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영성] 평신도를 위한 수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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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하는 영성] 평신도를 위한 수도생활
  • 한상봉
  • 승인 2017.01.24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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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 분도소책 60 강독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일상은 분주하고, 숨을 곳이 없는 세상은 때로 숨이 막힌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피할 곳이 없다. 인생은 전쟁과 같다지만, 전사들에게도 휴식은 있다. 어떤 이에게는 가정이 자궁 같은 웅숭그린 편안함을 주기도 하지만, 모든 가정이 다 그런 것이 아니다. 직장생활을 마치고 돌아와도 집안 일이 아직 남아있다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기도 한다. 당연히 기도할 시간도 없다.

신앙인이라면 너무 쉽게 ‘기도하는 사람’을 떠올리겠지만, 그건 주일에 하는 일이고, 평일은 삼아남기에도 벅차다. 그럴 때 써먹으라고 교회가 가르쳐준 기도가 ‘화살기도’이지만, 조만과도 드리기 어려운 처지에 ‘즉각적인 기도응답’을 바라는 화살기도 역시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휴가를 기다리지만, 휴가철은 평일보다 더 바쁘다. 더 잘 쉬려고 계획한 일이 마음을 더 분주하게 만든다. 그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발견한 것이 ‘피정’일 텐데, 다른 식구들에게 미안해서 ‘나 홀로’ 피정을 접어두기 쉽다. 이럴 때 하는 말, 어느 광고 문구였다. “수고한 그대, 떠나라!” 작은 이기심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라"

토머스 머튼의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분도소책 60

토머스 머튼이 쓴 <침묵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은 물론 이런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가 아니다. 단기 피정이 아니라 수도생활에 대한 매력과 의미를 전달하려는 엄률시토회, 곧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대한 소개라고 하도 좋겠다. 그러나 토머스 머튼이 늘 이야기하듯이 “수행의 장소는 수도원에만 있는 게 아니다”라는 말에 기대어 말한다면, 이 세상 모든 곳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수도원이고, 수행하는 사람은 수도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법관’이라고 불리던 김홍섭 판사의 <무상을 넘어서>를 보면, 평생에 걸친 그의 종교편력과 수행적 자세는 여느 수도자에 뒤지지 않는다. 마틴 부버가 말한 것처럼,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는”게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수행의 태도라면, 우리 모두는 그 수행의 길에서 서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고요와 침묵’ 가운데 ‘실제로’ 머물러야 한다. 예수 역시 때때로 군중들에게서 물러나, 제자들도 밀쳐두고 산에 올라 기도하셨다. 물리적인 고독의 환경이 실질적인 회심을 가능케하고, 그분은 고요한 숨결 안에서 더 깊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머튼은 “소음과 혼란과 투쟁의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침묵 속에서 내적 수양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기도의 발전소가 ‘수도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머튼은 “세상 사람들 눈에 보는 외견상의 ‘무의미함’은 바로 수도생활의 진정한 존재이유이다.” 중국의 현인 장자가 말한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이 이런 경우에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수도원 생활이 마치 ‘유토피아’처럼 무소유의 평화를 맘껏 누리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머튼은 “그것은 하나의 신화”라 했다. 꿈 깨라는 것이다. 수도원도 사람 사는 동네라서 문제가 없을 수 없다. 형제와 자매들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깊은 고요 가운데 있기 때문에 작은 ‘문제’라 해도 확대경으로 보는 것처럼 신랄하고 드러난다. 타인에게 민감하고, 나에게 민감하다. 어쩌면 그래서 죄 지을 일이 없는 수도원에서 더더욱 ‘양심성찰’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참에 윤동주의 시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걸 하자는 게 수도생활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윤동주는 ‘참회록’이란 시에서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 속에 나타나온다”고 했다. 우리는 누구나 비상한 삶을 살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을 일구어가지만, 그 가운데서 ‘우선 멈춤’의 순간이 주어져야, 삶의 향방을 가늠하게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도생활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목적이 ‘사랑’으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에게로 정향(定向)되어 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머튼은 수도자들이라고 많은 양의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기도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왔는지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많은 선행과 고행과 기도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사람’이 되는 데 있다. 성 베르나르도는 말한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한다고.

“사랑은 사랑 자체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밖으로부터 추구하지 않는다. 사랑의 열매는 바로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아포기..."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난 대로 살지 않는다"

“살려거든 어서 달아나거라.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창세 19,17)
하느님의 천사가 롯한테 한 말이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불타는 집, 괴로움이 가득한 화택(火宅)에서 떠나라는 전갈이다. 수도자들은 일반 사회생활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인적이 드문 ‘사막’이나 ‘광야’로 달아난 사람들이다. 사막과 광야는 히브리인들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밀월의 장소”이다. 수도자들은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이방인’처럼 살아간다.

이러한 과격한 요구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에 침식된 영혼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끊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습(習)이 너무도 깊어서 속속들이 뒤집어 놓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세례성사’는 물로 묵은 과거를 씻어내고 끊어내는 상징적인 의례이다. 심지어 과거의 계급에서 벗어나라는 ‘탈(脫)계급적 자기선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난 대로 살지 않는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탈계급적 선언을 통해 민중에게로 가야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점에서 유아세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께 봉헌된 존재로 태어나지만, 아기들은 아직 묵은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수도원을 창립했던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러한 자유는 완전한 고독의 삶과 철저한 자아포기로써 이루어진다. 육신의 부모와 인간사회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바라는 목적, 곧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성취할 수 없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 중에는 ‘형식적인 신앙’이 있다고 말한다. 급기야 바리사이즘으로 변질된 형식적 신앙은 “교회에 헌금하고 기도하는”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만족함으로써, 더 근본적인 복음적 요청을 외면한다. ‘독실한 신자’라는 말이 주는 함정은 철저하게 율법을 다 지켜왔지만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내 뒤를 따르라”는 예수의 요청을 거부한 ‘부자청년’의 신실하지만 부족한 신앙을 잘 보여준다.

물론 문화적이고 윤택한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 누구나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바란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냥 지나친 게 있다고 예언자들과 교부들은 말한다. 일부 사람들이 안락한 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불행과 고통 위에 놓여 있다는 ‘인간현실’이다. 그들 역시 하느님의 혈족이다.

우리의 삶의 중심이 자아포기를 통해 ‘나’에게서 ‘너’에게로 건너가는 순간, 우리를 바라보시는 ‘대견하다’ 여기시는 하느님의 미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삶을 충분히 애도하며 돌려보내고, 이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머튼은 요청한다.

토머스 머튼

관상..."우리는 어디서 천국의 계단을 발견할까?"

“관상만으로 새로운 세계를 자기 스스로 건설할 수 없다. ‘그러나’ 관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행동해야 할 중요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관상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친밀감을 잃어버린다면, 침묵이 없다면, 사랑을 통해 은밀하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동은 세상에서 그 목적을 잃으며 위험해진다.”

고요함과 침묵과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수도자들은 공동생활 속에서 형제들에게서 좋은 표양을 배우고, 공동전례를 통하여 ‘하느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형제’임을 발견한다. 아울러 번잡한 세상에서 떠나있다는 환경은 수도원이 ‘거룩한 장소’임을 느끼게 한다. 머튼은 이를 두고 “그곳이야말로 야곱이 하늘과 땅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느님의 천사들 꿈을 꾼 바로 그 두려움의 장소”라고 말했다. 야곱은 자기 땅에서 유배되어 떠돌면서, 그 고독한 순간에 천국의 계단을 발견한다. 수도자들은 고독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을 지킨다.

그러면 평신도인 우리는 어디서 그 천국의 계단을 발견할까? 우리 역시 자기만의 ‘고독한 장소’를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를로 카레토 수사가 ‘도시 속의 광야’라고 부른 그곳이다. 전철을 타고 직장으로 가는 그 순간에 잠시 묵상에 잠겨 있다면, 그 곳이 수도원이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잠시 멍 때리고 있을 때, 어쩌면 그 이부자리가 천국의 계단일 수 있겠다. 매순간 문득 새삼 ‘고독한 순간’을 즐기는 자는 이미 그 계단을 오르내리며 관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잠시 스마트폰을 접어두는 순간 그분이 눈짓을 보내올지 누가 알겠는가. 천국의 계단은 어디에나 있고 또 은밀하게 말을 건다.

관상에 집중하기 위해 수도원에서는 ‘고독’을 강조하지만,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강조한다. 그 이유를 12세기 스텔라의 이사악 아빠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 고독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쓰러진다면, 그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제들이 서로 돕는 가운데 서로 강해지며 강한 성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형제들이 함께 일치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의 형제적 사랑은 세상의 방식과 다른 삶의 방식이다. 그들은 다른 수도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한계와 죄악을 깨닫고 겸손해지며, 형제의 죄를 판단하기보다, 형제의 다름을 인정하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한 울타리 안에 있지만 서로 다른 고유한 방식으로 형제가 된다. 이런 점에서 모든 형제들이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완고한 이상주의는 경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평신도들은 어떻게 관상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특별히 독신을 선택하지 않고 부부의 연을 맺은 이들은? 인도의 브라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결혼식을 치르고 자식들을 낳아 키우고 출가를 시킨 다음엔 해혼식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부부가 법적으로 공간적으로 갈라서는 것이 이혼이라면, 해혼은 한 집에 살되 결혼생활이 요구하는 의무와 권리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삼시 세끼를 저녁 한 끼만 먹기로 결심한 다석(多夕) 유영모가 그해에 선언한 것이 ‘해혼’(解婚)이었다. 유영모는 결(結)혼을 구속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법적 결혼보다 중요한 것은 ‘참된 사랑’이다. 그래서 해(解)혼을 통해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희망했다. 유영모 부부는 결혼 26년 만인 51세에 해혼을 선언하고 부인의 생활에 일체 간섭하지 않고 오누이처럼 오순도순 지내며 91세까지 재미있게 살았다고 한다. 이는 곧 부부관계가 ‘연정’의 단계에서 ‘우정’의 단계로 발전해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이제 동심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단독자’로 하느님 앞에 나아갈 준비를 서두르는 것이다.

규칙...기도하고 노동하고 공부하고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요한 14,21)

토머스 머튼은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존재이므로 전 존재를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봉헌생활이 어긋나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규칙에 대해서 초기 수도생활부터 줄곧 고민해 왔고, 동방과 서방의 교부들은 이렇게 합의했다.

① 기도: 공동으로 드리는 성무일도는 비교적 짧고 간단해야 한다. 수도자들은 공동으로 기도하고, 일과 중에도 기도한다. 주로 시편이 많이 낭송된다. 기도는 늘 그분을 생각하는데 도움이 된다.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성무일도를 바치는 이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거룩함에 참여하고자 하는 갈망이 깊어진 탓이겠다. 성무일도는 기도하는 습관을 만드는 데 유용하다.

그런데 왜 하필 시편이 주로 이용되었을까? 아마도 시편 내용의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 선생은 ‘시의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말한 적이 있다. 시는 은폐된 진실을 함축적 언어로 묘사한다. 좋은 시에 물드는 자는 아름다운 영혼에 깃을 내린다.

② 노동: 수도자들에게는 내적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단순한 일을 배정하는 게 좋다. 수도자는 관상이라는 이름 아래 단순히 게으르게 지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노동으로써 먹고 살아야 한다. 노동은 현실적 힘을 얻는 행위이다. 나와 내 이웃들이 먹을 양식을 생산하고, 환경을 만들어 준다. 내가 흙에서 온 존재임을 상기시키고, 내 육신 역시 그분께 봉헌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빵의 소중함을 모르는 수행자는 빵 없는 자의 고뇌를 알지 못한다. 가난한 백성에 대한 무심함은 예수가 왜 노동자의 신분을 취했으며, 빵으로 유혹받았고, 마지막까지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집어주신 연유를 깨닫지 못한다.

③ 공부(영적 독서): 수도자가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학구적 판단력을 기르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하신 진리로 자기 마음을 키워나가기 위함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이는 책에서 읽은 한 구절 때문에 인생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독서는 또 다른 의미의 기도이다.

우리는 활자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유치한 맹목적 신앙에서 벗어나, 납득할 수 있는 신앙을 통하여 그분과 더 깊이 일치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④ 기도, 노동, 독서의 세 가지가 요소가 우리 삶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초기 베네딕토 수도원에서는 하루에 3~4시간 기도하고, 3~4시간 독서하고, 7~8시간 일했다고 한다.

활동..."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에서 토머스 머튼은 “수도자가 교회를 위한 사도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와 이탈과 고독이라는 자신의 특별한 성소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이 곧 세상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라는 요청은 아니다.

실제 머튼이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호한 태도는 점차 이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돌아섰다. <칠층산>에 대해서도 “그 책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남자의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그는 더 이상 수도원을 타락한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새로 간주하지 않았다.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다. 수도원에 있음으로써 나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투쟁과 고난에 진실로 참여한다.”

머튼은 1961년 홀로코스트 전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불안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히만과 무수히 많은 다른 유대인 학살범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을 당연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충격을 받지도, 놀라지도 않았고, 일말의 후회도 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인간이며 하느님께 순종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보면서 머튼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감작스럽게 빛을 쪼아 모든 어둠을 영원히 없애는 방식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파괴적인 망상을 허무는데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망상은 누군가의 ‘자아’에 숨겨져 있으며, 종종 독실한 율법주의 아래, 더 나아가서는 명백히 선해 보이는 의도 안에서도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와 수도자들의 임무는 “깊은 층위에서 사람들을 뒤흔들어 ‘비진리’와 ‘망상’에서 그들이 깨어나도록 하는 일”이라고 했다. 곧 ‘대의 명분’ 뒤에 숨겨져 있는 허위와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게 수도자의 몫이었다.

침묵...하느님의 파수꾼처럼

침묵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말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듣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입과 귀를 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부정적 거절은 표면상 침묵하고 있지만 이미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 미움과 폭력으로 교류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로 대립하는 것보다 치명적이다.

진정한 침묵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깊은’ 차원에서 살려고 노력이다. 진정한 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마음을 비우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는 어떤 폭군적인 욕망도 없으며, 그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없이 완전히 비워진 사람이다. 진정한 침묵을 위해서는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버려야 하며, 자신이 “잘 전달되어” 남에게 감명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염려에서도 자유롭다.

결국 침묵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견해와 반응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며, 타인을 깊이 응시하지 않고, 자신이 모든 것에서 떠나 있으며, 잊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진정한 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밤중에도 사막에서 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파수꾼 같은 사람이며, 하느님에게서 오는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옛날 수도원에서는 침묵은 징벌이 아니라 축제였다. 형제가 수도서원을 하는 날에도 침묵을 지켰으며, 형제가 죽어서 묻히기까지 며칠 동안 더 깊은 침묵의 신비로 들어가 이 세상의 종말과 다가올 세계에 대해 묵상하였다. 깊은 휴식 같은 침묵 뒤에야 우리는 만사에 여유 있게 대처하며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며, 타인을 환대할 힘을 길어 올릴 수 있다.

성소: 부르심

“어서와 엎드려서 조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세.
당신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우리는 그 목장의 백성이로세.”
(시편 94,6-7)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집약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이 부르심에 개인적으로 응답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수도자와 신학생, 사제들만 ‘성소’를 받았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제자로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세상 속에서 남에게 봉사하며 청빈, 정결, 순명의 생활로 그리스도를 따른다. 수도자는 별도의 성소를 받은 게 아니라 이미 받은 성소를 더 강화시킨 것이다.

“수도자는 성격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이어야 한다. 그의 신심은 진실되고 깊은 것이어야 한다. 성 베네딕토의 말씀대로 수도자는 성실하게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수도자는 사교성이 있고 단순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수도자는 덕을 닦을 있는 단단한 기초를 지녀야 하며, 남을 기쁘게 하고 관대히 대할 수 있는 능력과 겸손하고 친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하며, 무엇보다도 기꺼이 자신을 변화시킬 줄 알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덕성은 수도자가 될 사람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길이다.

한편 성 에일레드는 트라피스트 성소에 대해서 “외적 훈계의 길”, “좋은 표양의 길”, “은밀한 영감(靈感)의 길”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의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부르심이라 해도 더욱 중요한 사실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모험을 수락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토머스 머튼은 “그 모험의 끝은 하느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손 안에 맡겨 드려야 하며, 결코 이 삶을 하느님의 손에서 빼앗아 올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들에게 다가올 기쁨, 희망, 두려움, 그리고 욕구와 충족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계획하지 말며 또한 회피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독과 기도 안에서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는 일이다. 그러면 그 밖의 것은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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