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은 본래 나그네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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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은 본래 나그네의 집이다
  • 최태선
  • 승인 2024.06.1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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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얼마 전 나는 장소가 중요하다는 글을 하나 썼다. 돌이켜보니 우리 교회에는 장소가 없었다. 아니 장소가 가지는 의미를 너무 간과했다. 물론 교회의 본질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는 사람에 대한 강조가 장소를 아예 제거해버렸다.

또 다른 이유는 콘스탄티누스의 성당 개념이다. 그는 라테란 성당을 비롯하여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을 네 개 지어 교회로 모이게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부름 받은 사람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 혹은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이라는 사람에 대한 중요성을 잠식했다.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하면 건물을 떠올리게 되었고, <아르나우의 성전>과 같은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건물인 교회를 짓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최대의 과제로 삼게 되었다. 어느 도시에든 도시의 중심에 교회 건물이 가능한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졌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교회가 사람중심이 아니라 건물 중심이 되면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가 사라졌다. 특히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나야 할 곳으로서의 교회가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심판하는 곳이 되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인간성을 말살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교회 하면 건물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성전이라 부른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본당이라는 말 역시 사용하고 있다. 본당은 그리스어 '파로이키아'다. 이 단어의 동사형인 '파로이케인'은 '이웃에 살다', '곁에 서다', '∼에 나그네로 살다', '이방인으로 살다' 등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국 본당이란 나그네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근본적으로 나그네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 사실 역시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집 있는 자와 땅 있는 자들이 그것을 팔아 사도들의 발아래 가져다 둘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이 나그네와 난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예전 백성들이었던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 내가 주 너희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외국인 나그네로 양육하셨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들의 정체성이 가장 힘들고 천한 사람들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오래도록 노예가 되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험악한 삶을 살아야 했다. 아이를 낳으면 죽여야 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그것은 가장 모진 세상을 상징한다. 아이를 죽여야 하는 세상은 미래가 없는 세상이다. 나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읽으며 인간에게 가장 모진 고문이 ‘희망 없는 미래’라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희망 없는 미래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해방은 곧 미래의 회복임과 동시에 비로소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과거다. 그들은 외국인 나그네였고, 그에 걸맞은 신분은 노예였다. 그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을 고용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들은 노예 취급을 받는다. 오늘날과 같은 대명천지인 세상에서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양육하신 이유는 세상이 근본적으로 희생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런 세상에서 다른 세상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외국인 나그네가 되어야 했고, 오래도록 노예로 살아야 했고, 마침내 Exodus하여 사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사명이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의 그 사명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대접하라는 것으로 확장 완성하셨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뒤엎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뒤엎어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가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당이란 그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신들의 교회의 가장 큰 곳을 본당이라고 부르면서도 그것의 의미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없다.

그렇다. 본당은 건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교회의 본질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것이 내가 그동안 간과해 오고 의도적으로 부정해왔던 장소의 의미다. 장소 역시 교회의 본질의 일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본당이라는 의미가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나그네의 집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쉼과 피난처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본당에 와서 쉴 수 있고, 위로와 힘을 얻어야 한다. 이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공유다. 본당에서의 경제적 공유는 단순히 경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통치의 상징을 지닌다. 유무상통하는 공동체는 그래서 교회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표지가 된다. 나는 그것을 좀 더 가다듬어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로 압축해놓았다.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에서 세상에서 외국인 나그네로 살던 사람들은 비로소 인간대접을 받고 존엄성이 되살아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교회가 주목해야 할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오래도록 외국인 나그네로 살면서 해방을 경험한 이후 외국인 나그네들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와 똑같이 나그네이신 예수님을 만난다.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가난한 사람들, 환자들, 귀신들린 사람들, 나환자와 같은 저주를 받은 사람들, 세리와 창녀들처럼 사회적으로 죄인이 된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들과 똑같이 소중한 하느님의 잃어버린 양들임을 일깨우셨다.

그 역할이 외국인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주어졌다.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친구들이 아니라 이것을 아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의 친구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친구들이 되어 예수님처럼 잃어버린 하느님의 백성들을 찾아 그들의 존엄을 회복하고 자매와 형제가 되어 하느님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

그런 만남의 장소로서 본당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본당이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때, 강력하게 전달되는 세상의 복음을 뚫고, 하느님의 말씀을 구별하여 들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다.

그렇다. 교회는 부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인 본당 역시 중요하다. 회복되어야 할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인 외국인 나그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장소로서의 본당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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