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되어] 핵폭탄보다 강력한 성령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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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되어] 핵폭탄보다 강력한 성령의 무기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7.04.1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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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되어-12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위협을 빌미로 대부분의 대선 후보들은 사드배치를 찬성하는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뻔히 북한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사드가 효용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국가안보' 프레임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이럴 때 도로시 데이의 '그리스도교 평화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이 반전평화 문제에 대한 시각을 얻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편집자]

예수님은 사악한 무리 중의 하나라는 평판을 받았으므로, 항상 세상일에 말려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통합됨으로써 다른 그리스도들이 된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조차 그분과 결합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죄인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가 물질재화를 좇을 것이라고 알았다(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하여 일정한 양의 재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다인들이 에집트에서 나올 때, 그들은 에집트인들의 소유물, 금과 은을 들고 나왔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박해가 재물을 교회로부터 빼앗을 때까지, 혹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참회하고 우리자신을 비우며, 우리자신을 거부하고 형제들을 섬기며 그분을 따를 때까지 교회의 재화를 늘려간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형제끼리, 독일인과 이태리인이 불란서와 영국과 미국에 맞서 싸우고,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정교회가 서로 싸우고 있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면서도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는 때가 올 것이다.”

예수님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좋다. 너희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돈, 지갑, 칼을 가져라. 그러나 너희들은 부활한 주님, 너희들의 예수, 너희들의 스승과 인격적인 만남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 토마,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이 경험했던 것처럼.

“나는 너희들이 나를 부인하고 있을 때에도 너희들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한다. 아버지의 고유한 사랑을 받는 너희들 하나하나는 알아 듣기 위하여 성령과 만나야 한다. 너희들은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 문제는 너희들의 개인적인 양심, 개인적인 회심에 달려있다. 청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나에게 한 가지 위안은 천년이 하느님 눈에는 하루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우리는 시작도 거의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재물과 무기로 하느님과 국가를 똑같이 공평하게 지키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마지막 회기에 베드로좌로부터, 추기경단으로부터 예수님의 치유하는 손길과 함께 “칼을 치우라”는 명료한 선언이 있기를 기대한다. 이 평화의 울림이 듣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귀에 들리기를 기도하고 희망한다.(도로시 데이는 1965년 공의회 기간 중에 공의회 문헌 안에 평화에 관한 장이 삽입되도록 촉구하기 위해 바티칸에 가 있었다) 

사도들은 칼을 들지 않았지만, 대신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주님을 다시 뵐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갖지 못했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왕국은 이 세계가 아니라는 것, 이 세계는 그분의 나라를 시험하는 자리이고, 노력하는 장소라는 것을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베네딕도 성인이 말했듯이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지상의 왕국이 올 것인지 여전히 그분께 묻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빛을 비춘 후, 그들은 순교로 달려갔고, 십자가를 끌어안았으며, 점점 더 이웃들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목숨을 바쳤다.

“너희가 나의 형제 중 가장 작은이에게 한 것은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선언을, 명료하고 타협하지 않으며 용감한 선언을 주교들로부터 듣기를 온 마음을 다해 갈망한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도들처럼, 여전히 칼을 들고 형제인 흑인들, 베트남인들 안의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세세대대로 응답을 받아왔다. 사도들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은총의 도움으로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라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새로운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다른 이들을 사랑 하여라.”

이 계명은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데까지 지켜야 한다. 구약과 신약으로 우리 모두를 한데 결합시켜주는 사랑의 계명은 마침내 베드로에게,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때의 프란츠 야거슈테터에게도 들렸다. 그리고 수세기동안 그 삶의 역사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들렸다. 우리의 하느님은 숨어계시는 하느님이고, 그러한 이야기들 역시 성인들의 삶속에 숨겨져 있다.

우리는 베트남의 테오판 베나르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그는 참수되기 전에 집행자가 대가로 받는 그의 옷이 피로 얼룩지지 않도록 먼저 옷을 벗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 그들을 용서 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모릅니다.”라고 말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적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우리는 또한 아프리카와 그 착취의 역사를 읽을 때에 우간다의 가톨릭, 개신교 순교자들을 생각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베트남, 산토 도밍고 그리고 이 세계의 위기에 사람들이 칼을 드는 모든 곳에서 순교하고 있다. 그분은 세상 종말 때까지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마지막까지 그분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 가톨릭평화주의자 중 한 사람이 나에게 명료하고 이론이 정연하며 논리적인 평화주의 강령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가톨릭일꾼운동이 33년 지날 때까지 내가 그 글을 쓰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성령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며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계속 싸울 것이다. 그리고 자주 가장 고결한 동기를 갖고, 다른 이들의 정의를 위하여 또한 현재와 미래의 공격에 대비하여 자기방어적인 전쟁들을 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전쟁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의 눈앞에 끔찍한 고통을 내놓는 일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호하고도 어마어마한 자유의 개념같이, 고귀한 목적에 의해 움직이게 되면 어떤 고통도 기꺼이 마주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겸손하게(혹은 나태인지 누가 알겠는가?)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 한테 결정을 기꺼이 맡겨버린다.

종교적 회심이 없어도 홀로 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 부인과 아이들과 농장을 떠나는 프란츠 야거슈테터 같은 사람들은 적지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프란츠 야거슈테터가 말 했듯이, 그를 움직인 힘은 어떤 핵폭탄보다 더 강력한 하느님의 은 총이었다.


<참사람되어> 201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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