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단진복] 마더 마리아 스콥트소바 “전례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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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단진복] 마더 마리아 스콥트소바 “전례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8.14 15: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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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14-3] 옳은 것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되도다...

정교회 수녀 마더 마리아 스콥트소바는 불꽃이 되어버린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는 1891년에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제정 러시아 시절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었던 시절에 그는 시를 썼다. 그의 작품은 세인트 페테스부르그의 문단에 잘 알려졌다. 임박한 혁명 시기에 그는 사회 혁명당에 가입했으나, 1917년 10월 볼쉐비키들이 민주정부를 전복시켰을 때 흑해 연안에 있는 아나파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반 볼쉐비키파 군인과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았고, 좌익과 우익의 병폐에 직면해서 시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1923년 암살의 위협 때문에 혁명과 시민전쟁으로 살 자리가 뽑힌 피난민들에 합류하였고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에서 곧 그의 둘째 아이가 뇌막염으로 죽었고, 이 비극으로 그는 근본적인 회심을 겪게 된다. 그는 자신의 슬픔으로부터 “보다 진실하고 순화된 삶”을 추구하는 단호한 결심을 한다. 그는 “자신 앞에 새로운 길과 새로운 삶의 의미를” 보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어머니 같은 보호, 도움 혹은 관심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절망적인 러시아 피난민들을 도우기 위한 노력에 몰두하면서 그는 감옥, 병원, 정신요양원, 빈민가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내었다. 끊임없이 그는 이런 일의 종교적인 차원을, “모든 사람이 다 이 세계에 육화한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통찰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모든 형제자매 안에서 “하느님의 이 놀라운 계시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모상을 존중하기 위한” 필요성이 다가왔다.

주교는 결혼생활이 끝난 그에게 수녀가 되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새로운 유형의 수도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자유로와질 것이라는 확신만 가진 후, 세상에 참여하고 “마음을 세상과 그 상처로부터 분리시키는 그 어떤 미묘한 장벽도 완전히 없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세상 속에서, 마더 마리아

1932년 그는 수도서원을 하고 마더 마리아가 되었다. 그의 부엌은 “들락날락”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고 응접실은 여름에는 뒷마당이었는데, 파리의 이주지식인들이 주도가 되어 신앙과 당시 사회문제 사이의 연결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는 자리가 되었다. 그들의 토론으로부터 새로운 운동이 태어났다. 이것은 정교회 행동으로서, 복음의 사회적 의미를 실현시키기로 결단하는 행동이다. “전례의 의미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마더 마리아가 말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이고 우리에게 전례를 준 의미이다.”

마더 마리아의 삶에 있어 마지막 행동은 1940년 나치의 파리점령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치의 인종주의라는 상황 속에서, 각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그의 결단은 의도적인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보통의” 환대 이외에 그와 그의 지도신부인 디미트리 클레피닌, 그리고 그의 아들 유리는 나치가 색출하는 유대인들과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1942년 7월의 공포스러운 나날동안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스포츠 스타디움에 잡혀 있을 때 마더 마리아는 그곳에 몰래 들어가는 데 성공하였고 쓰레기 청소부들의 도움을 받아 유대인 아동들을 쓰레기통에 넣어 빼내었다. 같은 달, 유대인들이 노란 별을 달아야 한다는 포고가 발표되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두 개의 삼각형, 별,
우리 선조인 다윗 왕의 방패.
이것은 위반이 아니라 선택이다.
위대한 길이요 악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이루어졌다,
다시 한 번 마지막 나팔이 울린다;
그리고 위대한 백성의 운명이
다시 한 번 예언자에 의해 선포되고 있다.
오 이스라엘, 너는 다시 한 번 박해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악의가 너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시나이에서 천둥소리를 들었던 너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게스타포의 감시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더 마리아는 유대인들을 위한 일을 계속하였다. 포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 시기의 삶을 표현하는 일기는 하느님이 그에게 충실함을 주었다고 말한다: “당신이 사랑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다른 인간 존재의 발아래 당신 자신을 던지고자 하는 내적 갈망을 가지는 순간이 있다. 이 한 순간으로 충분하다. 생명을 잃는 대신, 두 배로 갚아진다는 것을 당신은 즉각 안다.”

 

당신은 이 유대인을 압니까? 

1943년 2월 8일, 그와 디미트리 신부는 체포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도와 경찰의 색출을 피하게 했다는 죄목을 인정했다 그것은 그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였을 뿐이었다.

디미트리 신부가 심문을 받기 위해 불려왔을 때, 호프만이라는 게스타포 요원은 처음에 회유적인 접근을 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대화가 증언하듯이 그런 접근은 먹히지 않았다:

호프만:
우리가 당신을 석방하면 다시는 유대인들을 돕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소?

디미트리 신부:
난 그렇게 말할 수 없소. 난 그리스도인이고 내가 해야하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호프만은 디미트리 신부의 얼굴을 쳤다.)

호프만:
유대인을 사랑하다니! 그런 쓰레기 같은 자들을 돕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소! (디미트리 신부는 균형을 다시 잡으면서 옷 위의 십자가를 잡았다)

디미트리 신부:
당신은 이 유대인을 압니까? (이 말을 하자 디미트리 신부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신부와 마더 마리아 그리고 그의 아들, 유리는 콩피에뉴로 옮겨졌고, 디미트리 신부는 매일 전례를 거행하고 유리의 서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콩피에뉴에서 파리의 친구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후에 집으로 보내진 가방에서 발견되었는데) 유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그저 평온합니다. 그리고 엄마의 운명을 나누게 되어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견딜 것이라고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곧 우리는 모두 함께 있을 겁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말로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동안 상처를 주었던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12월에 디미트리 신부와 유리는 부헨발트로 옮겨졌고 두 사람은 그해 겨울에 죽었다. 유리는 그때 스물 네 살이었다.

유대인 죄수를 대신하여 죽다

악명 높은 북 베를린의 라벤스부르크 여자 수용소로 보내진 마더 마리아는 거의 전쟁 끝 무렵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는 동안 동료 죄수들의 신체와 영혼을 보살폈다. 그는 가끔씩 빵을 바늘과 실과 바꾸었는데 그에게 힘을 주는 모습들을 수놓기 위해서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하느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인데, 예수의 손과 발은 이미 십자가의 상처를 갖고 있었다.

1945년 3월 31일 성금요일에, 멀리서 접근하는 러시아 군대의 포성을 들으면서 마더 마리아는 가스방으로 보내지는 한 유대인 죄수를 대신하여 죽었다.

“마지막 심판 때에 나는 내가 고행을 하는 데 성공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되지 않으며, 얼마나 많은 절과 부복을 했는가에 대해 질문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일찌기 설명했었다. “대신 나는 이렇게 질문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배고픈 사람을 먹였는가, 벌거벗은 사람을 입혔고 병든 이들과 죄수들을 방문했는가? 이것이 내가 받을 모든 질문입니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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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as 2017-08-14 16:15:13
라벤스부르크는 독일 남부에 위치한 도시명입니다. 베를린 주변에 있던 수용소는 라벤스브뤽 수용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