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마에서, 교종 프란치스코 "성모님은 편리하게 청원기도 할 수 있는 석고 조각상이십니까?"
상태바
파티마에서, 교종 프란치스코 "성모님은 편리하게 청원기도 할 수 있는 석고 조각상이십니까?"
  • 가톨릭일꾼
  • 승인 2017.05.16 16: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파티마 성모발현 100주년 "파티마 도착 교종 발현장소 소성당에서 묵주기도 봉헌"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12일 저녁 포르투칼 파티마에 도착해 다음날 거행될 파티마의 성모발현 100주년 기념행사와 성모발현 목격자들인 두 어린 목동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의 시성식을 위해 성지를 방문하고 성모발현 장소에 세워진 소성당에서 묵주기도를 봉헌했다. 묵주기도는 교종이 직접 주관했다. 성지에 운집한 수십만 신자들은 희망과 평화의 순례자로 온 프란치스코 교종의 도착에 환호했다. 

교종은 성모발현 소성당 안에 위치한 성모상 앞에서 “성모찬송”에서 영감 받은 기도를 바쳤다. 교종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같은 식탁에서 모두의 발을 씻어 주기 위해 저는 예언자로, 그리고 사절로 왔다”며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우리가 복자 프란치스코와 복녀 히야친타, 그리고 복음 선포에 투신한 이들의 모범을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드러내 보이며, 모든 소외된 곳으로 다가가고, 모든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고, 모든 길을 따라 순례자로 떠나고, 모든 벽을 허물고, 모든 국경을 넘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어 초 축복을 위해 순례자들이 불빛으로 밝힌 광장으로 갔다. 교종은 소성당에서 자비를 주제로 마리아에 대한 묵상을 나눴다. 교종은 성모 마리아가 값싼 은총을 얻기 위해 매달리는 작은 성인이 아니라 영성생활의 스승이라고 설명했다.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부드러움으로 주님의 자비로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용서라고 말했다. 교종은 마리아와 함께 자비의 표징과 성사가 될 수 있도록 또한 마리아와 함께, 우리 각자는 언제나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느님 자비의 표징과 성사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묵주기도를 바친 프란치스코 교종은 광장을 떠났고, 바티칸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이 다음날 거행될 시성식을 준비하는 철야기도를 진행했다. 파롤린 추기경은 강론에서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도 안에서 인내하자”고 강조했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종은 묵주기도로 시작된 철야기도에 앞서 잠시 묵상말씀을 이끌었다. 다음은 이날 교종의 묵상말씀 전문.]

사진출처=voakorea.com


 
성모님께서 함께하시는 성모발현 성지순례자 여러분, 평화와 희망의 성지순례에 동참하고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이곳과 다른 곳에서 저와 함께하시는 분들은 제 마음속에 특별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라고 제게 맡기셨다고 생각합니다.(요한21,15-17 참조) 또한 성모님께서 저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가르침에 따라(1917년 7월 발현) 저는 여러분 모두를 ‘특히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 위탁합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어려운 자를 보살피시는 성모님께서 주님께 축복을 청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현재를 잃어버린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이들과 미래를 거부당한 배제되고 버림받은 이들, 그리고 과거를 거부한 고아와 불의의 피해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얼굴을 비춰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를 베풀어 주십니다”(민수 6:24-26) 

성모님은 주님께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성모님과 같이 주님의 빛을 받은 피조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로 인해 성모님은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드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삶 속에서 환희, 빛, 고통, 그리고 영광의 순간들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성모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성모님과 예수님을 결합하는 본질적이고 필수적이며 근본적인 관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 관계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길을 우리 앞에 열어줍니다. 이 거룩한 곳에서나 다른 모든 곳에서 묵주기도를 바칠 때마다 개인과 가정, 그리고 세상과 모든 사람의 인생에 복음이 새롭게 들어갑니다.
 
성모님과 함께하는 순례자, 하지만 성모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영적 삶의 스승이시자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 이르는 “좁은 길”을 처음으로 따라가시어 우리에게 모범이 되신 분이십니까? 아니면 범접할 수 없고 따라할 수 없는 분이십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시고, 그 믿음으로 인해 복되신 분이십니까?(루카 1:42.45 참조) 아니면 단순히 우리가 편리하게 청원기도를 드릴 수 있는 석고 조각상이십니까? 교회에서 기도 중에 공경 받는 복음의 성모님이십니까? 아니면 분노하신 주님의 화를 누그러뜨려 달라고 우리의 손으로 만든 분이십니까? 그것도 아니면 무자비한 심판자 예수님보다 다정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임 당하신 어린양보다 더 자비로운 분이십니까? 

복음에 분명히 쓰여 있는 것처럼 주님의 자비로 용서받았다는 말 대신 주님의 심판으로 죄의 형벌을 받는다고 말을 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큰 불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자비는 심판보다 앞서야 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심판은 자비에 비추어 내려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자신을 바치셨듯이 분명 주님의 자비는 정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부정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고 비로소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을 완전히 쫓아냅니다.(1요한 4:18 참조) 성모님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사랑과 부드러움의 혁명적인 본질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성모님으로부터 겸손과 부드러움이 약한 자의 덕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위해 다른 사람을 홀대하지 않는 강자의 덕목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와 부드러움의 상호작용과 타인에 대한 기도와 걱정의 상호작용은 교회공동체가 성모님을 복음 선포의 모범으로 삼는 이유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우리는 모든 순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 자비의 표징과 성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깊은 관심 아래 성모님과 손을 맞잡고 주님의 자비를 기쁨으로 노래하며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되기를 청합니다. 모든 성인과 신실한 신자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자비를 저에게도 보여주셨습니다. 저의 교만으로 영광의 왕관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야망과 이익을 따라가다 길을 잃었습니다. 주님, 제가 청하는 영광의 한 가지 희망은 성모님께서 저를 품 안에 안으시고, 망토 아래에서 저를 보호하시고, 저를 당신 마음 가까이에 두시는 것입니다. 아멘.
 
 
 “슬픔과 고통 모든 권태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프란치스코 교종, 파티마에서 병자들 위한 특별강복
 
[프란치스코 교종이 13일 파티마의 파견미사에서 성체강복 후 파티마의 성모발현 기념 성소에 모여든 병자들에게 특별강복을 내렸다. 강복 후 교종은 병자들에게 인사하면서 “우리가 십자가를 경험할 때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계셨다”며 주님께서는 당신 수난을 통해 우리 모두의 고통을 짊어지셨으며 예수님께서는 슬픔과 고통의 의미를 알고 계신다고 강조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해하시며,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성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성녀 히야친타 마르토 남매를 비롯해 모든 시대와 장소의 성인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종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자고 말했다. “어린 목동들처럼 여러분의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여러분 스스로를 봉헌하고 싶다고 우리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이날 교종의 인사말씀 전문.]
 
제가 강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경험할 때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수난을 통해 우리 모두의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픔과 고통의 의미를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해하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성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성녀 히야친타 마르토 남매를 비롯해 모든 시대와 장소의 성인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예루살렘 감옥에 수감된 베드로 사도를 위해 온 교회가 기도했던 점을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목입니다. 교회는 주님께 여러분과 같이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도록 청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 마음 깊은 곳을 위로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용기의 선물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십니다.

친애하는 순례자 여러분, 우리보다 먼저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숨어 계시지만 성체성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숨어 계시지만 아파하고 고통 받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처에서 현존해 계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대 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살을 공경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들과 만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흠숭하고, 예수님을 찾으며 예수님의 상처들을 알아봅니다. 

오늘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는 백년 전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목동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네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원하느냐?”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그들의 삶을 따르도록 우리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그들은 주님께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기쁨과 고통을 나누는 방식으로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병중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라고 초대합니다. 어린 목동들처럼 여러분의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여러분 스스로를 봉헌하고 싶다고 우리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여러분을 단순히 사회복지 기관의 수혜자로 생각하지 마시고 교회의 생명과 사명 안에서 여러분의 몫을 완전히 느끼십시오. 백 마디 말보다 설득력 있는 여러분의 고요한 현존이 여러분의 기도가, 세상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과 일치한 이들과 함께 여러분의 고통에 대한 매일의 봉헌, 환자와 여러분의 상태에 대한 기쁜 인정까지 이 모든 것들은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자산인 영성생활의 원천들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의 소중한 보물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 대한 친밀감과 사랑의 표징인 성체강복을 통해 여러분에게 가까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슬픔, 여러분의 고통, 모든 권태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교회의 기도에 의지하십시오. 이 기도는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과 함께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여러분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다”
 복자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복녀 히야친타 마르토 시성미사 강론
 
[교종 프란치스코는 5월13일 파티마 대성전에서 열린 성모발현 목격자들인 복자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복녀 히야친타 마르토의 시성식 미사에서 성모님은 우리 인류에게 희망을 주신다고 강조했다. 이날 교종의 강론 전문]
 
요한 묵시록에서 파트모스 섬의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 태양을 입고 (...)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12,1). 또한 믁시록은 그 여인이 아기를 낳으려는 순간에 있다는 사실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어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100년 전 그 축복받은 날이었던 5월 13일 파티마의 발현 목격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서 자기들끼리 주고받으면서 설명했던 “매우 아름다운 부인”이십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히야친타는 그 비밀을 도무지 감추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오늘 성모님을 봤어요.” 그들은 하늘의 어머니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길이 따라갔던 그 자취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도 쳐다봤지만 그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곳에 오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영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 물론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면 당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우리의 삶을 하느님 없는 삶 즉, 종종 지옥이 제안하고 제시하는 삶으로 이끌고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을 모욕하게 만드는 지옥의 위험을 경고하시고 예고하시면서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빛을 상기시켜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었던 내용처럼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졌기”(묵시 12,5) 때문입니다. 

그리고 루치아의 말에 따르면 발현의 특혜를 입은 이 세 명은 성모님으로부터 발산되었던 하느님의 빛 안에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주셨던 빛의 망토로 그들을 감싸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순례자들의 믿음과 느낌에 따르면 파티마는 무엇보다 우리를 덮어주는 빛의 망토입니다. 여기서는 지구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모찬송’이 기도하도록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님을 뵙게 하소서”라고 성모님께 청하기 위해 우리가 동정 마리아의 보호아래 피신할 때 우리를 빛의 망토로 감싸주십니다.

친애하는 순례자 여러분, 우리는 어머니 한 분을 천상 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분의 자녀들처럼 그분께 모여든 우리는 예수님께 토대를 두고 있는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라고 제2독서에서 들었던 내용처럼 이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그분은 동정 성모님의 태중에 받아들여진 우리 인류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곁으로 데려가셨고 결코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치 닻을 내리 듯 우리의 희망을 하늘에서 성부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는 인류에게 고정시킵시다.(에페 2,6 참조) 이 희망은 우리 모두의 삶의 지렛대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희망은 항상 우리를 지탱해줍니다.
 
이 희망에 힘입어 풍요로운 희망의 나라인 포르투갈에서 시작해 전 세계 곳곳으로 확산된 성모님의 빛의 망토 아래서 지나온 100년 세월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축복에 감사드리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을 경배하도록 하느님의 무한한 빛의 바다로 이끌어주셨던 성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성녀 히야친타를 신앙의 본보기로서 우리 눈앞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빛으로부터 수많은 반대와 고통을 극복할 힘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이 그들의 삶 안에 지속되었고 그분의 현존은 감실 안에 감추어계신 예수님 곁에 머물려는 영원한 염원과 죄인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자신의 회고록(셋째 권, 6항)에서 루치아 수녀는 방금 환시에 사로잡혔던 히야친타에게 말했습니다. “길거리마다 오솔길과 들판에 먹을 것이 전혀 없고 배고픔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는 것을 보지 못하느냐? 그리고 교황님이 어느 성당에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성심 앞에서 기도 드리는 모습을 보고 있느냐?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느냐?”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동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동정 성모님을 경배하기 위해,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과 딸들을 그분께 맡겨드리기 위해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망토 아래에서는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분의 팔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과 평화가 주어질 것입니다. 저는 인류 안에서 그리고 세례성사 안에서 하나가 된 저의 모든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특히 병자들과 장애자들 억류된 이들과 실업자들,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듣도록 희망을 가지고 하느님께 기도드립시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을 향해 나아갑시다. 실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다른 이들을 위한 희망 각자의 삶의 신분에 따라 실제적이고 실현가능한 희망이 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신분의 의무를 완수하기를 ‘구하고’ ‘요청할’ 때(루치아 수녀의 편지, 1943년 2월 28일) 하늘은 여기서 우리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우리의 근시안을 위중하게 만드는 무관심에 대항하는 참되고 고유한 행동을 취하게 합니다. 

우리는 희망이 실패로 끝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삶은 또 다른 삶에 대해 관대할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고 항상 우리를 앞서가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거쳐 지나갈 때, 그분께서는 이미 먼저 지나가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서 악의 어둠을 이기시고 우리를 빛을 향해 이끌어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내려가신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마리아의 보호 아래 우리는 세상 안에서 부활절에 빛나시는 구세주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관상할 줄 알고, 교회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줄 아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얼굴은 가난하고, 충실하며, 자유롭고, 받아들이는 자세와 선교사의 태도를 갖추고 사랑으로 충만할 때 빛을 발합니다. 감사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