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영성] 인간의 길, 하느님의 길
상태바
[생활하는 영성] 인간의 길, 하느님의 길
  • 한상봉
  • 승인 2017.01.16 22: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의 길> 마르틴 부버, 분도출판사, 1977

하느님과 일치를 참구(參究)하는 신비주의에 닻을 내리면 많은 종교적 진리가 서로 상통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교에 마이스터 엑카르트로 시작되는 신비주의 전통이 있다면, 이슬람교에 수피즘이 있고, 유대교에 하시딤이 있다. 수피즘의 대가로 가장 유명한 분 가운데 하나가 메블라나 젤랄루딘 루미일 텐데, 그는 인간과 하느님의 접속을 ‘사랑’에서 늘 찾아왔다. 그래서 루미는 ‘연애시’로 유명한데, 그분의 연애시 번역서 제목이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산티, 2005)인 것은 적절하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연인들의 생명은 죽음 속에 있다.
네 가슴을 잃어버리기까지는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얻지 못하리.”

겸손함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한 ‘자기비허(kenosis, 自己卑虛)의 그리스도’를 닮아있는 있다. 유대교에서는 하시딤(Hasidim) 운동이 대표적이다. 하시딤(Hasidim, חסידים)이란 말은 “자비”를 뜻하는 히브리말 “헤세드”에서 유래되었다. ‘헤세드’는 자비뿐 아니라 신의와 충실, 우정, 관용, 경건, 친절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시딤이 나타난 것은 바빌론 유배 당시였는데, 헬레니즘 문화에 맞서려는 경건한 노력으로 시작되었으며, 이 하시딤이 율법주의적, 형식주의적으로 발전한 것이 바리새인이고, 신비적이고 금욕적 방향으로 흘러간 사람들이 에세네파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하시딤 운동은 유대교의 신비적 가르침인 ‘카발라’의 영향을 받아 이성적인 측면보다 감성적인 측면을 중시하며,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 깊은 애정을 담고 있다. 이 운동은 18세기 중엽 동유럽에서 일어나 가난과 무지 속에서 방황하는 대중들에게 신선한 가르침을 제공하였다. 이 운동을 일으킨 탁월한 랍비가 이스라엘 벤 엘리에제르(1690~1760)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고아로 태어나서 가난하게 살았으며, 청년기에는 다른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돌보았고, 결혼하고서는 산속에 은둔하며 신비적 유대교 가르침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바알 셈 토브(Baal Shem Tov, 좋은 이름의 주인)로 불리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자기의 입술에 축복이 내리고 영혼의 날개가 자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마틴 부버

하시딤 운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마르틴 부버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다. 마르틴 부버는 1937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있는 유다인 레르 하우스의 자기 후계자로 헤셸을 지명하였다. 나치에 의해 독일과 폴란드에서 살 수 없었던 헤셸이 미국 유니언대학에서도 강의를 했는데, 그의 역작인 <어둠속에 갇힌 불꽃>(종로서적, 1979)에서,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라면서, “그분은 숨어 계신다. 그분은 아주 가까이 계시는데, 가리개와 막 뒤에 숨어 계신다. 그분은 자녀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면서 발각되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을 찾는 일을 잊어버린 것이다.”라고 바알 셈 토브가 말했다고 전한다.

바알 셈 토브는 “하느님의 부재(不在)는 환상”이라며, 우리의 감각이 하느님은 어디에도 안 계시다고 속이지만,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말한다. 아울러 사람의 영혼은 “위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한 부분”이라며, “사람은 마땅히 자기 자신을,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땅 위에 놓여진 계단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짓는 가장 큰 죄는 “자기가 왕자이며, 왕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종교와 신앙체계는 인간이 자기 본성을 극복함으로써 하느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하시딤은 인간 현실과 본성을 긍정하고 그들 안에 있는 거룩한 불꽃을 드러냄으로써 하느님에 다가간다고 설명한다. 마틴 부버는 <인간의 길>에서 세상은 본래 하느님의 빛의 드러남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껍질’을 만들어 쓰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껍질을 깨고 자기 안에 있던 하느님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다. 사물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이를 거룩하게 씀으로써 인간은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신성을 귀양살이에서 해방시킨다. 즉, 하느님을 위해 세상과 자아를 긍정함으로써 세상과 인간을 변혁하는 게 인간의 사명이라 믿는다.

마음 살핌: 너는 네 세상 어디쯤 와 있느냐?”

북부 백러시아의 랍비였던 슈뇌르 살만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투옥되었다. 랍비의 근엄하고 평온한 얼굴을 보고 간수장이 물었다. “전지하신 하느님이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하셨다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요?” 간수장은 하느님이 전지전능한 분이 맞느냐고 물어 본 것이다. 이 모순된 구절에 대해 랍비는 “너는 네 세상 어디쯤 와 있느냐?”고 물었다고 답한다. “너는 마흔여섯 살을 살았는데 그래 어디쯤 와 있느냐?”는 것이다. 갑자기 논쟁거리가 될법한 이야기가 간수장의 과거생활, 그의 경박하고 지각없고 무책임 삶을 책망하는 질문으로 돌변했다. 실제 간수장은 46살이었다.

하시딤은 추상적인 진리를 전달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 구체적으로 와서 닿음으로써 그 사람을 변화되기를 희망한다. 나와 상관없는 진리/하느님은 이미 실효성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마틴 부버는 “사람은 누구나 아담”이며, 하느님이 굳이 찾아 나서기까지는 “하느님 면전에서 숨고 또 숨으면서 더 깊은 타락에 얽매어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이 질문을 통해 은신처에 숨어 있어 있는 ‘또 다른 나’를 일깨운다. 하느님은 조용하고 작은 소리로 부르고 있고, 간수장처럼 이런 소리를 들으면 우리 마음은 떨린다. 이대 우리는 아담처럼 “저는 숨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이런 ‘마음 살핌’의 시간이 인생의 길이 트이는 순간이다. 우리는 흔히 “나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어”라는 소리를 더 자주 듣는다. 그러나 이런 부질없는 속삭임을 거부하고 자신을 긍정하는 순간 희망이 시작된다.

독특한 길: “너는 왜 수샤가 아니었느냐?”

‘루블린 달관자’라고 불리는 랍비는 하느님을 섬기는 길에서 “남들이 한 봉사를 존경하고 배워야 하지만 흉내 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새로운 존재들이기에, 유일무이하고 전례가 없고 반복도 없는 가능성을 실현해야 한다. 랍비 수샤는 “내세에서 나더러 ‘너는 왜 모세가 아니었느냐?’고 묻지 않고 ‘너는 왜 수샤가 아니었느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각 사람에게 고유하며, 그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법이다. 세상에 하느님께 가는 단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성인들의 삶은 참고서일망정 교과서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심지어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다.

루블린의 랍비는 “한 가지로밖에 섬김을 받을 줄 모르는 하느님이시라면 그게 무슨 하느님이겠느냐”고 외쳤다. 인간은 다양한 걸음으로 그분께 다다를 수 있는 법이어서 하느님은 “이 길은 내게로 이끌지만 저 길은 내게로 이끌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하느님은 성 안토니오를 사막으로 부르시고, 성 베네딕토를 수도원으로 부르시고, 로렌조 수사는 부엌으로 부르시고, 마더 데레사는 부르심 속에서 또 다른 부르심으로 부르셨다.

결심: “온몸으로 남김없이”

루블린의 랍비가 이끌던 하시딤 중 한 제자가 다음 안식일까지 단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금요알 오후가 되자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아서 우물로 달려갔지만, 결심한 단식을 망칠까봐 뒤로 물러섰다. 순간 자만심이 느껴지자 이런 생각을 했다. “교만에 빠지는 것보다 차라리 가서 물을 먹는 게 낫지.” 도로 우물가에 갔는데 갈증이 없어졌다. 랍비가 이를 보고 “쪽모이”라며 호통을 쳤다.

마틴 부버는 “어떤 이는 여러 갈래로 복잡하고 갈등이 있는 마음의 임자라서 필연적으로 그 행동도 그렇게 된다”고 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행동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가 늘 유혹에 바지고, 이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루블린의 랍비는 “하나된 마음”을 요구하고 있다. 통째로 마음을 먹어야 매순간 갈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마음을 먹은 뒤에야 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마음으로 하는 일이라야, 그 일을 하는 중에 더 깊은 하나됨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하눅카절에 랍비 나훔은 장기(체스)를 두고 있는 제자들에게 ‘장기 두는 법’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세 가지 규칙이다. 첫째, 한꺼번에 말을 두 번씩 놀리지 못함. 둘째, 앞으로만 가야지 뒤로는 못 감. 셋째, 저쪽 끝줄에 가 닿으면 어디로든 마음대로 가도 좋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군소리 없이 곁눈질 하지 않고 정진(精進)해야 제대로 된 수행이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자면 어느새 달관할지도 모른다. 마틴 부버는 ‘영혼의 통일’이란 말을 쓰는데, “네 손이 하는 일을 네 온 힘을 다하여 하라”는 것이다. 혼백을 다해, 온몸으로 남김없이 참여해야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은 자기로부터: “내 죄 때문에 내 뼈에는 평화가 없다”

이스라엘의 유지들이 모여서 밥을 먹으며 “성실하고 유능한 종이 살림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듣다가 부르키의 랍비 잇싹이 한 마디 거들었다. “나도 예전에 그리 생각했는데, 제 사부가 ‘만사는 집주인에게 달렸다’고 깨우쳐 주더군요. 저도 젊어서 아내의 성화 때문에 괴롭고, 제 집 종들의 처지도 딱했죠. 랍비 다윗에게 ‘제가 아내와 다투어야 할지요?’ 묻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모든 것은 너한테 달렸다고 말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리고 내 생각이 항상 옳은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돌이킬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랍비 부남은 “네 자리에서 평화를 찾으라”고 말했다. 시편에서도 “내 죄 때문에 내 뼈에는 평화가 없다”고 했다. 먼저 나 자신과 평화를 이루었으면 온 세상에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게 마틴 부버의 생각이다.

그러면 사람관계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무엇인가? 마틴 부버는 “모든 충돌은 내가 뜻하는 바를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바를 행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문득 간디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날 두 모자가 하룻길을 걸어 간디를 찾아왔다.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타일러 달라는 것이다. 간디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음날 다시 오라고 돌려보냈다. ㄷ아음날 다시 하룻길을 걸어서 모자가 찾아오자, 간디는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마라”고 한 마디 타일렀다. 어머니가 간디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라면 어제 해주었어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간디는 이렇게 답했다. “어제는 저도 사탕을 먹고 있었거든요.”

아집: “똥은 이리저리 쓸어 본들 똥이다”

싼스의 랍비 하이임은 아들을 랍비 엘리에제르의 딸에게 장가보냈다. 랍비 하이임이 사돈에게 “나는 머리며 수염이며 다 허옇게 세었는데 여태 속죄를 다 못했다오”라며 격의없이 털어놓았다. 이 말을 들은 랍비 엘리에제르가 답했다. “영감님은 여전히 당신 생각만 하시네요. 자기는 잊어버리고 세상 생각 좀 하시면 어떨까요.”

자기 고유의 길을 걸어, 한 마음으로, 자기로부터 일을 시작하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하지 않다는 게 마틴 부버의 생각이다. ‘무엇하러’ 나의 고유한 길을 택해야 하는지, ‘무엇하러’ 하나가 되고,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틴 부버는 “자기로부터 시작하라고 했지 자기에게서 그치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자기를 출발점으로 삼되 목표삼지 말라는 뜻이다. 랍비 엘리에제르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계속 근심하지 마라. 지금 자책하느라 낭비하고 있는 힘을 오히려 본연의 소명대로 세상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는데 쏟으라. 네가 관심을 기울여야할 데는 너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다.”

마틴 부버는 돌아섬, 회심이란 참회나 속죄행위를 넘어서 ‘나’에 머물던 자기 존재를 송두리째 세상을 향해 돌이키는 것이다. 곧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를 성취하는 것이다. 참회는 적극적인 돌아섬을 위한 자극일 뿐,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참회한답시고 애만 태우는 사람을 두고 게르의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줄곧 그 잘못을 입으로 고백하고 그 생각만 하는 사람은 그 잘못에 여전히 붙잡혀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그 생각에 갇혀 있는 한 돌아서지 못한다. 정신은 더 거칠어지고 우울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똥을 이리 쓸고 저리 쓸어 본들 똥은 똥이다. 내가 죄를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렇게 꿍꿍거릴 겨를이 있으면 하늘을 기쁘게 하려고 진주알을 꿰고 있는 게 낫다. 성서에도 ‘악을 떠나 선을 행하라’고 했다. 악에설랑 아예 돌아서서 더는 거기 마음을 쓰지 말고 선을 행하라. 그대가 잘못을 저질렀는가? 그렇다면 선을 행함으로써 이에 대처하라.”

랍비 부남은 구원으로 가는 인류 역사에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고상할 수 있지만 자기만 생각하는 오만한 자들과 자기를 넘어서 모든 일에 세상을 생각하는 겸허한 이들이다. 랍비 부남의 제자인 랍비 멘델은 세 가지를 대중에게 요구했다. 첫째, 자신 밖을 몰래 내다보지 말 것. 둘째, 남을 몰래 들여다보지 말 것. 셋째, 자기를 목표 삼지 말 것이다. 이 말은 남이 어떻게 살든 자신의 고유한 길을 걸어 ‘제 자리에서 성화할 것’을 요구한 것이며, 다른 사라므이 영혼에 담긴 비밀을 존중하고 약점을 잡으려 들지 말라는 것이고, 제 이익을 탐하지 말고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라는 것이다.

제 자리에서: “거룩하다, 지금여기”

크라코프의 랍비 아이식은 몹시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프라하의 왕궁으로 건너가는 다리 밑에 보물이 있다는 꿈을 세 차례 꾸고 나서, 프라하로 여행을 떠났다. 다리 밑에서 당을 팔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밤낮 다리 주변만 빙빙 돌다가 경비대장을 만났다. 그가 “무엇을 찾느냐, 아니면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묻자 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경비대장이 껄걸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딱한 양반이 있나. 그래서 신창이 닳도록 여기까지 오셨군요. 나도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가보지는 않았지만, 크라코브에 사는 어느 유대인의 집 방 화로 밑을 파면 보물이 있다더군요. 그 유대인의 이름이 예켈의 아들 아이식이라고 하던데.” 랍비 아이식이 집에 돌아와 화로 밑을 파보니 과연 보물이 나왔다. 랍비 아이식은 이 돈으로 제 이름을 딴 회당을 지었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환경, 내게 운명처럼 주어진 처지, 날마다 내게 생기는 일들, 날마다 나를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곧 소명을 성취하라는 이야기였다. 마틴 부버는 어느 탈무드 대가가 “하늘의 길이 자기 마을길들처럼 환했다”고 한 이야기를 듣고, “자기 고향 마을길들이 하늘의 길처럼 환하다”는 말로 돌려 놓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자리하고 있는 바로 ‘여기서’ 숨어계신 하느님의 생명의 빛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겪는 일상에서 거룩한 뜻을 새기고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랍비 바알 셈 토브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치고 숨은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고 했다. 우리가 함께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 농사를 돕는 짐승들, 우리가 일구는 땅과 연장, 이 모두가 ‘거룩한 일을 하도록’ 돕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작은 만남에서 날마다 생명의 물을 대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메마르고 헛되다. 어떤 종교들은 이승의 삶이 허깨비여서 그 너머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참세상으로 가는 이승이라는 문간에 마음을 두지 말고 어서 지나가라고 이른다. 그러나 하시딤은 거룩한 뜻으로 하는 일은 모두 세속적이지만 하느님과 실제로 밑닿아 있음을 가르친다.

람비 핀하스는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바라보며 수심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을 이 세상에 끌어들입시다. 그러면 모든 곤궁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은 사람에게 당신을 맡기시는데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인간을 통해 이리 오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인간이 거저 얻어 누리는 행운이다. 랍비 코츠크는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 어디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이는 곳이면 어디에나 머무십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정말로 서 있고 살아 있고 참 삶을 살고 있는 그곳 뿐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세상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그분의 거처를 세상에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마지막으로 신석정의 <들길에 서서>라는 시를 읽어보며 ‘거룩한 일상’에 대해 잠시잠간 묵상해본다.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山林)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문장>(文章), 1936. 9.


<동영상 강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