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다
상태바
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7.03.22 15: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헨리 나웬의 <예수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3

과테말라의 한 젊은이가 무거운 나뭇짐을 짊어진다. 그 나무는 납치되어 살해당해 길가에 시신으로 발견된 원주민 남자 혹은 태어나자마자 병에 감염되어 죽은 아기들을 위한 관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은 몇 년 전 전 세계 언론들이 분개하며 전했던 일이었다. 뉴스로서의 가치가 없어지고 세상의 눈으로부터 가려져버린 지금도 그 일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총, 칼 그리고 전기봉에 맞아 죽어가고 있다. 어린 아이들은 영양실조, 탈수 그리고 보살핌 부족으로 죽는다. 과테말라, 볼리비아, 페루, 에티오피아, 수단, 방글라데시와 그 밖의 수많은 나라의 작은 마을에서 폭력과 가난이 매일같이 죽음을 불러오고 있다.

헨리 나웬, <예수님과 함께 걷기> 중에서

머리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젊은 원주민 남성의 얼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두 눈은 거의 감은 듯하고 큰 슬픔으로 인해 양 눈썹이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고 얼굴은 이미 늙어 보인다. 죽음이 가까워 보이지만 그에겐 여전히 존엄함, 평온함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통찰이 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고요하다. 그의 앙상한 육체는 내가 앞으로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이미 그것보다도 더 긴 세월을 살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인류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이사야 53,3). 머지않아 자동차가 멈춰 서서 무장한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끌고 가서 잔인하게 고문한 뒤 발가벗긴 채로 길에 내던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 남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친구를 위한 관을 만들 나무를 짊어진 채 계속 걷는다.

빌라도는 채찍질을 하라며 예수님을 넘겨주었다. 병사들은 “그 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갔다”(마태 27,28-31).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겪으셨다. 행동의 시간은 지났다. 그분은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저항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비난을 하거나 책망을 하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희생자가 되신다. 그분은 이제 행동을 취하지 않으시고 상대방의 행동을 당하신다. 그분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Érdekes ilyet sem láttam még egyszerre juttaja eszembe, hogy Jézus Isten Fia. Iletve, hogy mekkora mérhetetlenül nagy fő papunk és,hogy mindenkit ismer

그분은 인간의 삶 대부분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사람들은 굶주리고 납치되고 고문을 당하고 살해된다.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고 집에서 쫓겨나고 가족들과 강제로 떨어져서 수용소에 갇히고 노예처럼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그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 모든 일들의 원인을 알 수 없다.

그들은 가난하다. 예수님께서 어깨 위에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셨을 때 그분은 앞으로 올 세대가 겪을 모든 고통이 당신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느끼셨다. 그분은 과테말라의 젊은이를 보셨고 그를 형언할 수 없는 연민을 갖고 사랑하셨다.

나는 내 자신의 무기력함을 실감한다. 나는 무슨 일인가를 하고 싶다. 나는 무슨 일을 해야만 한다. 나는 적어도 그 폭력과 영양실조, 탄압과 착취에 저항하며 외쳐야 한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나아가, 내가 보고 있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 앞에 더 힘든 과제가 놓여있다.

내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 외로움과 고립, 나를 거부하는 이들로 인해 겪는 십자가, 절망과 내적인 갈등이라는 십자가. 다른 이들이 먼 곳에서 겪는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정작 나만이 경험하는 고통을 온전히 질 수 없다면, 나는 활동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심지어 인류를 위한 투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아닌 것이다.

탄압을 받는 이들과의 연대는 내가 나의 외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따금씩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척 하면서 회피하는 나의 십자가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

나와 과테말라의 나뭇짐을 든 젊은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골이 놓여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둘 모두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한다.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하며,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으로부터 배우는 참된 형제지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길을 통해서만이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 수 있다.

출처_ <예수님과 함께 걷기 십자가의 길>,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5년 10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