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 프란치스코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지만 항상 사랑받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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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종 프란치스코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지만 항상 사랑받지는 못합니다”
  • 교종 프란치스코
  • 승인 2017.07.0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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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종, 6월28일 수요 일반알현 교리교육

[프란치스코 교종은 6월28일 수요 일반알현에서 순교자의 모범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대한 교리교육을 계속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 16-17.21-22)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순교자들의 힘인 그리스도인 희망에 대해서 묵상합시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교로 떠나보낼 때 쉬운 성공의 비전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항상 반대에 부딪칠 것이라고 확실하게 경고합니다. 또한 극단적인 표현까지도 사용합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지만 항상 사랑받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하십니다. 다소 강약의 정도는 있지만 신앙고백은 적대적인 분위기 안에서 행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태에 반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여러 형태의 불의와 이기심으로 표현되는 죄로 물들어 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는 그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정치적 의도가 아닌 희망의 논리이며 예수님 가르침의 토대 위에 선 삶의 스타일로 변화되는 하느님 나라의 논리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첫 번째 지표는 가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파견할 때, 그들이 옷을 입는 것보다는 옷을 벗는 것에 더 주의를 줍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겸손하거나 가난하지 않고, 재산과 권력에서 특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닮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위해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지만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걸어갑니다. 

그들의 진정한 패배는 악에 악으로 대응하면서, 복수와 폭력의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곧, 날카로운 이빨도 없이, 발톱도 없이 어떠한 무기도 없이 파견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조심스러워야 하고, 때로는 세밀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적 논리로 받아들인 덕입니다. 폭력은 절대로 안 됩니다. 악을 이기기 위해서 악의 방법을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힘은 복음입니다. 어려움의 순간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계시며, 당신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박해는 복음과 모순되지 않으며 복음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 스승님께서 박해 받았다면 우리에게서 투쟁이 없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폭풍우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버려졌다고 생각하거나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안심시키며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었다”(마태 10,30) 인간의 아주 작고 사소한 고통들이 하느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보시고 확실히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대속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악보다 더 강하고, 마피아보다 더 강한, 어두운 음모보다 더 강한, 그리고 절망적인 사람들의 뒤에서 돈을 벌면서 오만으로 다른 이들을 짓밟는 사람보다 더 강한 누군가가 계십니다. 

땅에서 울려퍼지는 아벨의 피의 울부짖음을 항상 듣는 누군가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세상의 다른 쪽 편에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박해자가 아니라 박해 받는 사람이며, 거만하지 않고 온유합니다. 거짓을 파는 사람이 아니며, 진리에 순종합니다. 사기꾼이 아니며 정직한 사람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예수님의 스타일, 곧, 희망의 스타일에 맞는 이 충실함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졌습니다. 바로 ‘순교’입니다. 그 뜻은 ‘증거’입니다. 그 뜻에 대해 사전이 제공하는 다른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웅적 행위, 헌신, 자기희생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제자의 향기가 나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싸우지 않으며, 오직 복음에 대한 충실 때문에 죽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순교는 그리스도인 삶의 최고의 이상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순교 위에는 사랑이, 곧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해되는 사랑의 송가를 통해서 바오로 사도가 잘 말해줍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목표 안에는 하느님의 자녀들의 태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때때로 초대교회보다 더 많은 순교자들이 나온 어제와 오늘날의 많은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다 보면, 역경에 직면했던 그들의 굳셈 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 굳셈은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준 커다란 희망의 표징입니다. 확실한 희망은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로마 8,38-39 참조)에서 그들을 떼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당신 증인이 될 수 있는 힘을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희망을 살 수 있게 하시고 특히 드러나지 않은 순교 안에서 사랑으로 매일 매일의 우리의 의무를 잘 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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