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단진복]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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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단진복]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8.2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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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15]...그들은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도록 하기 위하여 왔다.
- 예수 그리스도(요한 10,10)

시편 22장의 다음 구절은 정교회 가정에서 식사 때의 축복 기도로 자주 사용된다:

"가난한 사람 배불리 먹고
야훼를 찾는 사람은 그를 찬송하리니.
그들의 마음은 영원히 살리라."(26절)

한 번은 우리 집에 온 손님이 축복 후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농담하고 있는 것이지요. 부자들도 만족하지 않는데, 가난한 이들이 만족한다는 기도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시편의 이 구절은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 단지 경제적 조건상의 가난만이 아니라 영의 가난이라고 이해할 때에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된다. 경제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가난해도 감사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러시아 피난민으로서 삶을 시작했고 런던에서 영국의 러시아 정교회 교구를 책임지게 된 안토니 블룸 대주교는 얼마 전에 사람이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는지 질문을 받았다. “겸손을 원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냥 감사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우리는 충실한 것에 대해 현금으로 보상받지 않는다. 의로움은 결코 가게의 저울로 무게를 잴 수 없다. 신체적 허기는 우리 세계에서 특별한 조건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식사가 개선된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가난은 자주 굶주림과 동의어이다.

 

성요셉의 집, 주방 뒤칸. 사진=한상봉

진복 선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음식과 소유물에 대한 굶주림이 아니라 의로움에 대한 굶주림에 초점을 두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하느님과 일치되는 삶, 자비의 삶, 사랑에 의해 변화되는 삶이다. 그렇다고 삶의 물질적 필요를 경멸하는 것은 아니다. 라벤스부르크 수용소의 죄수들은 빵 부스러기 하나 낭비하지 않았고, 그들의 많은 동료들은 고질적인 영양실조 때문에 오는 질병으로 죽었다. 마더 마리아는 빵 조각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이유는 빵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주 굶주리고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거의 죽어갈 지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부자들은 채워졌는가? 위대한 성 레오 교종은 1600년 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부자들이 그들의 탐욕 때문에 채워졌다고 한다.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것과 정반대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의로움에 의해서만 채워진다. 당신이 의롭게 살기를 계속하는 한, 가난에 대한 공포는 없으며 굶주림 앞에서도 떨지 않는다. 탐욕적인 사람들은, 의로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들의 재화를 안전하게 갖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잃는 사람들이다."

1970년대 초기에 뉴요커(New Yorker)는 <충분함에 대한 탐구>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자신이 충분히 가졌다고 느끼는 사람을 실제로 찾기가 어려우며, 충분하다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마치도 황제들의 속성이 더 큰 제국을 탐내는 것과 같다. 로버트 콜스가 쓴 특권 받은 사람들도 같은 결론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은 풍요로운 집안의 아이들을 그리고 있는데, 많은 부잣집 아이들이 바쁜 부모들로부터 충분한 관심과 배려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주 부유한 고아처럼 느낀다는 이야기이다.

뉴욕시 동부 아래 구역의 가톨릭일꾼공동체에 있을 때 나는 자주 실제적으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경우 사람들은 방 하나도 가지지 못했으나 맨하탄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 같았고 지혜의 보물단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로 보여졌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찰리 오키프였다. 그는 분홍빛 얼굴에 반짝거리는 눈을 갖고 있었으며, 영악하지 않은 잭 레몬 같았다. 찰리는 술에 약했고 때때로 없어지곤 했다. 찰리의 혀끝에서 세익스피어 작품들이 뱅뱅 돌았다. 그는 뉴욕시립 도서관이 자신의 소유이며 강 동편의 방치된 부두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 요셉의 집에서 무료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죽을 퍼주면서 그는 어느 날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암송하고 다음날은 <햄릿>을, 그 다음날에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읊었다. 우리가 그의 큰 발에 맞는 신발 한 켤레를 찾았을 때, 그의 삶과 나의 삶에는 특별히 기쁜 순간이 되었다.

그는 몇 년전 사고 때문에 다쳐서 다리를 절룩거렸던 것 같다. 그는 신발이 너무 적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신발 한 쪽의 뒤가 갈라진 것을 보고서 우리가 공동체의 옷방에서 더 큰 신발을 찾아야겠다고 짐작했을 뿐이다. 맞는 크기의 신발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데리고 근처 신발 가게로 가서 새 신발을 사주었다. 찰리는 집에까지 탭 댄스를 하면서 돌아갔다.

 

사진=한상봉

그 때 성 요셉의 집은 크리스티가에 있었다. 3층 벽돌 빌딩의 이 집은 19세기에 싸게 지어진 집으로 삐걱삐걱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톨릭 일꾼공동체가 그 집을 얻었을 때 우리는 내부 벽을 모두 흰색으로 칠했다. 낙서를 감당하기에는 흰색이 완벽한 색깔이다. 3층에는 사무실이 있었는데, 교회 교부의 온갖 말씀들이 여기저기 적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자주 생각했던 글은 불란서의 시인 레온 블로이의 글이었다: “즐거움; 기쁨은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징표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창설자인 도로시 데이는 빈민가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추함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는 하느님께 대한 강박관념 때문이 아니라 가난의 자리에서 그가 발견한 아름다움 때문이었고 그 가난이 자주 그에게 주는 기쁨 때문이었다. 가난한 이들의 얼굴들이 지닌 아름다움, 주변의 아파트로부터 저녁식사 때에 풍겨오는 부엌 냄새의 아름다움, 심지어 가장 가난한 본당교회에서 거행되는 전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세계는 아름다움에 의해 구원될 것이다.”

절대적인 아름다움, 아름다움의 핵심에 있는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이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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