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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단진복] 나는 그들에게 자비의 사발이고 싶네[진복의 사다리-마지막] 너희보다 앞서 있었던 예언자들도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삶에는 즐거움이 적었고 고통이 많았지만, 진복들의 사다리는 기뻐하라는 그리스도의 설교로 끝난다. 왜냐하면 예언자들과 함께, “너희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서 클 것”이기 때문이다.

성급함이 만연된 문화 속에서, 지연되는 것에 만족하기가 무척 어려운 문화 속에서, 후에 일어날 어떤 것 때문에 지금 기뻐한다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삶의 목표를 안전에 두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을 원한다면 탱크를 사는 것이 낫다. 탱크의 창문은 작고 손님방도 없지만 도둑들을 틀림없이 막을 것이다. 마치 은행 금고 안의 안전한 서랍속에 있는 것처럼.

마지막 휴가처럼 산다면

헬리 카스 감독의 <버드의 마지막 휴가Last Holiday > (1950)

나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영화들에 대해 생각할 때에 <마지막 휴가>가 손꼽힌다. 이 영화는 J. B. 프리스틀리가 썼고 1950년에 상영된 역설적인 영국 코미디이다. 알렉 기네스가 죠지 버드 역할을 하는데, 그는 공복처럼 조심스러운 영업사원으로, 결혼을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그의 얼굴에서 보는 것은 매력적인 기질이 아니라 삶의 공포이기 때문이다. 집요한 두통이 그를 괴롭혀서 의사를 만나게 한다. 검사를 한 후 버드는 진단을 받으러 다음날 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가 다음날 갔을 때 검사 자료들이 뒤섞여서 의사는 다른 사람의 검사지를 버드의 서류철에 넣었고 그래서 그에게 불치병을 앓고 있다고 하면서 6주 안에 죽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실상 버드가 필요한 것은 아스피린이나 맥주 한컵 정도인데 말이다.

의사의 실수가 버드의 삶 전체를 변화시킨다. 그는 그날 바로 일을 그만 두고 은행구좌를 비우고 (노년을 위해 저금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화려한 호텔에 방을 예약하고 해변가의 리조트도 예약한다. 그는 죽음이 그렇게 빨리 다가오기 전까지 그런 호텔에 발을 들여놓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루 후에 그는 그의 마지막 휴가를 시작한다. 더 이상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없으므로, 버드는 그전 같으면 결코 감히 하지 못했을 태도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무서울 것이 아무 것도 없어진 것이다.

그의 생애 처음으로 여성들이 그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은행가들, 기업의 중역들, 그리고 정부관리들이 그의 충고를 듣기 위해 줄을 서고, 함께 일하자고 하며 간부자리를 제시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서 신비스러운 기질을 느낀다. 그것은 자유와 일탈감으로, 사람들은 그를 꼭 만나야 할 사람으로 생각한다. 독자들만이 그 신비스러운 기질이 무엇인지 알뿐이다. 버드의 사형선고는 그에게 해방을 가져왔다. 그는 더 이상 두려운 미래의 포로가 아니다.

호텔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다. 많은 측면에서 그들의 휴가 호텔은 준비가 잘 갖추어진 연옥이다. 버드는 그의 동료 손님들을 덜 이기적인 사람들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성 프란치스꼬 같은 인물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준비된 식사에 그가 늦음으로써 사람들이 그에게 가진 애정을 시큼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알게 된 사실은 주인공이 이웃을 돕다가 교통사고로 방금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실수했던 의사는 결국 옳았다. 그의 진단이 맞았다는 것이 아니라 죠지 버드가 죽을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기본 사실에 있어 옳았다는 것이다. 의사의 유일한 실수는 그가 6주가 채 못 되어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다면, 이 책마다 <마지막 휴가> 비디오를 하나씩 넣고 싶다. 이 영화는 영의 가난에 관한 것이다. 내가 더 이상 책임지고 있는 것이 아닌 삶속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죠지 버드처럼 뛰어들었는데, 나 자신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해방되는 것이다. 새처럼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또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에 관한 영화이다. 진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 다른 이들에 대한 두려움, 우리 동료들의 경멸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가난의 두려움,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와 똑같은 사실을 표현하는 또다른 방식은 우리가 거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오 17,20). 그리스도는 시나이산이나 타볼산을 말한 것이 아니라 더 은밀한 장애물들을 말한 것이다: 지나치게 주의하고 믿지 못하는 우리의 산, 두려움이라는 우리의 산에 대하여.

진복팔단에서 중요한 말은 "복되도다"이다. 영이 가난한 이들, 슬퍼하는 이들, 의를 목말라하는 이들, 자비로운 이들, 깨끗한 마음의 사람들, 평화를 만드는 이들, 하느님나라를 위하여 벌받을 것을 감수하는 예언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진복팔단에서 또다른 말이 빛을 주고있다. 그것은 "기뻐하라"는 말이다.

하느님이 없다면, 지구라는 특정한 행성에 존재하게 된 피조물들의 행위에 하느님이 전혀 관심이 없다면,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무엇을 믿든지 거의 상관이 없게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탈린의 재와 세자 요한의 재가 구분되지 않는 먼지통으로 가게될 뿐이다.

그러나 복음서가 진실하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말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이라면,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가장 건전하고 현명한 일이라면, 왜냐하면 각각의 발걸음이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더 가까이 데려가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기뻐해야 할 것이 많다. 아일랜드의 가장 위대한 성인들 중의 한 사람이며 신비가인 킬데어의 브리짓트가 부르는 찬가와 같은 비전 속에서 우리는 그 기뻐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왕중의 왕을 위하여 커다란 맥주의 호수이고 싶네.
나는 하늘의 천사들이 영원히 그 맥주를 마셨으면 좋겠네.
나는 최고 품질의 믿음고기와 순수한 신심을 갖고 싶네.
나는 나의 집에서 속죄의 도리깨질을 하고 싶네.
나는 나의 집에서 하늘의 사람들을 맞이하고 싶네;
나는 그들이 마음대로 처분하는 평화의 단지이고 싶네;
나는 그들이 나누어주는 자비의 사발이고 싶네;
나는 그들에게 자비의 광이 되고 싶네.
나는 그들이 마시는 동안 함께 하며 즐거움이 되고 싶네.
나는 예수가 그들 가운데에 계시면 좋겠네.
나는 빛나는 명성의 세 마리아가
우리와 함께 있으면 좋겠네.
나는 하늘의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온갖 곳에서 모여와
우리 주변에 있으면 좋겠네.

진복의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은 최고의 동반자들과 함께 있다: 예언자들, 순교자들, 그리고 성인들과 ­거대한 증인들의 무리 속에.

짐 포레스트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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