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는 이들은 복되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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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이들은 복되다, 정말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7.04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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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10] "슬퍼하는자는 복되도다"

마음의 사막 속에서 치유의 샘물이 시작되도록 하라.

"죽었을 때 우리는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고 비난받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신학자나 관상가가 되지 못했다고 비난받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슬퍼하지 못했던 이유를 하느님께 분명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성 요한 클리마쿠스)

우리는 또한 “비탄에 빠진 이들은 복되도다”, 혹은 “우는 이들은 복되도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어 신약성서에 쓰여진 단어들은 penthein인데 깊고 짙고 가슴을 에이는 슬픔, 비탄을 의미한다.

슬픔, 하느님 은총의 폭포 앞에서

영의 가난은 슬퍼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영의 가난이 없다면 나는 항상 내 자신을 위하여 갖고 있는 것을 지키려고 경계하며,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영의 가난이 드러내는 즉각적인 결과는 내 주변 사람들의 고통과 상실에 민감해지는 것이고, 내가 알고 있고 보살피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고 알려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예민해지는 것이다.

내 마음을 이웃들에게 여는 만큼 나는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을 하게 될 것이다.­ 기도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나 자신까지도 나누게 된다.

가장 공통적인 비탄은 죽음과 관련되어 일어난다. 엄청난 손실에서 오는 고뇌, 우리가 아직도 사랑하는 그 사람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 너무나 그립고, 그러나 이 세계에서 결코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모두 슬픔을 느낀다.

아마도 가장 최악의 비탄은 상실 때문에 너무나 혼이 빠져서 울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비탄일 것이다. 그들의 눈은 사막의 모래처럼 느껴진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 위하여 기도한다. 한발 지역에서 사람들이 비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마침내 눈물이 나올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의 폭포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느님의 모상과 닮게 만들어진 존재의 한 부분이 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슬픈 예수

복음서의 두 곳에서 우리는 예수가 우는 모습을 본다. 첫 번째는 멀리서 예루살렘을 서서 바라 볼 때에 일어났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루가 19,41).

제자들에게 그것은 당황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성전이 지배하는 빛나는 금빛의 벽들로 둘러싸인 도시, 사람들이 요새같이 탄탄한 문들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았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멸망, 도시거주민들의 고통, 그리고 생존자들의 속박과 추방을 보았다.

그는 미래에 다가올 수십 년의 재앙 때문에 생겨날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러나 그 재앙은 그에게 너무나 실제로, 너무나 즉각적이고 황폐한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마치 그 당장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처럼 여겨져서 비탄했다. 그는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루가 19,42).

친구의 죽음에 슬픔으로 응답하고

요한 복음 11장은 예수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던 베타니아의 친구,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 울었다고 기록한다. 라자로를 다시 생명으로 불러오기 전에 예수는 라자로의 누이들과 친구들의 슬픔을 온전히 나누었다. 요한 복음 11장 25절은 간단하게 “예수가 울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먼저 참다운 인간으로, 즉 죽음에 슬픔으로 응답하고 그런 다음 시체를 다시 살리는 참 하느님으로 알게 되는 사건들 중의 한 사건이다.

이 두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보다 지적이고 보다 기민하고 보다 냉정한 응답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어떤 화학물질들이 섞이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알고 있는 과학자처럼. 예루살렘을 응시하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학문적인 거리를 두고 제국로마에 대한 폭력적 저항의 무익함과 무기로 해방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재해를 제자들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 죽은 친구 라자로에게 다시 생명을 주기 전에 그는 라자로의 누이들, 마리아와 마르타의 신앙이 부족했다고 질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예수는 또한 절대적인 연민의 사람이다. 사랑은 나쁜 선택이 비극적 결과를 가져오고, 죽어야 하는 인간이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다는 사실로부터 분리되거나 매정하게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울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먼 과거로부터 나오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와 여전히 함께 있으므로 예수는 지금도 울고 있다. 그분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였고, 그분과 함께 슬퍼하는 그분의 능력도 부활했다. 우리는 그분의 눈물 속에서 눈물의 성사, 슬픔이 축복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의 눈물 속에서 그분의 눈물을 발견한다.

슬픔의 성모...글린다와 더불어

나는 우리들의 친구, 톰과 글린다 죤슨­매드랜드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은 7년동안 아이를 가지기 위하여 기도했고 마침내 임신이 되었으나 아이를 낳기 바로 전에 유산하였다. “난 하느님께 너무나 분노를 느꼈어요”, 하고 톰이 회상한다, “그리고 전적으로 배신당했다는 느낌이었어요. 하느님이 당신의 친구들을 이런 방식으로 다루시는지...”

다행스럽게도 분노와 슬픔 한가운데에서 톰이 의논했던 사제가 좋은 충고를 했다. “난 당신이 하느님께 얼마나 화가 나는지에 관해서는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고 사제가 말했다, “그냥 매주일 교회에 가서 하느님의 어머니께 꽃을 가져가세요. 마리아의 이콘 앞에 서서 무릎을 꿇거나 땅바닥에 구르던가 마음대로 하세요. 난 상관없어요. 소리지르고, 악쓰고 울고 저주하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교회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있으세요. 그분은 우리 주님의 어머니이고, 그분은 아십니다. 그분은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인가 이해하십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해줄래요? 그리고 글린다가 할 수 있는 한 자주 데리고 가세요.”

사제의 충고에는 가짜 신심이 없었고, 하느님의 불가사의한 뜻에 대해 그럴싸하게 입심 좋게 떠들어대지도 않았다. 혹은 그들의 아이가 천국에 있어 그들이 행복해야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사제는 톰과 글린다를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헤로데 때문에 피난민이 되었고, 그의 아들이 단죄되는 것을 보았고, 못이 그의 늑골을 뚫는 것을 보았으며, 십자가 밑에 서 있었고 무덤에 매장되는 것을 보았던 분이다.

톰은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콘 앞에 꽃을 놓고 슬픔에 잠겨 있었다. “눈물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어요. 내가 알지 못했던 슬픔 속으로, 결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 속박에서 풀린 어떤 감정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글린다는 치유사였는데, 수개월동안 그는 자주 거의 정신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톰과 글린다의 슬픔은 길고 고통스러웠으나, 매주 하느님의 어머니께 드리는 꽃선물이 어떻든 그들을 도와주었다. “그분은 우리의 다정함과 우리의 건강이 되셨어요. 부드러운 꽃들이 있는 초원 같았고, 슬픔의 길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플 때 우리의 간호원이시고 기대고 싶을 때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어요,”하고 톰이 말했다.

2년이 지난 후 되돌아보면서 글린다는 그의 경험이 “슬픔, 비탄은 사람들에게 어떤 초월을 만들어준다. 슬픔은 우리가 고통 속에 있고 어떤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해준다. 슬픔은 다른 사람들이 알도록 우리를 열고 들어올려 준다. 슬퍼하고 비탄을 느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돈이 없어 슬퍼한다면, 그건 우리의 가치관과 상반된다. 우리가 아이들의 가난을 슬퍼한다면, 그건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임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치유사로서 글린다는 또다른 교훈을 지적한다: “애도와 ­슬픔의 공적인 표현은는 우리의 슬픔을 통합하도록 도와준다. 상실에 대하여 적절하게 애도하지 못하는 것은 절망, 정신병, 그리고 신체적 질병에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어떤 특정한 관계의 상실, 우리 자신의 한 때 모습의 상실이라는 실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통합시키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실제 속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만이 슬픔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었던 참회하는 여인은 그의 행동이 하느님 모상을 지니고 있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손상을 슬퍼했던 것이다(루가 7,38).

사진출처=pixabay.com

베드로의 눈물...홍수처럼 쏟아진

그리스도를 세 번째 배반하고 나서 수탉이 울었을 때 사도 베드로가 흘렸던 눈물이 있다. 수시간 전에 베드로는 스승을 보호하려는 열정 때문에 한 사람을 거의 죽일 뻔하였다. 그 후로 그는 그 남자가 자신을 알아볼까 봐 너무나 두려워했다. 아마도 베드로의 부인 속에는 이런 비극을 허락한 하느님께 대한 분노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고통 때문에, 겁쟁이와 거짓말쟁이가 되었던 자신 때문에 눈물이 홍수처럼 터졌다.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리들은 부끄러움과 후회를 일으키는 수많은 기억들을 가지게 된다. 거짓말을 하고 비겁하게 행동하며, 도움을 주지 않고 용서가 거부되고, 함부로 열정을 휘두르고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등등. 우리의 삶에는 다만 비탄해하고 속죄하며 용서를 청하는 것밖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에집트의 마리아 성녀, 참회하는 슬픔의 거룩함

과거의 죄악에 대해 슬퍼하는 삶의 상징으로 에집트의 마리아 성녀가 있는데, 그는 5세기의 여인이었다. 어떤 정교회 경당에 가도 당신은 마리아 성녀의 이콘을 발견할 것이다 ­ 여위고, 하얀 머리칼의 여인이 옷을 조금밖에 안 걸치고 사막처럼 황량한 모습으로 서있는 이콘이다. 매년 사순절기에, 모든 정교회 본당에서는 마리아 성녀 이야기가 공적으로 읽히고 있다.

예루살렘의 서동쪽 사막에 살았던 수도승인 죠시마 신부가 어느 날 덤불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낯선 이를 쫓아가면서 죠시마 신부는 아무 옷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눈을 딴 곳으로 돌리라고 요청하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죠시마 신부는 그에게 외투를 주었는데, 그런 후 여인은 떨어져서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쾌락적인 성관계와 유희에 빠져 지냈다고 말했다. 일시적인 기분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그룹에 합류하였고, 가는 길에 어떤 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하기도 했다. 그런 후 예루살렘에서 여인은 기적을 체험하였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이콘을 한 교회에서 바라보며, 그 어머니의 자기를 주는 사랑과 순수함을 지니고 있는 단순한 모습을 보고 회한으로 가득 찼다.

그런 후 그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십자가 유물을 존경하는 예식을 하면서 그는 자신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네가 요르단을 건너면 평화를 찾게 될 것이다.” 이 몇 마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여인은 47년 동안 고독의 생활을 살았고, 매일 밤낮으로 기도하며 악마와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풀을 먹고 샘물을 먹으며 연명하였다. 죠시마 신부는 두 번째로 여인을 방문하고 성체를 주었다. 세 번째 방문 때에, 그는 여인의 죽은 시체를 보게 되었다. 여인은 그리스도의 수난날 밤에 죽었다고 모래 위에 메시지를 남겼다.

에집트의 마리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잘못된 모든 것들”을 모두 보여주는 성인들 중의 한 성인이다. 현대적 거룩함의 정의에 따라 조명해보면 에집트의 마리아는 황당하고 정신이상 같다. 소위 지었다고 하는 죄에 대한 그의 “불필요하고 교회가 주입한 죄책감”은 그로 하여금 동굴에서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굶으며 자학적으로 살아가도록 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했는가? 젊었을 때 방탕하게 살았던 몇 년 때문에?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에집트의 마리아 같은 성인들은 광기보다 어떤 투명함과 명료함의 모형으로 보편적인 인정을 받아왔다. 그들은 참회하는 슬픔의 거룩함을 표현하고 있다. 과거 죄악에 대해 흘리는 눈물은 그들 안에 하느님의 이미지를 회복시켰다. 그들은 큰 영역에서 죄를 지었고 그래서 그와 비슷한 크기로 참회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희생이 하느님의 자비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그들 자신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한가지 길로서 금욕생활을 생각하였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참회

육화적인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는 늘 육체와 영혼을 함께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하고자 추구해왔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지 생각으로만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신체적인 행위로서 참회하는 방식들을 찾는다. 참회는 단지 정신으로만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으로 하는데 각각은 서로를 강화시켜 준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유일한 희망이 참회, 속죄인 현대적 인간모형이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고 살해에 대해 철학적인 합리화 방식을 구축하였다. 즉 어떤 사람들­, 이를테면 똑똑하고 영악한 타고난 지도자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과 같은 도덕적이고 저속한 원칙을 지킬 필요가 없다. 자기 같은 사람들에게는 사악한 수단을 통해 좋은 것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계획한 후, 그는 늙은 사채업자를 죽인다. 그리고 또한 그 자리에 있게 된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닌 뜻밖의 증인인 소녀까지 죽인다. 그런 후 얼마 동안은 아무런 수치도 느끼지 못한다. 절대적으로 순수한 마음을 갖고있는 소녀를 살해한 것에 대해서도 아무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점점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한 공포가 그에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에게는 발각되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그의 죄를 증명할 증거가 없었고, 범행의 목격자도, 도끼의 흔적도 없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진리를 말하고 싶어졌고 그리고 새로운 신선한 출발을 위해 감옥과 시베리아 추방을 받아들인다.

수서관인 포르휘리 페트로비치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보도록 돕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페트로비치는 그의 죄가 컸지만, 더 엄청날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도록 돕는다. 그래도 라스콜리니코프의 소위 합법적인 살인의 원리는 두 사람만 죽였다: “만일 당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그런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수백만 배의 더 끔찍스러운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고통은 결국 좋은 것이다... 당신이 다른 범주의 사람(사회적으로 범죄자들의 부류)이 된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릴 수 있는 안락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당신을 오랫동안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뭐 그렇게 대단한가?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당신에게 있는 것이다. 태양이 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당신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확인시킨다.

마침내 비탄이 찾아오는데, 그것은 자기가 죽인 사람의 가족들 때문이거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파리 한 마리 못 죽이는 사람도 단지 인류에 속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살인에 얽혀있는 것이다.

죄의 연대성, 은총의 연대성

도스토옙스키의 금자탑인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는 그리스도 같은 죠시마 신부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 그를 잠깐이나마 보기 위하여 찾아온다. 충고 한마디, 그들을 괴롭히는 질문에 대한 대답, 용서를 확인받기 위하여 그를 방문한다. 죽음에 임박해서 죠시마 신부는 사랑하는 제자, 알료사 카라마죠프에게 그가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어릴 때에 아파서 누운 적이 있는데, 그때 하느님이 어떤 위대한 진리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먼저 알렸다: “우리 각자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먼저 모든 것에 대해 잘못이 있어요. 그리고 누구보다 내가 죄를 지었어요.” 물론 어머니는 거기에 반대하고, 그의 독실한 아들이 살인자도 도둑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년은 그가 받은 진리를 설명하거나 설득시킬 수가 없었지만 더 강한 확신을 갖고 “우리 각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먼저 죄를 지었어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대하여”라고 어머니에게 주장한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너무나 많은 사람과 많은 일에 의존하고 있고 관련을 맺는 방식들을 생각해보는 것은 유용한 영적 연습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술과 노동이 관련되는데, 재료들을 키우고 포장하고 운반하고 음식을 만들고 시중을 드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세기 동안 농업의 역사와 음식 만드는 기술을 발견하고 전통으로 전수해온 사람들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빵굽는 사람은 그들의 손으로만 빵을 구운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들의 손으로도 구운 것이다. 이 책에 쓰여진 단어들도 내가 일생동안 모아온 것들이다. 의사소통의 도구는 모두 알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온 선물들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 농부들, 의사들, 간호사들, 기술자들, 하수도기술자들, 건축가들, 요리사들... 이 명단은 전화번호부 책만큼이나 끝이 없다. 실상 전화책보다 훨씬 더 크다. 왜냐하면 전화 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명단이지만, 우리는 축적된 지식, 지혜,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있었던 모든 세대의 노동으로부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체적인 안녕만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세상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많은 부분이 가족, 친지, 교사, 사목자, 영화 만드는 사람들, 정치가들, 언론인들 등으로부터 동화, 융화되어 형성되어 온 것이다. 응답의 방식들, 삶의 방향선택, 이런 것들 역시 많은 요인들에 의해 형성된다. 전쟁에서 싸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싸우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적 의무, 두려움, 선전, 동료집단의 압력 때문에 그렇다. 일, 돈, 정치를 통하여 유아기 이상의 사람들 중에서 전쟁의 정교한 하부구조에 관련이 안 된 사람들이 있겠는가?

우리들의 죄에 관하여, 슬픔에 관하여 

완전히 자율적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토스산 절벽에 있는 동굴에 살고 있는 은수자도 그가 그의 삶을 의존하고 있는 공동체의 일부이며, 이 공동체에서 그는 홀로 하는 기도의 소명을 형성시켰고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은수자는 혼자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소명은 사회적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주 눈물 속에 기도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가 흘린 눈물은 그분이 했거나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에 대한 비탄의 눈물이었다. 그분의 기도는 과거에도 지금도 이렇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눈물의 선물을 허락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과거의 우리 죄에 대해, 다른 이들의 죄에 대해, 서로에게 폭력을 쓰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매일 주는 세상에 폭력을 행한 것에 대해 눈물을 허락한다. 이러한 영혼의 상태에서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나는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입니다”(1디모테오 1,15).


[출처] 짐 포레스트(Jim Forest)가 쓴 <진복의 사다리>(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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