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의 성모: 하느님께 속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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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의 성모: 하느님께 속하기
  • 한상봉
  • 승인 2018.05.29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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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이콘 묵상-3

<블라디미르의 성모> 이콘 앞에서 헨리 나웬은 “우리는 누구에게 속하나?” 묻는다. 우리가 주로 이야기 하고, 고민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건과 사람들은 우리가 진정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드러낸다. 이 이콘은 강압적이고 분열된 세상의 환경을 떠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일치시키는 하느님의 환경 속으로 들어오라고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초대한다.

‘온유의 성모’라고 불리는 <블라디미르의 성모>는 12세기 초에 어느 그리스 화가가 그린 것으로, 118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에서 키에프로 옮겨졌다. 당시 러시아는 타타르 몽골의 침입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블라디미르의 성모>가 러시아를 수호하는 힘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약 20년 뒤에 이 이콘은 키에프에서 블라디미르로 옮겨졌다.

1395년에는 타타르 몽골의 침입에 위협을 느낀 모스크바 공국의 유리 돌고루키가 <블라디미르의 성모>를 모스크바로 옮겨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이 이콘이 모스크바에 도착한 바로 그날부터 타타르 몽골이 러시아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러시아인 사이에서 이콘이 기적의 힘을 지녔다는 대중신심이 자라난 이유이다. 그 후 지난 6세기 동안 이 이콘은 모스크바에 있었으나 여전히 <블라디미르의 성모>라 불린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12세. 비잔틴 이콘. 100x 70 cm.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챠코프 미술관.

1. 성모님의 시선

<블라디미르의 성모>는 성모님의 중재로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중세 사람들에게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가장 쉽고 가깝고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헨리 나웬은 이 성모님과 친밀한 느낌을 받으려고 눈을 맞추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러시아의 다른 성모상들이 친근한 눈길에 끌려 서로 관계 맺게 하지만, <블라디미르의 성모>의 성모님 시선이 정면을 응시하지 않기 때문에 이 현실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분은 오히려 우리더러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한다.

“그 눈은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지나가는 것 안에서 영속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 안에서 신적인 것을 본다. 그 눈은 기쁨과 슬픔이란 두 감정이 더 이상 상반되지 않고 영신적 일치 안에서 초월되는 저 마음속의 무한한 공간을 응시한다.”(헨리 나웬)

마리아의 눈길이 지닌 의미는 이마와 양 어깨에 있는 환한 별 때문에 한층 강조된다. 그 별은 예수의 탄생 전에도, 탄생 때에도, 탄생 후에도 동정이셨던 마리아의 ‘동정성’을 상징한다. 이는 마리아의 존재 깊숙이 스며든 분이 오직 하느님뿐임을 상징한다. 마리아는 성령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고 있기 때문에, 그분의 동정성이 오히려 그분의 모성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테오토코스(Theototokos), 즉 “하느님을 낳은 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성모님의 눈길은 특출난 아이를 가졌다고 뽐내는 어머니의 눈길이 아니다. 그분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성모님은 몸 안에 하느님을 잉태하기 전에 마음속에 하느님을 잉태하고 계신 분으로 전례 안에서 찬양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품에 안긴 아이의 시선을 통해서만 성모님의 눈길과 마주칠 수 있다.

2. 성모님의 손

<블라디미르의 성모>에서 성모님은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있고, 다른 한 손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손을 펴서 초대의 손짓을 하고 있다. 단순히 당신의 아들을 바라보라고 청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한테 아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 손은 우리에게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오라고, 그래서 우리가 속한 하느님을 발견하라고 부드럽게 초대하고 있다.

비록 이콘에서 성모님이 중심부를 차지하고 계시지만, 기도하는 눈으로 바라보면, 성모님의 존재는 오로지 전적으로 그 아이를 위해 거기 계시는 것이다. 수태한 마리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었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나이다.”(루카 1,46-47)

성모님은 마치 “나는 다만 너를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성모님의 손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어떤 공간을 열어주는 손이다. 그 어머니는 슬픔으로 가슴이 찔리셨던 여인이다.

“성모님은 가난하고 억압받고 피난민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앞날이 불확실하고 당황하게 된다는 것이, 따돌림을 받는다는 것이, 십자가 아래 서 있다는 것이, 그리고 어느 누구하고도 나눌 수 없는 생각과 느낌을 품은 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신다. 이러한 고통이 그 두 눈에 그리고 두 손가짐 속에 섬뜩하게 하는 고통으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인내의 표지로서 맴돌고 있다.”(헨리 나웬)

그러기에 성모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아드님에게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괴로워하는 모든 남녀에게 어머니이시다. 성모님은 우리를, 고통스러워하는 백성을 예수님께 오라고 초대하신다. 그러나 성급한 손짓으로 다그치지 않으시고, 다만 우리의 두려움과 머뭇거림과 고민과 의심과 불안을 환히 아시는 분으로서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예”(fiat)라고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참을성 있는 어머니이시다. 이처럼 성모님은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길이신 예수님에게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3. 빛이신 예수님과 세상의 만남

그러나, 또한 그래서 <블라디미르의 성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성모님이 아니라 사실상 빛나는 얼굴에 황금빛 옷을 입고 성모님의 굽은 선 안에 “숨어” 계시는 예수님이다. 묵상을 더할수록 그분의 어머니는 거룩한 분을 소개하고 뒤로 물러나 계심을 볼 수 있다. 이콘에서 예수님은 아기가 아니라 지혜로운 성인 남자이다. 그 아이의 내부와 외부는 온통 빛이다. 주위에 어둠이라곤 없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선언한 것처럼, “하느님께로부터 나신 하느님, 빛으로부터 나신 빛,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이다. 찬란한 빛이 이콘의 오른편에서 내려와 마리아의 콧등을 부드럽게 스치면서 아이의 얼굴에 내려앉는다.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이 거룩한 아이는 마리아에게 자신을 온전히 주고 있다. 그의 팔은 마리아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고, 그의 시선은 마리아한테 고정되어 있고, 입은 마리아의 입 가까이서 그의 거룩한 숨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아기 예수는 자신의 모든 신적 지혜를 어머니께 드린다. 한편 성모님이 주시는 모든 것 역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들인다. 어머니로부터 오는 고통받는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있다.

이처럼 성모님의 눈은 우리가 주의를 돌려 성모님의 손을 보게 하고, 성모님의 손은 아이를 보게 하며, 그 아이는 모든 인류의 이름으로 당신 아들에게 이야기하시는 어머니에게로 다시 주의를 돌리려 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성모님을 매개로 세상과 만난다.

마리아와 아이는 사각 틀 안에서 들어 있는 삼각 형태 안에 그려져 있다. 사각형 틀은 죄와 악의 세력에 사로잡힌 세상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는 세상이다. 강생의 신비가 그려져 있는 삼각형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이신 하느님의 구속하시는 현존을 드러낸다. 비록 성부는 직접 볼 수 없지만, 삼각형 형상 안에 원형으로 자리잡는다.

<블라디미르의 성모>는 예수님이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설명한 도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참고]
<러시아 미술사>(이진숙, 민음인, 2007)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이주헌, 학고재, 2006)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헨리 나웬, 분도출판사, 1989)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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