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누추함이 오히려 아름다운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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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누추함이 오히려 아름다운 ‘신앙’이다
  • 한상봉
  • 승인 2016.12.0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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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어루만지다] , 김사인, 도서출판b, 2013

예전에 김사인 시인으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시를 어루만지다>(도서출판b, 2013). “큰 문예지나 문학사의 물망에 이름이 오르지 않거나 시류에 초연한 시인들은 숫제 없는 사람 취급” 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시장과 문학저널리즘에서 비껴나 있는 시인들의 시편만 골라서 묶어낸 책이다. 김 시인은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라 했다.

김사인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제였을까. 헤아려보니, 잡지 <공동선>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서울을 탈출해 전라도 무주에 집을 얻어 살 때였다. 대충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공동선>을 가톨릭 정론지에서 종교잡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가, 기획위원으로 초빙된 소설가 김성동 선생과 김사인 시인을 한꺼번에 뵈었다.

김성동과 김사인, 그 고즈넉한 만남 

김성동은 내 유년과 청년시기에 <만다라>와 <피안의 새>로 이어지는 종교적 열정에 갈증을 더해준 분이었다. 글로만 뵙던 김성동 선생에게 황감한 마음으로 인사를 올렸다. 그 참에 뵈었던 김사인 시인은 수줍은 처녀와 같이 잔잔하게 웃고만 계셨다. 그분과는 말 한 마디 섞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후 십 수 년 만에 경인미술관에서 두물머리예술전을 할 때 다시 뵌 김성동 선생은 나를 기억하고 손을 잡아주셨다. 그 기억력이란!

“김사인 절”이라니! 이런 공경의 마음이 누구에게나 번지고 있는가 보다. 사진=한상봉

생전에 딱 한번 우연히 스쳐지나간 김사인을 나는 잊지 않았다. <시를 어루만지다> 속지에 박혀있는 시인의 얼굴 그대로, 그분의 시집과 산문집은 늘 내 마음을 위무해 주었다. <밤에 쓰는 편지>에서 시인은 “시를 쓰자고 종이를 펴면/들리더라 겨울바람 소리 비틀거리는 걸음 소리 가파른 낙곡 언덕 리어카 끄는 소리 언 땅을 파는 곡괭이 소리”(시를 쓰며 2)라고 썼다.

항시 아래로만 흐르는 시선을 가누지 못해 ‘예언서 1’이란 시에선 가난한 이들을 팔아넘긴 이교도들에 대한 마지막 사랑으로 “눈물에 적셔 칼을 간다”고 전했다. 요즘에도 성전에서 가련한 백성을 팔아 돈을 얻는 사제들이 없는 게 아니라서, 가슴 한켠이 시려온다. 

방언 기도를 올리는 자들아
잘린 혀 말 못하는 한으로
이 강가에서 나는 너희를 위해 울었다
이교도에게 몸을 팔아
너희들 값진 패물과 향유로 치장하고
낯선 우상 앞에 엎드릴 때
배다른 네 형제들은 눈 덮인 벌판에 버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신전에서 두 무릎 꿇고
너희들 하늘과 땅에 가득한 은혜를 입 모아 찬양할 때
너희 살진 포도밭 앞에 네 형제들은
허기진 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제 들어도 듣지 못하는 너희들을 위하여
보아도 볼 수 없는 너희들을 위하여
눈물에 적셔 칼을 간다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사랑으로
차마 저버릴 수 없는 너희 혼을 위하여

시를 만나러 가는 길

그분이 얼핏 스쳐간 인연을 기억해 책을 주시니, 습관처럼 나는 4B 연필을 깎아 귀한 글을 어루만지듯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김사인은 “시 쓰기는 제 할 말을 위해 말을 잘 ‘사용하는’ 또는 ‘부리는’ 데 있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시 공부는 말과 마음을 잘 ‘섬기는’ 데 있고, 이 삶과 세계를 잘 받들어 치르는 데 있다”고 말했다. 결국 “종교와 과학과 시의 뿌리가 다르지 않으며, 시의 기술은 곧 사랑의 기술이요 삶의 기술”이라고 말했다.

시를 어루만지는 마음은 백성을 어루만지는 그분의 손길과 다를 바 없겠다. 공경의 마음으로 그분을 대하고 시를 모신다. 사진=한상봉

이런 시인에게 윤동주의 ‘서시’는 특별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를 두고 김사인은 “여리고 순결한 한 젊은 영혼이 놓여 있는 외로운 처지와 그가 스스로에게 울리는 간절한 기도가 정맥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하게 전해져 오지 않는가” 묻는다. “우리의 영혼조차 맑아지는 듯한 느낌,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될 것 같은 숙연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물으며, 이런 시를 낳은 힘의 정체를 진심으로 궁금해 하는 일이 ‘시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사랑이 투입되어야” 제대로 읽히는 시. 신앙도 그러하겠지. 김사인은 시를 제대로 읽어보려면, “시 앞에서 일단 겸허하고 공경스러워야 마땅하다”고 지적한다. “그래야 내 마음의 문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한 편의 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목소리와 빛깔과 냄새들이 나에게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 성경을 읽거나 하느님을 묵상할 때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싶다. 이러니 시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과 흡사할 테다. 더군다나 시에는 ‘한 인간의 절실함’이 배어 있고, 이 절실함에 대한 정서적 공감과 일치에 이르면 “시가 일어나고” 그분도 우리 안에서 생생하게 부활할 테지.

목숨 가진 것들의 가장 애잔한 부위를 살펴

김사인이 가려 뽑은 시 가운데 세 편이 가장 먼저 눈에 다가온다. 김종삼의 ‘묵화(墨畵)’, 이성선의 ‘별을 보며’, 문정희의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다.

<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도서출판b, 2013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묵화’)

이 시를 두고 김사인은 감상조차 틈입할 겨를이 없는 고단한 삶을 고요히 견디어 가는, 그래서 발잔등이 부운 채 목숨 가진 것들의 가장 애잔한 부위인 소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있는 할머니를 통해, ‘수고로운 자의 공덕’을 느낀다.

또한 김사인은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라고 노래한 이성선 시인을 보면서 “윤동주 이래 선량한 영혼이 또 있었구나” 찬탄한다.

이성선은 ‘별을 보며’라는 이 시에서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바라보던 너 눈물 같은 빛남/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라고 한다. 그에게 허용된 것은 ‘가난’뿐인데, 그 허무함을 버텨낼 힘을 시인은 ‘별을 보며’ 얻을 수밖에.

한편 문정희 시인은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허공을 두드리며”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숨죽여 홀로 운 것”도 그때였다. 그러니 김사인은 “슬프게도 ‘입술’을 가진 존재들이라면. 한 번은 서해 바닷가 어디로 떠나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볼 일이다. 그때 입술 새로 무슨 말이 새어 나오는지 들어볼 일이다”라고 권한다.

김사인이 가려 뽑은 시들 속에서도, 자신이 직접 지은 시어에서도 한 움큼 배어나오는 것은 ‘쓸쓸함’이다. 숨죽여 제 길을 밟아가는 삶이다. 소리 없이 제 수고로 공덕을 쌓는 사람들, 입술 사이로 ‘사랑한다’는 말이 새어나오든, 그 소리마저 들리지 않아도 ‘이미 사랑하고 있을’ 삶을 전한다. 늘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것들 사이에서 공경을 배우는 ‘시의 마음’이다. 누추함이 오히려 아름다운 ‘신앙’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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