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다시보기] 교회의 예수에 대한 역사적 예수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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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보기] 교회의 예수에 대한 역사적 예수의 도전
  • 김진호
  • 승인 2019.04.0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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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해석학 I] ‘장벽 저편 사람들’의 시선으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성서아카데미 2019년 상반기 강좌로 마련된 김진호의 강의록을 정리해서 <가톨릭일꾼>에 연재합니다. 이 연재는 성서와 예수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입니다. -편집자) 

'예수'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예수는 서기 30년 어간에 팔레스티나의 갈릴래아 시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스라엘 종교권의 개혁자이자 민중운동가이다. 그러나 그는 유대아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가 죽은 직후, 그의 부활설이 유포되면서 그를 계승하는 운동이 이어졌는데 우리는 최소한 세 부류의 예수운동에 대해 알고 있다.

첫째는 그를 추종했던 제자그룹 다수파와 가족들(어머니와 형제들)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서 예수운동을 이어갔다. 우리는 이들을 ‘예루살렘의 이스라엘계 예수파’라고 부르겠다. 이들이 남긴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사도행전〉에 그들의 활동이 남아 있고, 그 지도자들인 주의 형제 야고보와 모친인 마리아를 비롯해서,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 토마스 등에 관한 전승이 남아 있다.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이들에 관해 언급한 것들으로 볼 때, 이 계열은 초기 예수운동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반로마 항쟁으로 철저히 파괴되면서(서기 66~70년) 예수운동의 주도권이 헬라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헬라어에 미숙한 이들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했던 것 같다.

둘째는 예루살렘의 리버디노 회당에 속한 일단의 활동가들(τινες τῶν ἐκ τῆς συναγωγῆς τῆς λεγομένης Λιβερτίνων)이 주도한 예수운동 그룹이다. 우리는 이들을 ‘예루살렘의 헬라계 예수파’라고 부르겠다. 로마 황제의 정무관 빌라도와 대제사장 카야바가 실각한 서기 36년, 예루살렘의 권력 공백상태에서 벌어진 리버디노 회당의 예수파 숙청사건으로 이들의 일부는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는 다른 곳들로 도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 흩어진 헬라파 예수운동 활동가들이 뚜렷한 족적을 남기며 새로운 예수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한 두 도시가 다마스쿠스와 안티오키아다.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מָשִׁיחַ)를 헬라어로 옮긴) ‘그리스도’(χριστός)라고 외치면서 예수운동을 벌였다. 이 두 도시를 중심으로 확산된 예수운동은 ‘그리스도운동’으로 알려졌다.

다마스쿠스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 운동이 동쪽으로 전파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소아시아와와 인접한 북시리아의 도시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파 운동이 서쪽의 지중해 지역으로 전파되는 중심지였다. 제2성서(신약성경) 문서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텍스트를 저술한 바울은 바로 이들 그리스도파의 확산 과정에서 등장한 스타였다. 그는 처음엔 다마스쿠스를 거점으로 아라비아에서 활동했고, 후기엔 안티오키아에서 시작해서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로마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그리스도 운동을 이어갔다. 그가 쓴 서신들은 모두 이 후기 활동의 산물이다.

셋째는 갈릴래아 북부와 시리아 남부의 시골지역에서 번져나간 예수운동 계열로, 이 운동을 주도한 계층적 집단이 '오클로스'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을 ‘갈릴래아의 예수-오클로스파’라고 부르겠다. 우리가 이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텍스트는 〈마르코 복음〉이다. 이 문서가 구술문학이라는 점은 구술로 전승된 예수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그 전승주체는 오클로스였다.

오클로스는 이스라엘 사회의 공동체 외부로 밀려난, ‘속하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오클로스들로는 이스라엘의 지배 담론에서 혐오적 대상으로 간주된 병자, 악령 들린 자, 매춘여성, 세관원 등이 있다. 아마도 농촌 마을을 비자발적으로 이탈해서 유민화된 이들이 사회적 계층으로서의 대표적인 오클로스에 속할 것이다. 이들 사이에서 회자된 예수 이야기가 누군가에 의해 구술문학으로 만들어진 것이 〈마르코 복음〉, 특히 1~9장까지의 이야기다.

이 세 범주의 예수운동 중, ‘예루살렘의 헬라계 예수파➜안디옥의 그리스도파’의 경로로 확산된 예수운동의 계보에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가 탄생한다.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공동체에서 그리스도분파의 회합 장소 혹은 회합 자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초기 그리스도파 활동가들이 폴리스의 시민들의 민회를 가리켰던 에클레시아를 차용해온 것으로 보인다.

 

[도표01] 예수 담론의 전개

교회의 예수

에클레시아의 발전 과정에서 초기 예수운동의 주요 행위자인 ‘떠돌이 예언자’보다 ‘공동체조직가’가 더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했다. 바울의 텍스트는 에클레시아의 주요 행위자를 네 부류로 이야기한다. 사도(αποστόλος), 예언자(προφήτης), 교사(διδασκαλος), 기적행위자(δυνάμεις. pl.)가 그것이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몇몇 일꾼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예언자(προφήτας)요, 셋째는 교사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요,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요, 관리하는 사람이요, 여러 가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1코린 12,28)

이 가운데 사도, 예언자, 기적행위자 등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떠돌이 예언자’에 더 친화적인 역할이었다면, 교사는 ‘공동체조직가’의 역할 가운데 하나로 규정할 수 있다. 1세기 말의 제2성서 문서들 속에는 ‘교사’ 외에 ‘목자’(ποιμένας, 에베소서〉 4,11), 장로(Πρεσβύτερος, 디모데전서 5,17) 등이 중요한 직무로 강조되는데, 이들 역시 공동체 조직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지역조직가들이 점차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자리잡으면서 오늘날 에클레시아의 번역어로 사용하는 ‘교회’(kirche, l’église, church)가 탄생한다.

그후 ‘예수’는 교회를 주요 매개로 전승된다. 단 지중해 도시들에서 전개된 초기 예수운동의 장(fields)인 에클레시아에서 예수는 이야기(story) 형식이 아니라 ‘케리그마’ 형식으로 전승되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다. 그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신 분이기 때문이다.’ 같은 개념화된, 단언적 진술로 전승되었다.

아무튼 공동체조직가 역할의 부상은 예수 케리그마를 둘러싼 해석들, 거기서 발전한 교리(dogma)들이 지역성을 띠게 되는 요인이 된다. 이는 교회의 예수 해석과 교리는 협역(narrow zone)의 공동체 통합을 위한 이해의 체계들이지 광역(wide area)의 공동체 통합의 논리는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역의 논리로서 교리가 등장한 것은, 아주 단순화시키면,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제국종교로 활용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황제는 제국 통합의 종교적 원리로서 그리스도교를 활용했고, 이때 교리적 통합은 교회회의를 통해서 합의되었으며 제국의 공권력을 통해 구현되었다. 문제는 고대 제국의 통제능력은 현대의 국가들과 비교하면 너무나 느슨하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 교리적 통합은 대부분의 지역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통합의 정도가 크게 신장된 것은 근대의 대두와 더불어 찾아온다. 구텐베르크 문자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지식인 계층이 상당히 늘어나며, 그 지식의 생산, 축적, 유통의 센터가 되는 대학이 출현한 이후였다. 또한 근대국가적 국경이 등장하고, ‘국어’가 정착하며, 공교육이 실시되고, 교통과 통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종교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종교의 교리는 성직자(와 일부 지배층)만이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영역(종단과 교단) 내의 모든 시민들의 규범적 질서로 자리잡게 된다. 이제 교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주에 따라 종교적 시민(성도)이 탄생한다. 물론 이때 예수 교리가 형성・유통되는 장은 ‘교회’다. 하여 이제 ‘예수’, 곧 그리스도교의 예수 기억은 명실공이 ‘교회의 예수’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사진출처=pxhere.com

역사의 예수

대학이 등장했어도 교회는 한동안 유럽사회에서 지식과 권력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면 사회가 발생시키는 재화는 교회 밖에서 훨씬 더 크게 발생했다. 이는 교회를 매개로 하지 않은 권력의 등장을 뜻한다. 하여 유럽의 근대는 교회를 매개로 하는 권력들 상호간에 그리고 교회를 매개로 하지 않고 성장한 권력 간의 복잡한 갈등과 제휴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대학은 교회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교회를 넘어서려는 운동의 흐름 속에 있기도 했다.

교회는 전근대적 지식의 저장소였다. 그러한 지식에 토대를 두고 교회는 진리를 독점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전근대적 지식의 저장소라는 특성은 교회가 근대적 지식을 수용하는 데 심각한 장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교회의 지식은 근대의 여명과 더불어 불신의 대상이 되어갔고 그럴수록 교회는 신경증적으로 낡은 진리를 사수하는 데 집착했다.

대학은 근대적 지식이 형성되고 유통되는 곳이다. 따라서 대학은 교회의 지식을 무장해제하고 그 진리를 폐기하는 근대적 전쟁의 전면에 서게 된다. 이때 이 전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활용되었던 근대적 지식의 무기는 ‘역사학’이었다. 교회가 주장하는 ‘진리의 영원성’은 역사학 때문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진리는 원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시대의 산물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회적 진리가 구성된 시대 이전의 담론을 역사학이 재구성해내면서 원초적 진리를 새롭게 발견해냈다. 이렇게 하여 대학은 새로운 진리의 저장소가 되었다.

교회가 주장하는 진리의 가장 핵심이 '예수'였다는 점에서 ‘교회의 예수’를 공격하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교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학에서 벌어지는 진리 해체 및 재구성 운동이 이것을 빗겨갈 리는 없다. 역사적 물음을 통해 ‘교회의 예수’ 이전에 실재했던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를 발견하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교회는 가공할 권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하여 강력히 저항을 했으나 무너진 둑을 막을 길은 없었다. 점차 교회는 ‘역사의 예수’에 반대하기보다는 그 파괴력을 순화시키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래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길항적 요소를 절충한 새로운 진리체계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하여 대학과 교회는 전면전을 피했고 공존의 길을 발견했다. 이렇게 ‘근대적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근대적 지식이 된 ‘역사의 예수’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역사의 예수’는 근대의 역사비평학적 연구 도구를 통해 재현된 예수상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영역은 전문적 수련을 쌓은 소수의 전문가들‘만의’ 영역이다. 우선 성서 고전어들 및 그와 인접한 고전어들을 익혀야 하며,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테크닉을 활용하기 위한 학습을 해야 한다. 나아가 성서 시대 팔레스티나와 인접 지역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이런 지식의 기반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최소한 전문적 주석들을 읽을 수 있고 사전을 사용할 줄 알아야 어느 정도 독자적인 자기 생각을 감히 펼칠 수 있다. 요컨대 전문적 연구자가 아닌 다른 이들은 원칙적으로 역사의 예수 담론을 펴는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역사의 예수 담론은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결국 이것은 대중을 소외시킴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담론인 셈이다.

또한 역사의 예수 담론은 연구자라 하더라도 유럽과 북미 지역 출신이 아닌 사람들에겐 접근이 그리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전어에 대한 어려움이 심각하다. 이것은 사료들을 접하는 있어 치명적인 장애다. 다행히 고전어에 대한 언어적 장애를 다소 극복했다 하더라도 1차 사료를 포함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비문헌적 자료는 문헌자료에 비해 훨씬 더 접근하기 어렵다)에 접하기가 어렵다는 장벽이 뒤따른다.

나아가 현대의 중요한 연구서들을 구비한 도서관을 사용하기 어렵고, 다행히 필요한 서적을 입수했다 하더라도 영어,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저술된 책들을 골고루 읽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북미와 유럽 이외 지역 출신의 경우 전문 연구자들조차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 담론의 주체로 나설 수 없다. 즉 서구 연구자 이외의 연구자를 소외시키면서 이 담론은 그 상징 권력을 유지해왔다.​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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