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를 당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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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를 당구처럼
  • 김선주
  • 승인 2024.06.1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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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장은 탈선의 비탈길에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당구장에 들랑거리는 애들 치고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애들은 없었다. 삐딱선을 타는 애들 대부분은 당구장으로 미끌어졌다. 나에게 당구장 이미지는 이런 것들이었다. 반라의 젊은 여자가 방탕하고 요염하게 웃고 있는 벽걸이달력, 담배를 꼬나문 불량한 미성년 고딩들, 아무렇게나 구석에 처박힌 짜장면 그릇, 상스럽고 저질스러운 욕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한량들, 당구장의 이런 이미지들은 나 같은 범생이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가난한 부모의 등골을 빼서 그런 타락한 공간에서 유흥을 즐기는 것은 나에겐 죄악이었다. 갑각류 같은 모태신앙의 단단한 껍질 안에서 바라본 당구장은 마녀의 겨드랑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당구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십대를 영적 숫총각으로 보냈다.

내가 대자보를 쓸 때 친구들은 당구장에 있었다. 내가 니체와 사르트르를 읽을 때 친구들은 당구장에 있었다. 내가 길거리에서 최루탄에 눈물 흘릴 때 친구들은 당구장에 있었다. 내가 길바닥에서 개처럼 끌려갈 때도 친구들은 당구장에 있었다. 80년대 대학가에 당구장은 속물들의 성지였다. 대학가에 분식집과 막걸리집 다음으로 당구장이 많았다. 오래된 빤스 고무줄처럼 헐렁거리는 청춘들에게 당구장은 천국으로 가는 개구멍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지옥으로 가는 개구멍이었다.

우리 교회 권사님 중 한 분이 몇 달간 직장을 쉬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평생을 성실하게 일만 하며 살아온 사람이라 삶을 즐길 줄 모른다. 그와 함께 놀아줘야 할 의무가 몇 달 간 나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그가 오직 할 수 있는 오락이라는 게 당구였다. 그래서 현직 프로 당구선수로 활동하며 당구장을 운영하는 우리 교인을 찾아가 당구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한두 달 당구장을 들락거리며 느낀 게 예전 당구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곳은 매우 깨끗했고 사람들은 상스러운 말도 내뱉지 않았다. 째즈와 샹송이 흘러나왔고 시원한 음료가 제공됐다. 내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저급한 유흥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구는 이제 하나의 스포츠이고 교양이었다.

당구를 배우면서 나는 지적 희열을 여러 번 느낀다. 이것이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몸과 머리를 함께 써야 하는 것이고, 매우 정적이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요한다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특히 당구에서 기하학과 확률, 고전물리학의 역학 관계까지 경험한 것은 신대륙의 발견만큼이나 내게 큰 희열을 주었다. 이렇게 교양미 넘치는 스포츠가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당구는 매력적이다. 속도와 운동, 중력과 마찰, 각도와 힘을 계산하고 그 지적 논리에 근육과 관절이 협업하여 적합한 운동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학문처럼 논리적이고 예술처럼 심미적이다. 아름다운 스포츠다. 이렇게 아름다운 스포츠를 나는 저급한 오락으로만 봤었다. 당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저급한 유흥 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 밖에서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의 문제도 이와 같다. 그리스도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저급한 종교 장사꾼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다.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없어서 오늘날 이 모양이 된 것이다. 당구를 배우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교를 다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교회 교회학교 성경공부 교재를 내가 만들어 쓰고 있는데 이것이 원고가 충족되면 한 권의 성경공부 교재로 만들 셈이다. ‘지성인을 위한 기독교 문해력 공부’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인문학 콘텐츠를 활용하여 성서에 접근하고 오늘날 인간과 사회가 맞닥뜨린 문제와 현상을 성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귀납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하느님, 성경, 성령, 은혜, 구원, 사랑 같은 교회 언어가 아니라 경계 밖의 언어들을 활용하여 하느님과 성경과 성령과 은혜와 구원과 사랑 같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치를 이해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교회는 세상과 단절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내재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이고 응답이며 인간 문제의 우주적인 현상에 대한 이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당구처럼 세련된 지성과 예술적 감동을 갖지 않으면 저급한 종교적 유흥거리로밖에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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