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또 한 명의 광야수행자, 요한과 같거나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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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또 한 명의 광야수행자, 요한과 같거나 다른
  • 김진호
  • 승인 2019.06.0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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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광야 수행➜갈릴래아

베레아 쪽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예수는 광야에서 40일간 수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갈릴래아에서 독자적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니까 요한이 주도한 운동의 일원이었다가 예수가 독자적 운동의 주역이 되는 그 사이에 광야 수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순서는 세 복음서 모두 같다. 그러니까 예수가 독자적 활동을 시작하는 근거가 광야 수행이었다는 얘기다. 그것으로 예수가 요한에 버금가는 존재라는 점이 널리 인정된다는 것이겠다. 이는 대중에게 ‘광야 수행자’라는 상징적 행위가 그만큼 강렬하게 다가갔음을 시사한다. 요한이 그것으로 ‘부활한 엘리야’로 받아들여졌듯 예수도 그것으로 ‘부활한 요한’이 될 수 있었다.

아래 도표는 세 복음서에서 예수의 광야 수행기 전후의 문맥을 비교한 것이다.

 

이 표에서 보듯 ③을 제외하면 세 복음서는 순서가 동일하다. 그 내용도 마태오(Mk)와 루카(Lk)가 큰 틀에서 마르코(Mk)를 따르고 있고, 단지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두 겹치는 부분에서 마르코(Mk)의 ‘성령 세례’를 마태오(Mt)와 루카(Lk)에선 ‘성령과 불의 세례’로 바뀌어 있는데, 이것은 중요한 차이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편 마르코(Mk)의 내용을 마태오(Mt)에만 병행되는 경우도 있는데 요한이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허리띠를 두르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는 얘기가 그런 경우다. 반면 마르코(Mk)에는 없는데 마태오(Mt)와 루카(Lk)가 겹치는 내용을 갖는 경우도 있는데, 요한이 사람들에게 “......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는 심판의 말이 그렇다. 다만 두 복음서는 그 청중을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마태오(Mt)에선 세례를 받으러 온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인 반면, Lk는 ‘세례를 받으러 온 무리’라고 말한다.

그 외에 마르코(Mk)에는 없고, 마태오(Mt)와 루카(Lk)도 서로 공유하지 않는 내용들도 있다. 가령, 루카(Lk)는 요한의 활동 시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복음, 3,1-2) 이 각각의 시간들의 공집합은 서기 26~36년이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 요한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얘기다. 예수가 처형당한 때도 그 사이니, 요한과 예수의 대중예언자로서의 활동 시기는 26~36년 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마태오(Mt)와 루카(Lk)는 기본 골격에선 마르코(Mk)를 따르고 있는데, 그중에서 요한보다 예수가 우월함을 주장하는 부분들, 그러니까 그리스도파의 변증론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제외하면 요한이 죄를 사면하는 회개의 징표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①),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②), 예수가 광야에서 수련을 했다는 사실(④), 그리고 예수가 갈릴래아로 왔다는 사실(⑤), 이 세 가지 사실이 이야기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중 ②에서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이가 요한의 운동에 동조했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한 동조자가 아니라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베레아까지 왔으니 꽤나 열렬한 지지자임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⑤에서 예수가 갈릴래아로 왔다는 건 좀 뜬금없어 보인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는 무수히 많은데, 그중의 한 사람인 예수가 세례 직후 갈릴래아로 갔다면 그이가 대중으로부터 그렇게 빨리 ‘제2의 요한’처럼 받아들여졌다는 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바로 그래서 ④가 필요하다. 그이는 세례를 받은 직후 40일간 광야에서 혹독한 수련을 거쳤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보았듯이 광야의 예언자는 엘리야를 상징한다. 물론 엘리야가 광야 수행자였다는 전승은 명시적이지 않다. 다만 그가 털이 많고 가죽허리띠를 매고 있었다고 말하는 〈열왕기 하〉 1,8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광야에서 활동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널리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요한 이전까지 광야 수행자라는 것이 엘리야의 중요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요한과 예수의 시대에는 과거를 회상하는 ‘역사문화’(Geschichtskultur)적 요소로 ‘광야 수행’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해 북서쪽의 광야지역인 쿰란(Qumran)의 수도자 공동체가 그 시대에 2세기 동안이나 오랫동안 제법 큰 규모로 지속될 수 있었다는 건 그러한 수행자 현상이 적잖았다는 걸 시사한다. 그래서 요한이 광야 수행자의 모습으로 엘리야를 연기한 것은 대중이 그에게서 부활한 엘리야를 기억하게 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으로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도 광야에서 혹독한 수련을 했다는 소문 혹은 이미지는 대중으로 하여금 그에게서 ‘다시 온 요한’, 나아가 ‘다시 온 엘리야’를 떠올리는 데 중요한 기억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위의 도표에서 보듯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할 때 그이가 ‘요한 부활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이도 요한처럼 광야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다섯 단계로 정리한 예수이야기의 초기 단계에 관한 대중의 기억들 중 ‘광야 수행’ 이야기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모레토 다 브레시아, <광야에서의 그리스도>

광야 수행자 예수

위의 도표에서 ④에 해당하는 세 복음서 텍스트도 전후 문맥들처럼 큰틀에서 마르코(Mk)의 골격을 따르고 있다. 그 골격은 세례를 받은 뒤 예수는 광야에서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악마와 사투를 벌였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예수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갈릴래아 활동기 이후 그에게선 광야 수행자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대중이 아는 한 그는 광야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심지어 수행자다운 금욕자의 면모는 없고 ‘먹보요 술보’라는 이미지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뒤 그이는 광야 수행자로서 악령과 사투를 벌인 끝에 영적 승리를 거둔 주역이라는 것이다. 이 텍스트들은 바로 그것을 모두 말하고 있다.

다음은 세 복음서에서 예수의 ‘광야 수행’ 이야기들을 비교한 것이다.

 

이 표에서 보듯 마태오(Mt)와 루카(Lk) 골격에서 마르코(Mk)를 따르고 있지만 수행 중에 일어난 영적 전투에 대하여는 긴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중첩되고 있다.

마태오(Mt)와 루카(Lk)는 모두 세 번에 걸친 ‘악마’(ὁ διάβολος; 4,3에서는 ‘시험하는 자’[ὁ πειράζων]) 대 예수의 대결이 묘사되고 있는데, 순서만 다를 뿐(마태오(Mt): [A]→[B]→[C] / 루카(Lk): [A]→[C]→[B]) 내용은 대단히 유사하다. 이것은 광야 수행이 역사문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기억소인 만큼 일찍부터 짜임새 있게 형성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전투에서 악마는 예수에게 돌을 빵으로 바꾸라고 한다. 놀랍게도 악마의 요구는 엘리야의 행적을 연상케 한다. 〈열왕기 상〉 17,8~24에 의하면 엘리야는 페니키아 남부의 사르밧(Zarephath)이라는 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과부인 여성과 그녀의 아들에게 뒤주 속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도 마르지 않았게 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다시 온 엘리야로 알려질 그이는 광야 수행 중에서 뜻밖에도 악마에게서 엘리야처럼 하라는 요구에 직면한다. 돌을 빵으로 바꿀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굶주리는 이들이 사라질 것이 아닌가, 이렇게 악마가 유혹하고 있다.

둘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당연히 하느님께서 편들어 줄 것이니 걱정할 것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유혹은 세상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꿈꾸는 신권사회가 실현될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이 세 유혹을 종합하면, 식량과 종교와 권력자원을 지배하는 자임을 보이라는 것이겠다. 모든 자원을 독점하는 권력이라고 하면 악마의 속성 바로 그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권력의 주인이 되어서 원하는 것을 뭐든 해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뿌리치기 쉽지 않은 달콤한 유혹일 것이다. 이 텍스트는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겠다.

이 전승은 예수가 권력에 의해 죽임당한 뒤에 권력에 대한 대중의 뼈저린 성찰의 흔적을 시사하고 있다. 대중은 예수가 요한이고 엘리야라고 믿었다. 곧 그이는 신의 나라를 구현할 메시아라고 말이다. 그이는 하느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불의한 체제를 전복시킬 것이고 그이를 따르던 민중이 주역인 나라를 이룩할 것이다. 한데 그이가 죽었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들의 꿈도 죽었다. 그런데 그이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도대체 그이가 죽지 않았다는 게 뭘까. 그이가 부활했다는 것으로 무엇이 이룩되었는가. 배고픔이 사라졌는가, 종교가 새로워졌는가, 세상 권력이 바뀌었는가.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그런데 그이가 살아났다고 한다. 그런 고민의 결과로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힘으로 이룩한 것은 악마의 유혹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아닐까. 대중은 예수를 통해 그것을 깨달았고, 그런 깨달음을 예수에게 투영한 것이 바로 광야 수행자로서 예수가 겪었다는 악마의 시험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대중에게 많은 것을 말했고 행했으며, 심지어 죽음을 통해 많은 것을 암시했다. 대중은 그런 그이를 회상하며 그이가 명료하게 말하지 않은 것을 채워 넣는다. 그이의 모습을 그리는 화폭 속에 말이다. 광야 수행자 예수의 시험 장면은 이렇게 그려졌다.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산꼭대기 그리스도의 유혹>

후기: 실재했을 법한 예수의 광야 수행기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수많은 대중은 이제 떳떳한 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떠나가지 않고 요한의 주변에 남아서 그와 더불어 하느님나라 운동을 추동하는 자가 되고자 했다. 그들은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대신 광야에 계속 남아 요한처럼 수행을 했다. 광야 곳곳에서 홀로 혹은 몇 명이 그룹을 지어 혹독한 수행을 했다.

40일을 단식했다. 이스라엘 전승에서 '40'은 전환의 시간이다. 모세는 41세에 히브리인들을 돌보는 자로 나서기 시작했고, 부족동맹시대 말기의 대제사장 엘리는 40년간 판관으로 활동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40살에 왕이 되었고, 유다국의 왕으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이 되었으며, 유다국의 왕 다윗과 요아스는 40년간 백성을 다스렸다. 또 이삭과 에서가 결혼한 나이도 40세였다. 같은 맥락에서 태형을 가할 때도 40대를 넘겨서는 안 되었다. 그만큼 맞으면 죄인은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40은 야훼 성전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성막을 바치는 널빤지의 밑받침으로 은 40개가 사용되었고, 성전 앞뜰의 놋대야에는 물 40말이 담겼다. 에제키엘이 꿈꾼 새로 세워질 상상의 성전 뜰의 길이는 40자였다. 즉 40일을 단식한다는 것은 생과 사의 분절점까지 간다는 것이며, 그렇게 수행한 이는 하느님의 공간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는 뜻이겠다. 즉 그 기간의 단식은 그이의 광야 수행이 충만했다는 것을 시사했다.

그렇게 예수는 세례를 받은 뒤 광야에서의 단식 수행을 통해 요한의 운동 중심부로 진입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 베드로-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요한 형제 등, 가파르나움 출신 동지들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후 예수가 주도한 운동의 최측근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요한이 안티파스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 여론을 부추긴 것 때문에, 그의 운동이 당국에 의해 처절하게 짓밟혔다. 바로 그때 예수를 포함한 동지들 상당수가 갈릴래아로 왔다. 바야흐로 새롭게 운동을 시작할 시간이 된 것이다.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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