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 이름을 불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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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 이름을 불러 주셨다"
  • 교종 프란치스코
  • 승인 2017.05.2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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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수요 일반알현 교리교육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17일 성 베드로 대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에서 희망에 대한 교리교육을 계속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고 전하였다.“ (요한 20,15-18a)

사진출처=fbcdn-sphotos-f-a.akamaihd.net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들의 이번 주 묵상은 파스카 신비의 궤도 안에서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본 여인을 만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안식일의 휴식이 끝난 직후입니다. 수난 당일에는 장례예식을 치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슬픔이 가득한 이른 아침에 여인들은 향유를 들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제일 먼저 무덤에 도착한 사람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으며 태동하는 교회에 봉사를 했던 여러 여 제자들 중 하나인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무덤을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죽은 사람을 기억하면서 오랜 동안 묘지로 향하는 길을 헌신적으로 오가는 많은 여인들의 충실함을 암시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떠나갔어도 계속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더욱 더 진정한 관계들은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복음(요한 20,1-2; 11-18 참조)은 막달레나가 가벼운 열정을 지닌 여인이 아니라고 강조해서 표현합니다. 

사실 그녀는 무덤을 처음으로 보러 다녀온 후 실망한 채로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생각해낼 수 있었던 첫 번째 가정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리아 막달레나가 가져왔던 첫 번째 선포는 부활이 아니라 예루살렘 전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절도였습니다.

그런 다음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가는 막달레나의 두 번째 발걸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무덤에 갔다 왔다가 다시 갔습니다. 왜냐하면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발걸음은 느리고 무거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중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시신이 설명할 수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며 울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그녀를 놀라게 합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그녀의 눈멂이 계속 지속되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녀에게 질문하는 두 천사의 존재를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를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습니다. 반면 “마리아야!”(16절)라고 이름이 불리웠을 때 그녀는 드디어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을 알게 됩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부활하신 분의 첫 번째 발현이 이처럼 개인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를 알고, 우리의 고통과 실망을 보고 있으며, 우리에게 감동하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는 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서의 여러 부분에 새겨져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는 율법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하느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보다 앞서 우리의 삶을 걱정하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길 원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각자의 얼굴을 인지하시면서 각자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쓰시는 하나의 사랑의 역사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 사랑의 역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그 고유의 이름으로 불러 주시고,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시며,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를 용서하시며, 우리에 대해서 인내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 각자 이러한 체험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마리아야!”하고 부르십니다. 그녀의 삶의 변혁과 모든 인간 존재의 변화로 운명 지어진 변혁은 빈 무덤의 정원에 메아리치는 하나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복음서들은 마리아의 행복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한 방울씩 떨어지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마치 폭포수처럼 삶 전체를 감싸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유연한 행복으로 짜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파도로 짜여 있습니다. 

지금 잠깐 우리 각자 마음속에 실망과 좌절을 지니고,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왔으니, 일어서라, 울음을 그쳐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실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안에 지속되는 죽음과 슬픔과 인간 윤리의 파괴를 용납하면서 세상에 순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무기력한 분이 아니라,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꿈꾸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변화를 꿈꾸시고, 그 변화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실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주님을 붙들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천상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라며 그 소식을 전하라고 그녀를 형제들에게 보냅니다. 이처럼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악의 세력 아래에 있었지만(루카 8,2 참조) 지금은 새롭고 더 위대한 희망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그녀의 간구는 우리 역시, 눈물의 시간에, 버려진 시간에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18절)를 선포하러 가는 이 체험을 살 수 있게 우리를 도와줍니다. 

주님을 뵈었기 때문에 저는 삶을 바꾸었습니다. 저는 처음과 다르며, 다른 사람입니다. 주님을 뵈었기 때문에 저는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며,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감사합니다.

 

교종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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