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영성] 일상의 신학-일하고 걷고 앉고 보고 웃고 먹고 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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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하는 영성] 일상의 신학-일하고 걷고 앉고 보고 웃고 먹고 자는 것
  • 한상봉
  • 승인 2017.01.0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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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라너, 분도출판사, 1980 강독

나이를 먹을 만큼 먹으면 노년과 죽음에 대비해야 된다. 그저 연금 액수만 헤아려서야 노년이 아름다울 수 없다. 인생을 미리 정산할 필요도 정산할 수도 없겠지만, 다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 살수록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느끼고 있는지 헤아리는 사람이 영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에 남는 게 무엇이 있을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그야말로 ‘허공’ 위에 떠 있는 ‘가련한 인생’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칼 라너는 “고요한 노년, 성숙한 노년, 깔끔한 노년, 혹은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있는 아름다운 노년도 있는가 하면, 허물어져가는 노년”이 있다고 했다. 그 현실을 가감없이 환상없이 냉정하게 바라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바울로의 말마따나 ‘모든 희망을 거슬러 하나인 희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전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신비가들이 늘 발견하던 명제가 이것이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이 선종 뒤에 베개머리에서 발견된 꼬깃꼬깃해진 쪽지에는 이런 기도시가 적혀 있었다.

생각을 들어 올려 하늘까지 오르라
그 무엇에도 서글퍼하지 않기를
그 무엇에도 네 마음 어지럽히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라 넓은 마음으로
그리고 올 것은 오기를
그 무엇에도 놀라지 말라

세속의 영화를 아느냐 헛된 영광이니라
그 무엇도 영원하지 못한 것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천상의 것을 갈망하라 그것은 늘 지속되는 것
바람을 헛되게 하지 않고 가득 채우는 것
하느님은 변함없으시다

사랑할 만한 것을 사랑하라 한량없는 선하심을
그러나 순수한 사랑은 없노라 인내 없이는
영혼이 신뢰와 살아있는 믿음을
보존하기를 믿고 바라는 이는
모든 것을 얻는다

끈질기게 쫓는 지옥의 분노가 비록 눈앞에 닥쳐도
그것은 한낱 웃음거리가 될 뿐
하느님과 함께 있는 이에겐
소외, 십자가, 불행 등이여 오라

하느님께서 그의 보물일진대
어떠한 아쉬움도 없으리니
마찬가지로 세상의 재물들
또한 헛된 행복들
비록 이 모든 것을 잃어도
오직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리

아무 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아빌라의 성 데레사, 아무 것도 너를

대 알베르토 성인(Albertus Magnus, 1200?∼1280)성인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앞서 철학과 신학의 종합에 디딤돌을 놓았던 분으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미완성)과 <피조물에 관한 대전>(Summa de Creaturis) 등 다작(多作)으로 유명하다. 단테는 그를 아퀴나스와 더불어 ‘예지자’(spiriti sapienti)로 불렀다. 1931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했으며, 교회학자로 공포되었다.

그런 성인이 말년에는 신학은커녕 고작 ‘성모송’밖에 바칠 줄 몰랐다고 한다. 이를 두고 칼 라너는 “그때야말로 비로소 우리가 제 손이 아닌 하느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면서 “자기 삶을 스스로 지배할 수 있는 줄로 여기던 시절보다 이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손 안에서 더욱 아늑하고 안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요한 내 의지보다 하느님 의지를 앞세우고, 그분 현존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일갈이다.

사진=한상봉

일상의 신학

47쪽에 불과한 칼 라너의 <일상>(분도출판사, 1980)이라는 신학 단상집은 아주 짤막하게 일하고 걷고 앉고 보고 웃고 먹고 자는 일상생활에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성찰하고 있다.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고 한 릴케의 글로 시작하는 이 책에서, 라너는 하찮아 보이는 일상에 숨어계신 하느님을 발견하라고 호소한다. 마치 샤를 드 푸코가 파란만장한 공생활 이전에 ‘나자렛에서 숨어 계셨던 예수’의 은닉된 삶에 주목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울러 ‘일상’에 대한 성찰은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가 일상에서 발견한 ‘작은 길’을 떠올리게 한다. 부엌에서 설거지 하면서, 이웃과 자잘한 대화를 나누면서, 먹고 자고 일하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성당이나 감실을 떠나면 하느님 현존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느끼고, 가급적 자주 성체조배라도 해야 그분 곁에 꼭 붙어 지낼 수 있고, 그분이 나를 영 잊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장악하고 있는 내 일상에서 그분과 동반하지 못한다면, 내 생애의 대부분은 ‘하느님 없이’ 지나갈 뿐이다. 이런 신자라면, 아무리 열심한 사람이라도 사실상 ‘무신론자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성당에서 성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성당 밖에선 파렴치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 라너는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은 채 견디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일상이 언제나 축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상에선 호언장담과 거짓이상이 폭로되고, 절제와 단련, 인내와 수행을 통해 복음이 ‘인간다운 삶’이라는 현실성을 얻는다. 그래서 사소한 일상이라도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일상 안에 영원한 핵심이 있고, 거기서 영원의 전조를 문득 발견한다. 일상은 “마치 온 하늘을 담고 있는 물방울처럼” 그 이상의 삶을 가리키는 상징이며, 다가오는 무한성을 알리는 전갈이며, 우리 위에 드리워지는 하느님 현존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일상 안에 그분이 숨어서 현존하신다는 뜻이다.

칼 라너는 “작은 것은 큰 것의 약속”이며, “시간은 영원의 생성”이기 때문에, “일상사가 우리를 현실적이게 하고 더러는 고달프고 낙담케 하며 욕심을 버리고 주저앉게”하면서, 영원한 삶의 축제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킨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어”라고 말하지만, 이런 길을 통해 우리 삶의 주도권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있으며, 그분이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혜 안에 머물게 한다.

일하는 것

성경에서는 일(노동)을 창조적 노동과 강제적 노역으로 구분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노동으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다. 그 노동의 결과가 내 생계와 공동체의 삶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창조적 노동은 바람직하다. 사회교리에서는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계승하는 것”이라며 ‘거룩한 노동’의 품위를 높여주었다. 요셉 성인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도 노동자였다. 그분의 제자들도 ‘어부’처럼 땀 흘려 일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강제노동인 ‘노역’(勞役)은 구조적인 악의 결과이며, 하느님은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분이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다루는 ‘일하는 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현대인들이 겪는 ‘일’이다. 일은 신학적으로 숭고하고 위대한 창조력 행사겠지만, 일상의 무게를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부담이기도 한다. 생계를 위한 노동도 있겠고, 특별한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일하기도 하고, 때로는 “본연의 자기를 직면하지 않으려는” 자기도피의 수단으로 일에 매달리기도 한다.

흔히 ‘일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침묵 속에서 ‘신성과 신비’ 안으로 들어가 묵상 하기를 꺼린다. 인생의 본질에 대해 “나는 뭐지?” “나는 왜 이렇게 살지?” 하고 묻기 시작하면 분명한 답을 얻기 힘든 까닭에 혼란에 빠지고 불안감에 시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란 대체로 ‘숭고함’과 ‘진통제’ 사이에 걸려 있다. 일이란 고되면서 견딜만하고, 평범하고, 길들여지고, 단조롭고 되풀이되는 것이다. 삶을 유지시키면서 소모시키고, 한편으론 그런대로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일이란 때로 낯설게 밖으로부터 들이닥치는 것이고, 그 무게를 받아내야 하는 것이므로 인내와 자기포기를 요구하지만, 신앙과 인간관계가 강요하는 시름에서 벗어나게 하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일은 번뇌와 갈등을 완화시켜주는 치유효과도 있지만, 때로 창조적 기쁨을 제공해 준다.

결국 일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지만, 하느님 은혜 안에서는 거룩함을 감지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공평과 책임감, 사랑이 깃든 몰아적 태도를 낳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인들은 제 삶을, 특별히 일을 통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이때 일은 ‘미션’(사명)이 된다.

사진=한상봉

걷는 것

칼 라너는 “우리가 걷지 못하게 되거나, 불구가 되거나, 갇혀 살게 될 때 문득 걸을 수 있음을 기적처럼, 은혜처럼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붙박이 식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은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바라던 목적지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구도자(求道者)임을 체험한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사도 9,2)이라고 불렀다. 이를 두고 칼 라너는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에 그치지 않고 행하는 자가 되려면 성서를 따라 영으로 살뿐 아니라 영 안에서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신체적인 걸음만으로도 여기가 우리 정체가 아님을, 우리는 길을 가고 있음을, 어디엔가 정말로 이르러야 할 몸임을, 아직도 목적을 찾고 있는 나그네임을, 두 세상 사이의 방랑자임을, 길손임을 말한다.”

라너는 “깨달아 알고 자유로이 행하는 자의 걸음”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걸어야 하는데, 그럴 때 하느님 역시 우리를 향해 마주오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향해 ‘계속’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해 움직여 오시는 하느님의 힘 때문에 가능하다. 즉,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그분에게로 움직인다. 황지우 시인은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랜 세월을 다해 너는 지금 오고 있다”고 했다. 그 갈망의 절실한 은유가 곧 ‘걸음’이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해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곳에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을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한편 헨리 나웬은 <예수님과 함께 걷기-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은 걸으셨고, 여전히 걷고 계신다”고 했다. 실제로 걷는 행위가 어떻게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지 잘 보여준다.

“예수님은 한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걸으시고, 그렇게 걸으시면서 가난한 이들을 만나신다. 그분은 구걸하는 이들, 눈먼 이, 병든 이, 통곡하는 이, 희망을 잃은 이들을 만나신다. 그분은 언제나 땅과 매우 가까이 계신다. 그분은 한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느끼신다. 그분은 시들고 바래버린 풀, 바위투성이의 땅, 가시덤불,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들판의 꽃들과 풍요로운 수확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 거칠고 생명으로 가득 찬 계절을 직접 걸으시면서 자신의 온 몸으로 느끼셨기에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당신과 함께 걷는 이들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며, 여정의 진정한 동반자가 갖는 권위를 갖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분은 단호하시지만 아주 자비로우시고, 직설적이지만 아주 부드러우시며, 강하게 요구하시지만 모든 것을 용서하시며, 진실을 면밀히 살피시지만 우리를 아주 존중하신다. 그분은 가장 깊은 곳을 잘라내시지만 치유자의 손길로 그렇게 하신다. 갈라놓으시지만 오로지 성장을 위해서다. 부인하시지만, 그러나 더 큰 긍정을 위해서다.”

앉는 것

칼 라너는 “고된 일이나 먼 길 끝에 고마운 마음으로 앉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묻는다. 아무리 방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자리잡고 눌러 앉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덜컥 자리 잡을 수는 없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도 있다. 결국 모든 움직임은 충만한 삶의 ‘결정적 자리’를 향한 귀향의 표현이라고 라너는 말한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묵시 3,21)

칼 라너는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무한한 신비와 사랑의 합일”을 이루는 데서만 온전한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착잡하나이다”라고 했으며, “오 진리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고 했다.

길을 걷는 것만으로 온전하게 그분을 만날 도리가 없다는 말인데, 실상 그분을 새길만한 고요와 침묵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 예전에 법정 스님이 어느 산문에서, 노상 음악을 틀어대는 버스기사를 탓한 적이 있다. 아무소리 들리지 않는 고요를 불안해 하는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휴식이 필요하다.

주일도 평일처럼, 생계를 돕기 위한 일이 아니라 해도, 여전히 이런저런 여행과 계획을 세우기에 바쁘다면 이미 그분의 신비를 마주칠 공간은 없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처럼, 주일이 평일보다 더 바쁜 사람은 문득 마음에 ‘STOP’이라 강력히 새겨야 한다. 틈을 주는 삶이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한다. 쉘 실버스타인이 지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나무의 아낌없는 사랑도 주목할만 하지만, 노인이 되어서야 나무에게 돌아온 소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나무는 ‘하느님 사랑’의 은유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진=한상봉

보는 것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의 실존을 보는 사람, 즉 세상을 감연히 있는 그대로 보면서 욕심의 허상으로 그 참 모습을 뒤덮지 않는 자, 실상과 외양을 갈라 이중이 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내주는 자는, 정신적인 눈이 건전한, 단순한 눈길을 가진 인간이다.”

칼 라너는 ‘눈’은 내가 세상을 보는 창문이며, 동시에 남이 내 영혼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사물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눈이 마음의 창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달리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마치 한겨레/경향신문을 통해 세상을 읽는 사람과 조선/동아일보를 통해 세상을 보는 이의 시각이 전혀 다를 것과 같다. 내 마음이 맑으면 세상이 밝게 보인다. 내 마음이 탁하면 세상은 침침해진다. 세상이 침침해지면, 오직 이미 제가 갖고 있는 선입관, 편견이 강력하게 작동한다. 눈에서 선글라스를 벗지 못하는 사람이 그러하다.

한편 칼 라너는 “눈은 숨은 내면에서 나와 밖으로 나타나는 문”이라 했다. 우리는 “사람의 눈을 보고 그 두려움과 그리움과 오만과 자비와 선함과 악함과 시기와 경멸과 질투와 거짓을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눈매가 선한 영혼을 보는 것은 만인의 기쁨이다. 이때는 말이 필요없다. 그리운 이의 사랑어린 눈매만 보아도 보는 이의 마음에는 넉넉해지고 따뜻한 기운이 흥건하게 차오른다.

복음서에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 했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2)고 말한다. 이 말은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유대인들에게 ‘몸’은 ‘살덩이’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원론에 영향을 받지 않는 그들에게 몸은 인간 그 자체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몸이 되어 오셨다고 믿는다. 곧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온몸이 밝아지려면, 먼저 눈이 맑아야 한다고 전한다. 즉, 마음자리와 시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 마음자리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고 있다면, 내 몸 자체가 하느님의 성전이며, 내 심장은 곧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지성소가 된다. 그분이 세상을 보는 시선으로 우리도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 시선은 핵은 ‘연민’이다. 측은지심이다.

가엾은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이다. 이 시선을 확보하지 못하면 복음서를 온전히 이해할 도리가 없다. 그분이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지, 그게 가능한 건지, 왜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다 했는지, 그게 가능한지 말이다. 그분의 처신과 말씀을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웃는 것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음모를 꾸미는구나.
“저들의 오랏줄을 끊어 버리고
저들의 사슬을 벗어 던져 버리자.”
하늘에 좌정하신 분께서 웃으신다.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시편 2,1-4)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파토스의 하느님이다. 냉정한 우주질서나 수학정식 같은 하느님이 아니다. 그분은 울고 웃고 분노하신다. 그분 아드님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느님의 의인화된 표현이겠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비와 정의를 베푸시고, 또한 우리에게도 그러한 자비와 정의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무엇 때문에? 사랑 때문에.

칼 라너는 비참한 인간 현실 한가운데서 눈물겨운 정경을 보시며 하느님은 가련히 여기시면서도, 태연하게 웃으신다고 전한다. “그러실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영원한 말씀이 우리와 더불어 우셨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 세상의 아픔을 끝간 데까지 겪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분이 본해 창조하신 세계는 “보시니 좋은” 세상이었다. 창조 뒤에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이 곤혹스럽고 고단한 생애라 해도, 종국에는 그분처럼 ‘웃게 되리라’는 것이다.

라너는 어쩌면 종말론적 웃음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물의 골짜기가 메워지고, 높은 산들이 낮아져 평지를 이루는 ‘평등평화의 세상’에서 만인이 형제애 안에서 지을만한 웃음이다. 고단한 삶의 구비마다 “그냥, 웃지요”라는 태도가 정말 필요하다. 이런 심리적 여유가 없다면 우리는 ‘이승에서 지옥을’ 살게 된다.

칼 라너는 이런 걸 “확 풀어주는 웃음”이라 했다.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볼 줄 아는, 탁 트인 호감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웃음이다. 이런 웃음은 “사랑의 표시이며,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포용하는 사랑의 계시 혹은 교습”이라고 라너는 말한다.

먹는 것

요즘은 ‘혼밥혼술’이 대세라고 하는데, 칼 라너는 ‘회식’(會食)을 강조한다. 회식은 여럿이 함께 먹는 식탁공동체를 말한다. 우리가 영성체를 하는 동안 “주님 자신이신 그분의 빵을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나와 하느님, 우리 서로를 합일시키는 것”처럼, 더불어 밥을 먹는다는 것은 먹는 이들 상호간의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지는 일치의 상징이다.

칼 라너는 특히 밥나눔을 “세상에 우리의 사랑을 내맡기는 가장 낮은,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고 말한다. 먼저 더불어 밥을 먹어야 일상이 ‘축제’가 된다. 먹을 것 없는 축제를 상상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줄곧 ‘잔치’로 비유했을까?

예수아기가 태어났을 때 밥통에서 포대기에 싸여 있었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제일 먼저 유혹받은 것도 “돌멩이를 빵으로”였다.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로 신명을 돋게 하시고, 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부활하신 연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난 날에도 그들에게 손수 빵도 굽고 생선도 구워주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하고 말이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가장 구체적인 언급은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아니던가. 어쩌면 “먹는 것”은 모든 사랑의 기초이며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아침밥을 지을 때, 이웃을 밥상머리에 초대할 때, 짜증나면 밥을 하지도 손님을 청하지 않을 일이다. 식탁은 축제처럼 ‘기쁨’이 가득해야 한다. 식탁공동체가 곧 하느님 나라의 직접적인 성사이기 때문이다.

사진=한상봉

자는 것

칼 라너의 <일상>은 마지막 주제어로 ‘자는 것’을 택하였다. 하루의 마무리가 잠이라는 의미이고, 인생의 마지막이 ‘죽음’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하루의 의미는 잠자기 직전에 드러나고, 인생의 의미는 죽는 순간에 드러난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잠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제대로 일한 사람의 깊은 잠, 숙면이다. 하루를 고스란히 바친 연후에 기진한 상태에서 잠에 빠져드는 순간에 느끼는 가벼움이란 경험해 본 사람만 안다. 마치 마지막 기운이 마저 몸에서 쏘옥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아마 박노해 시인 역시 <첫마음>이란 시에서 “한번은 다 다치고 나서” 잠을 청하라고, 그렇게 다시 새벽을 맞으라고 권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 있다

첫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마음으로

물론 이런 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밤새 신열을 앓는 것처럼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이하는 불면의 시간도 있을 테고, 게으름뱅이의 이유 없는 늦잠도 있겠다. 하루를 충만하게 살지 못한 죄책감은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에서 어설플 수밖에 없겠다.

2007년에 출판한 졸저 <생활속에서 드리는 나의 기도>(바오로딸)에서, 나는 하루의 시작을 이렇게 기도했다. 아침에 눈을 뜨며 “오, 주님! 창조의 첫날처럼 오늘 하루를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했다. 잠자기 전에는 “오, 주님! 새벽이 올 때까지 제 어둔 밤을 지켜주소서.” 했다. 잘 자는 것은 그래서 잘 사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최근에 대통령의 24시간은 모두 공적(公的)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아마 세월호 7시간 때문에 나온 말이겠지만, 국가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에게는 잠 자는 시간마저 공적 생활의 일부일 것이다. 잠은 꿈으로 이어지고, 꿈길에서도 사랑이 그러하듯이 삶도 지속된다. 그러나 잠결에서는 ‘의식’이 명료하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죽음을 연상시키는 지도 모른다. 그처럼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 매일같이 유서처럼 일기를 쓰고, 매일 아침 새로운 생명을 축복한다.

칼 라너는 그래서, 잠은 ‘신뢰의 행위’라고 말한다. 일신의 안위가 불안하다면 잠을 청할 수 없지만, 믿는 구석이 있다면 잠자리가 평안하다. 라너는 우리가 잠을 청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선함을 믿고, 나아가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현실을 수락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즉, 생리현상에 못이겨 늘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의 전인적 행위로서 마음을 푹 놓고 잠을 청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신앙행위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를 사랑으로 여기고, 그 사랑에 자기 실존을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저녁기도로 잘 준비를 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저녁기도는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라너는 “그날그날의 일들을 떠나보내는 미련 없는 정회와 화해와 이별, 그리고 우리를 언제나 사랑으로 감싸주는 신비에 나를 맡기는 의탁행위라야 합당하다”고 한다. 이처럼 기도하면서 잠에 빠져드는 자의 어두운 심연은 축복으로 청정해진다. 그러면 잠은 평온하고 안락해져 삶의 깊은 바탕과 통하게 된다. 잠결에도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은혜 체험

신비가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하나, 너무나 어둡고 은밀한 체험이라서 우리가 알기 어렵다. 간혹 신비가에 따라서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런 체험은 ‘시’의 형태로 어렴풋이 언급할 뿐 분명한 언어를 갖지 못한다. 다만 일상을 사는 우리는 우리가 은총 안에 있음을 이런 경우에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칼 라너는 언급한다.

-부당한 취급을 받아서 변명하고 싶은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나의 침묵을 강요받을 때도 남을 용서한 적이 있는가?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뜻 때문에 순명한 적이 있는가?
-아무런 남의 인정도 내적인 만족도 못 느끼면서 희생한 적이 있는가?
-전적으로 고독해 본 적이 있는가?
-순전히 양심의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이해시키지도 못할 결단을 혼자서 책임지고 내린 적이 있는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하느님이 없는 것 같고, 허무를 향해 뛰어드는 것 같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도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기막힌 바보짓 같은데도 신앙인의 의무를 행한 적이 있는가?
-아무런 감사와 이해도 받지 못하면서 누구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

칼 라너는 이런 경험들을 정신의 체험, 영원의 체험이라 불렀다. “현세적 성공으로 뒷받침 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믿고 뛰어드는 모험” 같은 데서 하느님 은총 안에 있음을 체험한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의 내면은 “은밀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으며, “자신이 이 세상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숨은 두려움 속에서 거듭거듭 확인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성인들은 대체로 하느님을 호흡하기 시작하면서 별난 인생, 가난, 겸손의 갈망, 죽음의 그리움, 고통의 감내, 순교의 은밀한 동경을 지니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라고 약한 구석이 없을 리 없다. 통념적인 삶으로 되돌아가고픈 마음이 없을 리 없다. 이들은 다만 사변적으로가 아니라 실존적으로 “시간과 영원의 접경(接境)”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과 복음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분면히 뭔가 알기 때문이 아니라, 희미한 그림자에 의지해서라도 ‘다름’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이 신비가 아니고, 베일에 싸여 있는 분이 아니라면 굳이 ‘신앙’이 필요한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복되다.

이처럼 우리 자신을 다 내주어 더는 ‘나’랄 것이 없을 때, 만사와 자아가 우리로부터 한없이 멀리 물러났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현존 안에 살기 시작한다고 칼 라너는 말한다.

“이런 삶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져서 우리는 소스라쳐 도로 낯익고 가까운 세계로 도망치곤 할 것이고, 또 그래도 괜찮다. 그렇더라도 차츰차츰 성령으로 가득한 정신의 순수한 술에 맛들여야 한다. 적어도 성령이 이끌고 그느리시거든 잔을 물리치지 않아야 하겠다.”

이런 성령의 잔을 받아 마실 수 있는 자는 오직 허무에서 충만을, 추락에서 상승을, 죽음에서 삶을, 버림에서 찾음을 차츰 맛볼 줄 알게 된 자뿐이다. 우리는 오직 자아를 잊음으로써만 하느님을 찾을 수 있으며, 몰아적 사랑으로 돌이킴없이 자신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만 그분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일상 속에서 조금씩 그분을 맛들이는 길 뿐이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시편 34,9)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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