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신학 "나는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믿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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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신학 "나는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믿고 싶은가?"
  • 참사람되어
  • 승인 2017.07.19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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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도 시흥시에 살고 있어요. 월 60만원이 제가 버는 생활비이고 조그마한 방 한 칸에 다락이 있는 전세 700만원 집에 살고 있어요. 제 식구는 아내와 세 살이 된 딸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 삽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지요. 제가 이런 말을 왜 했느냐 하면요 나름대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지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낼 때 말하신 기준들이 나옵니다. “전대에 돈도, 지팡이도, 신발도, 옷도 한 벌만 가지고 다녀라.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가라.” 그런데 이 내용이 단지 책에 쓰인 것으로만 보면 그냥 저냥 이해가 갑니다. 그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사람들의 처지도 제가 처음 말했던 제 현실보다 더 나은 형편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 현실이란 이렇습니다. 직업이 확실한 것도 아니고 사회변화를 위한 어떤 확고한 단체나 제도에 속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권력이나 힘을 가진 기득권 집단은 더 더욱 아닌 현실 말입니다.

한 마디로 별 볼일 없는 작은 사람들이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요. 지금이야 ‘가톨릭교회’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당당한 종교이지만 예수님 당시나 사도 시대엔 한 마디로 별 볼일 없는 작은 사람들이었지요. 지금 보면, 그 때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현재 국회의원이나 언론인들에겐 아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과 같지 않았을까요. 하물며 저는 제도 안에서도 뛰쳐나온 그야말로 현실적인 조건에선 아주 바닥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회에서 생존능력도 별로 없는 뒤처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인정이나 지지는 아주 사라져 버린 지금입니다.

이런 아무 것도 없는 처지(있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 뿐이지요)에서 나는 뭘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 세상 변화를 위해서 살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세상의 기준에서도 이른바 종교적인 기준에서도 별 볼 일 없고, 그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저의 아픔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을 ‘길 위의 사람들’이라고 했답니다. 멈추지 않고 뭔가를 향해서 가는 사람들, 과연 나도 이 길 위의 사람들에 속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조차도 헛갈리는 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그런 무력함과 가난함에 의심과 괴로움을 느끼고 계시지 않을 지 모르겠네요. 이런 고민조차도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자기 자신을 계속 연결시키라는 신앙의 초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경험 한 가지 소개할게요. 제가 사는 곳엔 소래산이 있는데, 그 곳엔 고려 때 만든 암벽 불상 조각이 있어요. 거기에서 묵상을 할 때였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을 올라가, 그곳에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예수님이나 초대교회 사람들, 그리고 붓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먹고사는 문제, 생존)에 매몰되지 않고 뭔가 큰 현실에 따라 살았는데, 그 사람들이나 나나 다 같은 사람들인데 나는 왜 그렇게 못하지?

뭐가 문제인지 생각하다가 제가 깨달은 것은 사고나 삶의 방식이 바뀌는 것이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내 현실(자본주의의 기준)에 신경을 끄고 다른 현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어요. 한 때는 이것이 도피가 아닌가 의심했는데 내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래서 남은 질문은 ‘하느님 나라가 정말 나에게 가장 중요한 비전이고, 그 비전이 내게 힘을 주고 있는가?’에서 ‘나는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믿고 싶은가?’로 바뀌었지요.

며칠 전 서울 하늘에 미세먼지가 날리고, 오존주의보가 내리고, 공기의 흐름이 ‘제로’인 상태가 되었다는 보도를 보았어요. 아무리 사태가 심각해도 먹고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계속 자동차를 만들고 사용해야겠지요. 아무리 사람들이 나 죽는다고 외쳐대도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놓으려 하지 않겠죠.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살아남을 텐데도 가진 것을 놓치기 싫어서 그냥 살겠죠. 사실 제 처지에서 하느님 나라가 비전이라 해도 현실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또 할 수도 없을 것 같고요. 사실 절망적입니다. 자칫하면 내가 폐인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러면 무슨 힘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될까요? 그 거였어요. ‘기억’하는 것 말이에요. 뭘 기억하느냐? 하느님께서 저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느끼게 했던 체험을 기억하는 것이었어요. 이 기억하는 일이 기도 중에 생기더라고요. 고목나무에서 새 순이 돋아나듯이 열정이 꺼져버린 마음에도 성령의 생기가 불꽃처럼 피어나는 것 같았어요. 그야말로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평범한 처지에서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새 마음과 새 생각을 일깨워 주더군요.

노력이 필요했어요. 하느님과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투쟁이 요구되었어요. 그 투쟁은 가장 비참한 순간에, 끝이다 하는 때에 시작되더군요. 결국 그 힘은 이미 있는 것이고, 그것을 캐내는 것은 세상에서 그 어떤 일보다도 소중하겠죠.

결국 신학하기(doing theology)란 우리가 겪는 매일의 일상에서 하느님을 떠올리며, 그분과 만나는 거지요. 모든 것을 하느님 나라의 시각으로 보는 통합적인 사고가 신학함의 뜻인 것 같아요.

그 다음엔 무엇해야 하지요? 제 경험으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 외적인 조건 말고 그 사람 자체에게 다가가는 것이었어요. 사람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었어요.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 가는 것이 더 큰 힘을 주더라고요. 가서 그분들에게 인생을 배워요. 하느님을 읽어요. 정작 그 가난한 사람이 저를 필요로 하진 않더라고요.

확실히 글은 삶의 고백인가 봐요. 더 길게 더 풍요하게 쓰고 싶지만 그것은 마음뿐일 뿐 삶이 있어야 글이 나오나 봅니다. 더 잘 살고 싶어요. 그분이 기특하게 여길 만큼.


[출처] <참사람되어> 199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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