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 박해를 축복으로 받아들일 때, 두려움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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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 박해를 축복으로 받아들일 때, 두려움을 넘어서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12.12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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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28] 옳은 것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되도다

정교회에서는 진복들에 대한 성찰이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위한 준비로 자주 권고되고 있다. 그러한 성찰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 우리가 아직껏 떼지 못한 발걸음에 대하여 양심성찰의 뼈대를 마련해 준다:

나는 영의 가난을 포옹하는가 ­ 아니면 재빨리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는가?
나는 누구를 위하여 애도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온유하게 복음에 응답하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나는 의로움에 굶주리고 있는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얼마나 자비로운가?
나의 마음은 얼마나 순수하며, 무엇이 나의 마음을 불순하게 유지시키는가?
어떤 방법으로 나는 나의 마음을 정화시키려고 하는가?
나의 삶을 엇갈리게 만드는 분할점들은 무엇이며, 평화조성가로서 나는 이러한 분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는가?
어떤 적들을 나는 사랑하는가? 나는 어떤 적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위협받고 있는 누구의 삶을 보호해 주려고 하는가?
나는 박해를 축복으로 받아들이는가 ­ 아니면 나에게 고통을 줄 것 같은 문제들을 피하는가?

만일 당신의 대답들이 내 것과 비슷하다면, 당신은 아직도 멀은 셈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소심하게, 미지근하게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게 하고 그래서 마지막 걱정이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일부 대답은 우리가 우리의 삶, 행동, 어휘들을 우리가 살게된 곳의 소위 “정상, 보통의” 기준에 맞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회적 동물인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실천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강요하는 한계 내에서 조정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의 사회적 직업적 삶에 맞게 조절하고 있다. 나는 세속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것의 긴장을 알게 된다. 공공장소에서 성서나 확연한 종교서적을 읽기 시작할 때마다 극복해야 하는 당황스러움을 통하여 나는 이 긴장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뉴욕시에 있는 성 요셉의 집 환대공동체 일원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즉각적으로 우리의 응답을 맞추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주중에 핵전쟁 준비를 비판하는 인쇄된 팜플렛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서너 명이 대낮에 맨하탄 중심가의 “민방위” 사무실 가까이 에서 한 시간동안 서서 이 일을 하였다. 민방위 사무실은 모든 뉴욕시민들에게 핵전쟁 공격에 대비하여 의무적으로 일 년에 한번씩 민방위 훈련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모든 차와 버스가 정지하고 지하실이나 지하철 안으로 모든 사람이 피해 들어가야 했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가 순식간에 유령마을이 되었다.

자료들을 배부하면서 우리는 황제가 알몸이라고 소리치는 아이들과 같았다. 당신은 지하도에 피난처를 구해서 핵전쟁을 살아남을 수 없다고 우리의 자료가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이 살아남는다 해도, 당신은 지옥 같은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바쁜 도시의 거리에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엄청난 교육이었다. 뉴욕의 교통신호 체제는 여전하였고, 사람들이 렉싱톤 대로를 따라 물결처럼 내려왔다.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각 그룹들의 첫 번째 사람의 반응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 사람은 서두르는데­ 보통 그의 반응이 뒤따라오고 있었던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반응을 결정하였다.

첫 번째 사람은 보통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과정은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이었다. 만일 내가 앞에 선 사람에게 우리 자료를 줄 수 있다면 적어도 그의 뒤에 오는 몇몇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따르기가 쉬웠다. 만일 첫 번째 사람이 거절하면, 내가 주는 자료를 아무도 받지 않을 확률이 많았다.

나는 다른 상황에서도 이와 똑같은 현상을 알아차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내 안에서도 그런 현상을 발견하였다. 이런 원칙을 의식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우리는 지도력이라고 부른다.

 

사진출처=pixabay.com

어떻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은 측면에서 우리 인간 존재들은 물고기들이 하는 것처럼 떼지어 밀려다니며 살고 있다. 이런 까닭에 너무나 평범하고 지각 있는 사람들이 독일에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에 히틀러를 환영하고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는 데에 순종하는 역할을 하고 아무런 개인적 원한이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대학살을 도왔던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나치즘에 별로 저항하지 않았다. 비록 그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자주 순교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성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나는 힐데가르트 고스­마이어가 내게 말해주었던 경험을 기억한다. 힐데가르트는 용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평화활동은 수천 명의 생명을 구하였고 비폭력적 방법을 사용하며 불의에 저항하는 많은 투쟁들에 영감을 주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보았던 한가지 경험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은 1938년 비엔나에서였다. 그때 그는 열두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부모 덕분에 히틀러가 누구였으며 나치가 무엇을 표방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국제화해동지회의 회장이었는데, 후에 힐데가르트가 아버지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도시의 모든 학생들이 중앙 대로가에 불려나와서 그를 환영해야 했으며 나도 그 큰 군중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나 홀로 있었다. 그러자 호위하는 차들이 나타났고 히틀러는 그중 한 차안에 서 있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쳐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히틀러 만세, 히틀러 만세!”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곳에서 악의 힘을, 그 어떤 개인보다 더 강력한 악의 힘을 느꼈다. 나는 히틀러에게서 오는 매력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조작의 매력이었다. 악은 엄청난 매력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손을 들거나 소리치는 일에 합류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들이 나를 죽인다해도, 나는 손을 쳐들지 않을 꺼야.”

그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바로 그 순간에 반대하기 위한 개인적 결정을 해야 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중대한 투쟁의 순간이었다. 폭력에 대한 투쟁; 정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하는 투쟁이었다. 그것은 투쟁이었고, 어떤 의미에서 그 투쟁은 나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날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수년동안 이 투쟁은 더 강도 높게 계속되었다.

열일 곱살 때에 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너무나 잔인하게 행동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 그런 사실은 살아가려는 나의 의지조차 건드렸다. 내 영혼에도 자국을 남겼다. 열일곱 살부터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난 정말로 투쟁해야 했다. 계속 살아가는 선택을 하기 위하여, 살아갈 의지를 갖기 위해서. 그러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뿌려 놓았던 작은 씨 위에 사랑의 힘에 대한 그의 믿음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치된 삶의 비전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전 삶을 통하여 나는 악의 힘에 매우 민감하였고 절망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야 했다.

힐데가르트의 이야기는 대부분의 우리들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박해의 진복을 피하도록 만드는 또다른 측면을 밝혀준다. 그것은 두려움이라는 측면이다.

나쁜 경제의 뿌리는 두려움

토마스 머튼은 그의 글,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에서 그 두려움을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지는 두려움이라기보다 모든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라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자신들 조차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다시 말하자면 겸손만이­ 전쟁의 뿌리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다”고 머튼은 말한다.

나는 머튼의 이 글을 아버지에게 보냈다. 얼마 후 아버지는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당신은 그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전쟁의 뿌리는 나쁜 경제”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수년동안 아버지와 나는 머튼의 이 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지냈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에게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고 아버지가 계속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쁜 경제의 뿌리가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였다.

전쟁과 사회불의 뿐만 아니라 개인이든 집단 차원이든 도덕생활의 모든 실패도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한편으로 사회적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그 거부가 가져오는 모든 가능한 비참한 결과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도 있다. 참으로,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손안에 떨어지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는 하느님을 믿을 것이고, 적어도 창조의 원칙은 믿을 것이다. 우리 중에 아무도 창조가 그 자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지적인 감각을 갖고 있으며, 비록 하느님을 중력 같이 비인격적인 힘으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사람들은 중력을 사랑해야 한다는 어떤 가벼운 의무감도 느끼지 않고, 또한 중력에 대해 기도로 응답해야 하는 느낌을 전혀 갖지 않으면서도 중력을 믿을 수 있다.

지적인 믿음과 헌신은 다른 문제이다. 사랑은 존재의 핵심에 있는 어떤 태도이다. 사랑하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모순이다. 사랑은 항상 자율성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관찰했듯이: “벗들을 위하여 자기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사랑이 요구하는 것이 실제적인 죽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늘 자아에 죽는 것이다. ­드니즈 질리옹이 가족의 아침식사에 관하여 묘사한 것처럼­ 한 아들아이가 또 다른 아들이 먼저 쥬스를 컵에 따르도록 허용하는 것과 같이 아주 작은 자아의 죽음도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그런 작은 행동도 하지 못하게 자주 막는 것은 약하게 보일까봐 하는 두려움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길

모든 진복들은 자아에 죽는 것이다. 진복들의 기반인 영의 가난은 자아에 죽는 계속적인 과정인데, 그것은 자기증오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자포자기도 아니다. 다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 자아에 죽는 길 이외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교회 신학자이며 성 블라디미르 신학교 학장인 토마스 호프코 신부의 주제로서 그는 자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세계에서 개인이 관계들을 추구하고 집착하는 모습은 우리의 실존에 어떤 존재론적인 균열이 있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의미의 개체, 개인은 없다. 아마도 서구 유럽의 대학에서는 개인들이 창조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근본적인 통교를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당신을 보고, “당신은 나의 생명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

우리가 우리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당신 자신에게 매달리기만 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물론 용서하지 않으려는 것은 당신 자신을 놓고 싶지 않는 행위인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옹호하고 싶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고, 보호하고 싶다. 그러나 복음 전체에는 한결 같은 가르침이 있다 ­ 당신이 첫째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사랑의 행위와 자기 비움으로 존재하게 되는 자아를 옹호하는 것 이외에 방어해야 할 자아란 없다. 오로지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만 내 자아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용서란 그런 행위의 핵심이다 ...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충만해지는 자아만이 나의 자아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인 본질은 형이상학적인 절대이다. 하느님 자신의 자아는, 그리스도교적이고 복음적 용어를 사용해 표현하자면, 또다른 자아, 그분의 아들이다. 이와 똑같은 일이 인간의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므로 나의 진정한 자아가 타인이라고 깊이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나의 실재라면,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성과 충만함이 다른 이를 사랑하는 행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면, 그 사실이 바로 우리가 잠재적으로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는 개념에 실체를 주고 있다. 자! 만일 당신이 이 사실에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로 잘못하고, 약하며, 등등의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더한다면, 사랑의 행위는 늘상 용서의 행위가 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한 인간존재로서의 내가 내 자신을 발견하고 채워가는 방식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채우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용서의 행위는 바로 그것에 의해 우리의 인간성이 형성되어 가는 행위이다. 그 사실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자신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자살이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발전되어온 많은 영적 생활의 전통들은 그리스도가 영의 가난이라고 묘사한 자아에 죽는 것을 돕고자 한다. 단식은 이런 전통중의 하나이다 ­ 어떤 음식과 음료에 대한 작은 죽음이다. 단식의 중심적인 가치는 단순히 식생활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식욕과 욕구의 독재자에 대항하는 고강도의 전투와 같다. 단식은 항상 증가하는 기도와 자선에 연결된다. 하느님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과의 일치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세 아이의 어머니인 사람이 최근에 자기는 교회 달력에 들어있는 네 개의 긴 단식들을 고대한다고 나에게 말했다(그것은 여름이 시작될 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인 기념절에 하는 단식, 여름 끝에 하는 도르미티온 단식,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대림절기동 안의 예수탄생 기념단식,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 전에 기념하는 대 단식이다). 그는 “이 시기가 되면 집의 생활은 항상 더 평화스럽게 됩니다. 아마도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화학적인 것인지도 모르지요 ­아이들은 설탕을 덜 먹게 되니까요­. 그러나 그건 또한 모든 사람의 태도의 변화 때문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한다.

애도하는 것도 자아에 승복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이 세상에서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슬픔 속에는 다른 세상의 삶의 무한한 가치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과 내가 다른 이들과 일치하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다.

온유함도 자아에 죽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승복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하고 섬기라고 주신 사람들의 요구에 승복하는 것이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은 매일의 투쟁 속에서 자아를 극복하고 사회 속에서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서로로부터 갈라지게 하는 모든 것들, 친교와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면서 자아에 죽는 것을 요구한다.

자비로운 것은 하느님께 승복하는 것이고, 자아에 대한 또다른 죽음이다. 내가 바쳐야 할 것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자선이 아니라, 오직 나의 삶을 통하여 표현되는 하느님의 자비이며, 나는 그 길에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순수한 마음은 오로지 자아에 죽지 않고서는 얻을 수가 없다. 마음을 순수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뿐이다.

평화 만들기 또한 자아에 대한 죽음이다. 친구이든 원수이든, 다른 사람들의 합법적인 요구를 지키려고 애쓰면서 자아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없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는 먼저 늑대를 대면하고 그리고 나서 늑대가 보살핌을 받도록 주선했다.

박해를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아가 죽는 마지막, 결정적 행위이다. 그것은 영의 가난으로서 어떤 회한이나 증오 없이 판단과 거부를 대면하도록 우리자신을 허용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자아의 포기행위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매우 작은 행위들인데, 이런 행위가 진복의 사다리로 올라가도록 해준다.

 

짐 포레스트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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