 사람이 푼다는 말과 같이 명목상의 언론기본법의 개정이나 지방자치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참정권 보장과 언론자유를 위해
1. 집권 시와 집권 이래 자행한 모든 죄과를 속죄할 수 있는 현 집권 세력의 명예로운 퇴진을 위해

“주여! 이 나라, 이 백성을 군사독재와 그 억압에서 해방하소서.”

1987. 4. 21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재희 신부, 안호석 신부, 임병태 신부, 송홍철 신부, 김희항 신부,
이재휘 신부, 김재기 신부, 강종훈 신부, 이준형 신부, 박성열 신부,
표재현 신부, 황양주 신부, 오요안 신부, 박철수 신부, 윤용남 신부,
김승희 신부, 정규완 신부, 이천수 신부, 강영석 신부(친필 서명)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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