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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를 목수라 부르는가?메시아 탄생과 ‘장벽 저편 사람들’의 기억-3
사진출처=성서문화교육원(culturalbible.com)

서기 6년 나사렛에서

〈루카복음〉 저자는 예수 탄생의 때를 다르게 기억하는 대중을 만났다. 그들은 시리아 태수 퀴리니우스의 인구조사 때 예수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서기 6년, 아르켈라오스가 자신의 영토에서 축출당한 직후다. 그런데 아르켈라오스의 영토는 사마리아-유대아-이두매아다. 갈릴래아의 촌읍인 나사렛과는 무관한 땅이다.

이 영토는 이제 로마 황제의 직속령이 되었다. 바야흐로 황제가 파송한 정무관이 다스릴 것이다. 그러니 인구조사란 새로운 통치자에게 필요한 조치였다. 한데 나사렛 사람들이, 설사 본적이 유대아의 베들레헴이라고 해도, 굳이 본적지로 가야할 일은 아니다. 갈릴래아는 헤롯의 다른 아들인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영토였다. 아마도 〈루카복음〉 저자가 팔레스티나 역사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데 서기 6년이라는 시간과 예수의 부모가 거주하는 나사렛이라는 장소를, 어설프게 엮인 베들레헴 여정 이야기를 빼고 바로 연결하면 의미심장한 역사적 힌트가 들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원전 4년 반란들이 진압된 직후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통치자로 위임된 안티파스는 통치가 안정기에 도달했을 때 잿더미가 된 세포리스를 자신의 수도로 건설하기 위해 대대적인 재건 사업에 착수한다. 이때가 바로 서기 6년이다. 폐허가 된 성벽을 다시 쌓고, 왕궁, 행정청, 무기고, 식량고, 은행, 성소 등의 건조물이 새로 축조되었으며, 적어도 4~5천 명을 수용할 만한 반원형 극장이 세워졌다. 꽤 큰 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그만큼 도시 건설에 동원된 대중의 피와 땀이 필요했다. 이 건설 현장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일은 직접적인 통제가 가능한 지역에 집중되었다. 세포리스 바로 이웃에 있는 촌읍 나사렛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10년 전 전쟁 당시 많은 가용노동력들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이후 늙은이와 아낙네들이 피땀 흘려 집을 세우고, 쑥밭이 된 땅을 농지로 개간하여 겨우겨우 살아갈 만하게 되었을 즈음, 왕명으로 동원령이 내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세포리스로 끌려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시 건설 과정에서 죽거나 불구자가 되었다. 부역으로 끌려나온 백성이 적절한 보상을 받았을 리 없다.

이렇게 나사렛은 이 무자비한 징발의 가장 대표적인 희생지의 하나가 되었다. 나사렛의 대중은 다시 심각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서 세포리스라는 곳은, 아니 도시라는 곳은 분명 씻을 수 없는 분노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적개심의 담론이 그들의 언어 곳곳에 스며 있었겠다. 물론 나사렛의 어린아이는 이러한 담론을 체득하면서 반도시적인 분노의 정치학을 몸속에 체득하며 자라났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말에서 도시에 대해 적대적인 뉘앙스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예언자로서 마지막의 예루살렘 진입을 제외하고는 도시에는 거의 들어간 적이 없다. 한편 사람들은 그를 ‘목수’(〈마르코복음〉 6,3) 또는 ‘목수의 아들’(〈마태오복음〉 13,55)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가 촌락 사회 내부에서 목수 또는 목수의 아들로서 인정되었다는 것일까?

이것을 말하고 있는 두 복음서는 이런 신상에 관한 정보가 나사렛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서 발설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예수가 목공적 기능이 남달랐다는 대중의 이미지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고향 외부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에 있을 법한 기억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우연히 고향에서도 그랬다는 이야기와 결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작은 촌읍에 전문직으로서의 목수가 존재했을 것 같지 않다. 또한 예수가 목수(의 아들)임이 언급되는 텍스트가 나사렛 사람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이 일화를 전승한 사람은 필시 나사렛 사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전승자가 고향 사람이 아니니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언급 속에는, 고향사람들의 생생한 이미지보다는, 그가 유달리 목공적 재주가 비상하다는 전승자의 인상이 스며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요컨대 대중은 그가 목공적 지식과 능력이 남달랐다는 집합적 기억을 갖고 있었으며, 이것을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점과 결부시켜 그가 그 마을의 목수였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시대 나사렛 사람들은 모든 것이 파괴된 상태에서 새롭게 삶을 세워가야 했기에 남들보다 건축 능력이 탁월했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 목공 능력도 발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세포리스의 재건 사업에 동원된 탓에 사람마다 건축에 관련된 각양의 기능에 숙달할 수 있었을 것이며, 예수의 아버지나 가까운 친척이 목수직을 맡았을지도 모른다.

 

John Everett Millais verk 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 från 1850.

그때 거기에서 메시아가 태어났다

나사렛의 대중은 세포리스의 재건과정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음으로 해서,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루카복음〉은 바로 이 시기에 메시아가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마태오복음〉이 메시아가 죽임당한 그곳, 모든 것이 그의 시체와 더불어 파괴되고 난 바로 그 시기에 메시아가 나서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면, 〈루카복음〉은 폐허로부터의 재건이 낳은 또 하나의 질곡이 집중되던 그곳 그 시기에 메시아가 태어나 자랐다고 그린다.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시기를 설정함으로써, 탄생에 얽힌 역사적 재건에 위기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탄생에 얽힌 두 전승을 구술한 전승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두 전승은 동일한 정서를 담고 있다. 즉 대중의 고난이 심화된 바로 그 현장 한가운데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 속에는 고난에서 해방되고픈 열망이 강렬하게 피어오른다. 그 열망은 로마나 헤롯체제 등과 같은 권력의 지배, 그리고 이 지배와 필연적으로 연계된 폭력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이런 기억과 연관된 시기와 장소에서 예수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오히려 예수가 이 시공간과 아무런 관계없는 존재로서 기억되었다면, 그 탄생신화는 매우 어색한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사렛에 얽힌 탄생 이야기에서 예수와 전승 대중 사이에는 어떤 의사소통의 맥락이 있었을까? 이 탄생신화는 예수와 대중이 일으킨 일련의 사건의 대략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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