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성서가 지도이고 그리스도가 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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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성서가 지도이고 그리스도가 나침반
  • 최태선
  • 승인 2024.06.0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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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내가 신학교에서 배운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정신이상자이고 우울증 환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가르친 교수가 정신이상자라고 생각한다. 웃으며 그 말을 한 그가 우울증 환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상은 장삼이사들에게는 이상이 될 수 없고, 바라는 바 역시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진리의 종교다.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의 참 제자들이 아닌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에 머물러 있지 않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고, 진리가 가져오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무슨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 이 모습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다.

며칠 전 나는 내가 다니던 교회 은퇴 목사님과 통화를 하며 질문을 하고 싶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 믿으십니까? 아멘! 그러면 됐습니다.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했던 설교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계신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말을 듣고 이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묻고 싶은 질문이 여럿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잘 생각해보라.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불행이다. 나는 내가 다니던 교회의 은퇴 목사님뿐만이 아니라 가장 유명하다는 목사님들 역시 같은 사고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안다.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고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너무도 확실한 진리다.

정말, 예수 믿느냐는 질문에 확신 있는 목소리로 '아멘'으로 대답만 하면 구원이 확실한가?

나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생명을 요구한다. 그래서 성서는 분명하게 밀알의 비유를 통해 그것을 확정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이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인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치열한 삶을 의미한다. 또한 죽는 것 역시 그 치열한 삶의 결과다. 그렇다면 믿음이 “예수 믿습니다. 아멘!”으로 치환될 수 있는가. 대답은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부인하는 것을 내 사명으로 삼았다.

그런 내게 토론을 요구하지 말라. 나는 진리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나눌 수는 있지만 인간의 토론으로 진리가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노자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의 의미를 굳이 풀이하지 않아도 진리는 인간의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상은 높을수록 귀하고 또 높은 이상이라야 이상이다. 낮은 이상과 비교해서 조금 더 높은 이상은 이상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이상이 아니다. 가장 높은 것만이 이상이다. 이상을 품으려거든 차라리 최고의 이상을 품을 것이다.”(김교신)

김교신이 말하고 있는 이상이 바로 진리다. 진리란 이상과 같이 품을 수 있으되 실현이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하지만 오롯이 진리를 향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진리를 향해 다가서게 된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진리를 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자 삶의 방식이다.

나는 내 글을 통해 신앙은 실패로 끝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발견한 포스트모더니스트인 데리다는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라는 말을 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로서 그는 진리를 해체하여 오히려 진리를 가장 잘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곧 복음이라는 진리, 혹은 이상을 좇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정되어 있는 실패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그들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진리를 성취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걸은 길이 진리를 향한 길로서 가장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는 결과를 낳는다. 데리다는 그래서 실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진리를 향한 실험이 곧 신앙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진리를 향하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휴 홀거는 우리에게 실감나게 설명해준다.

“지금까지 나는 다섯 차례 사하라 사막을 건넜다. 그리고 그때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지금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트럭에 작은 결함 하나만 있어도 당신은 끝장이다. 그러나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미리 조심하면 생각보다 안전한 여행이다. 그런데도 해마다 상당수 사람들이 사막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는다. 그들의 사망원인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신기루를 좇다가 변을 당하는 것이다. 그냥 자기한테 있는 나침반을 믿으면 안전한 여행이 될 터인데, 멀리 지평선에 나타난 오아시스나 거주지를 보고서 그리로 향해 차를 몰다가 결국 길을 벗어나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다. 나는 끝없는 모래벌판을 달리면서 자주 생각한다. 내 인생에서도 신기루를 좇지 않았더라면, 그동안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겪어야 했던 그 숱한 어려움과 불행을 겪지 않았으리라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하라 횡단이 생각만 해도 겁나고 위험한 여행일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오히려 새로운 영감과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사막을 건널 때 나는 반드시 지도와 나침반을 지참한다.” (Hugh Holger)

휴 홀거의 이야기는 신앙을 실감나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생각나게 해준다.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은 우리의 신앙에는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하다. 나는 성서가 지도이고 그리스도께서 나침반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믿습니까? 아멘!”은 신기루다. 신기루에는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다. 신기루를 좇는 것은 길을 벗어나 생명을 잃는 것이다. 인생은 끝없는 모래벌판이다. 숱한 어려움과 불행이 이어지는 험한 곳이다. 그곳을 통과하는 방법은 지도와 나침반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신기루를 좇아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교리라는 신기루를 좇는 일단의 무리들이 되었다. 그들이 아무리 그것이 성서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주장할지라도 신기루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 뿐이다. 단순히 내가 교리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좇으라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유한한 생명을 요구한다. 그것을 기쁨으로 수용할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진리의 길에 들어설 수 없고,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는 갈대로 살아가게 된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그리스도인은 기쁨으로 가진 것을 다 파는(이것은 대가이며 행위이며 삶이다) 사람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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