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한 남자와 거지떼 같은,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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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남자와 거지떼 같은,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
  • 김진호
  • 승인 2019.08.18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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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메시아 ― 예루살렘 유월절의 정치학-3

그들이 예루살렘 곧 올리브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왜 그러는 거요?’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 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 (마르 11,1-6)

우선 예수일행이 가장 먼저 은거지를 정한 곳이 올리브산임을 알아야 한다. 그곳은 단순한 산속이 아니다. 왜냐면 묵시적 텍스트인 〈스가랴서〉에 기록된 것처럼 이런 전승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에 주님은 예루살렘 맞은편 동쪽에 있는 올리브산 위에 발을 딛고 설 것이다. 그러면 올리브산은 반으로 갈라져, 동서로 뻗은 매우 넓은 골짜기가 생기고, 그 산의 반쪽은 북쪽으로, 다른 반쪽은 남쪽으로 움츠러들 것이다.(즈카르야 14,4)

그곳은 변혁이 시작되는 장소다. 그곳을 예수일행은 예루살렘에서의 활동 거점으로 정했다. 이곳은 배신자가 제보할 때까지 전혀 당국에 의해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이런 곳을 예수는 어떻게 알았을까. 예루살렘에 초행인 그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은신처를, 더구나 그곳이 아무 곳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묵시담론과 부합하는 장소여야 하는데, 그런 곳을 어떻게 단박에 알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을 잘 아는 누군가가 예수 주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추종자의 일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추종자는 아니지만 예루살렘을 잘 아는 예수의 지지자 아무개일 수도 있다.

그렇게 활동 거점을 정한 예수는 제자 둘을 마을로 보내서 나무에 매여 있는 어린 나귀를 가져오라고 한다. 왜 가져가느냐고 누군가 물으면 주께서 쓰신다고 하라고 당부하면서. 그러면 사람들이 순순히 그 나귀를 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되었다.

이 얘기는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협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추정하게 한다. 그렇다면 앞의 올리브산 모처에 거점을 알려준 이도 그런 미지의 협력자 덕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무도 타지 않았던 어린 나귀’다.

차독 사제가 기름 담은 뿔을 천막에서 가져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고 나서 나팔을 분 다음, 모든 백성이 “솔로몬 임금 만세!” 하고 외쳤다. 모든 백성이 그의 뒤를 따라 피리를 불고 올라가며 큰 기쁨에 넘쳐 환호하였는데, 그 소리에 땅이 갈라질 지경이었다. (1열왕 1,38-39)

유다국의 전설적인 군주 솔로몬이 제왕으로 등극하는 것에 관한 전설에 ‘노새’가 등장한다. 한데 그 전승이 훗날 묵시문서 속에서 메시아 도래의 징표로 재해석되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즈카르야 9,9-10)

바로 이 묵시적 대중전승을 예수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여 그는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아무도 타본 적이 없는 새끼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퍼포먼스를 도모한다. 그걸 위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누군가의 조력을 받았던 듯하다.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마르 11,7-10)

새끼나귀를 다 큰 어른이 타고 간다. 올라탄 어른의 다리가 질질 끌릴 만큼 작은 나귀다. 그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자신의 겉옷을 길에다 폈다. 예수가 탄 나귀가 그 위를 갔다. 두 번째 행위는 구호다. ‘호산나, 다가올 다윗의 나라여, 호산나.’

키가 9척(2m 이상)에 수염이 2자(약 50cm)나 되는 범상치 않은 외모에 80근짜리(약 50kg)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천하의 명마 적토마를 타고 입성한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보면 메시아의 입성쯤으로 생각했겠다. 한데 거지 차림의 남자가 다리가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어린 나귀를 타고 간다. 그런데 그를 따르던 일당이 자신의 겉옷을 바닥에 깔면서 메시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 우스광스러운 장면을 본 로마의 군인들은 비웃었을 것이다. 또 대중전승을 모르거나 무시했던 이스라엘의 엘리트들도 조롱의 마음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예후가 자기 주군의 신하들에게 돌아오자 그들이 물었다. “괜찮소? 그 미친 녀석이 왜 장군에게 왔소?” 예후는 “그가 어떤 자이고 어떻게 말하는지 알지 않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거짓말! 자, 털어놓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후는 “그 사람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면서,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임금으로 세운다.’고 말하였소.” 그러자 그들은 재빨리 저마다 제 겉옷을 벗어 예후의 발밑 층계에 깔고는 나팔을 불며, “예후께서 임금님이 되셨다!” 하고 외쳤다. (2열왕 9,11-13)

시리아군과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국의 대장군 예후에게 엘리사 예언자가 보낸 사람으로부터 ‘하느님이 새 왕으로 선택했다’는 신탁을 받는다. 이 얘기를 들은 그의 휘하 장수들이 자신의 옷을 예후 대장군의 발 아래 깔았다. 그것은 왕에게 신하들이 하는 중요한 예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현 왕조의 학정을 심판하는 혁명의 신탁에 대한 추종자들의 상징행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주목할 것인가. 새끼나귀 위에 올라탄 허접한 남자와 거지떼 같은 일행이 하는 메시아 놀이를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예사스럽지 않게 보았다. 유월절이 변혁의 시간이라고 믿는 메시아 대망 신앙을 가진 이들의 정치학을 공유하는 이들에게는 말이다.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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