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현장에서 일구는 힘겨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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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일구는 힘겨운 사랑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4.2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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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파주 집에서 칩거한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책을 쓴다는 핑계였지만 은둔은 때로 달콤하고 때로 고적합니다. 외롭다는 생각은 별로 없으니 다행입니다. 자료를 읽으며 내가 몰랐던 장일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김지하의 고민, 내가 몰랐던 김민기의 깊은 영적 흐름까지 보이는 것 같아 “칩거도 수행의 한 방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에서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고 잠시 일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봅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죠.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고 말합니다.(마태 12,46-50 참조) 이 구절을 두고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들을 부인하셨다. 그러나 목적이 없이 이 일을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해체하신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삶의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진출처=featureshoot.com
사진출처=featureshoot.com

가족, 고단하고 행복한 수행

‘가족’이란 말은 참 아름답고 때로 고통스러운 언어입니다. 피난처이며 십자가입니다. 희망이며 좌절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부모는 아이 때문에 행복하고 아이 때문에 아픕니다. 문득 내게 가족이 없었다면, 홀몸이라면 내 삶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좀더 깊이 투신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단칸방에 살아도 크게 문제될 게 없지 않았을까? 적게 벌고 많이 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가족 아닌 이웃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나눠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예수님은 평생 홀몸으로 남았던 것일까? 그래서 수행자는 ‘집을 떠나는 출가’를 해야 했던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차라리 아직 젊었던 그때 사제가 될 걸 그랬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서 깜짝 놀랍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생각합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어찌 보면 나의 수행이 관념에 머물지 않고, 땅을 단단히 밟고 있도록 만들어준 것은 고단한 삶입니다. 피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있는 헌신입니다. 남이라면 불가능할 사랑이 가능한 곳이 가정입니다. 분리될 수 없는 너를 향한 사랑의 분투가 오늘도 계속되는 곳입니다. 더 많은 사랑보다 구체적인 ‘너 하나의 사랑’을 분명하게 밟아 나갈 수 있는, 그렇게 걸어서 하늘에 닿도록 애쓰는 힘겨운 사랑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다시금 가족들의 생계와 나의 생활을 튼튼하게 책임지면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해 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수자들을 위해 일하는 성공회 용산 나눔의 집에서 여는 독서모임에서 비교적 젊은 목사님들을 만났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정해 읽고 삶을 나눕니다. 오전 11시에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오후 4시가 넘어야 아쉬운 작별을 하곤 했습니다. 그분들은 스무 명 남짓 하는 신자들과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지만, 평일에는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합니다.

한 분은 퀴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퀴어모임에서 축도를 하였다는 이유로 감리교단에서 출교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 밖에도 구원은 있다”고 말했다고 출교 처분을 받은 변선환 목사님도 생각나고, 모과주를 담궜다가 신도들에게 발견되어 교회에서 밀려난 이현주 목사님도 생각납니다. 한 분은 목수 일을 하고 있고, 한 분은 청소업체에서 일하고, 한 분은 문화기획 분야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이런 분들을 개신교에서는 ‘이중직 목회자’라고 부른답니다. 목회와 별도의 생업을 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다른 평신도들과 마찬가지로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이런 일상에서 길어 올린 복음적 성찰을 신자들과 나누고, 예배 안에서 봉헌합니다.

 

Celtic Cross, Iona, Scotland
Celtic Cross, Iona, Scotland

그리스도를 호흡하는 일상

마침 올해 첫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은 에스더 드발(Esther de Waal)의 <켈틱 기도의 길>(비아토르, 2023)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켈트 그리스도인들의 흉갑(胸甲)기도가 아주 특별하더군요.

“그리스도 내 옆에, 그리스도 내 앞에
그리스도 내 뒤에, 그리스도 내 안에
그리스도 내 위에, 그리스도 내 아래
그리스도 내가 눕고 앉고 서는 곳에
그리스도 나를 아는 모든 이의 마음에
그리스도 나를 만나는 모든 이의 혀에
그리스도 나를 보는 모든 이의 눈에
그리스도 나를 듣는 모든 이의 귀에”

그리스도인들은 전사들이 전쟁터에 나가면서 갑옷을 입듯이, 일상의 구석구석 전후좌우 위아래에 온통 그리스도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분과 함께 호흡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지이요. 삶의 현장 곳곳에서, 우리의 일상 갈피마다 그리스도를 입자는 것이지요.

그분들은 생계와 성무를 겸하는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그 가운데서 어떻게 책임 있는 남편, 든든한 아빠이면서 세상을 위한 복음의 전사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합니다. 특히 자기들처럼 삶이 곤혹스러운 소수자들을 위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선 굳이 ‘자발적 가난’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적인 가난이 그들을 궁지를 몰아넣었고, 생의 구차한 갈피들을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희선 시인은 “우리는 그래서 사랑하지만, 그분은 그럼에도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실제적 가난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래도 복음적 분투

최근에 <텐트 메이커>(뜰임, 2024)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책으로 펴낸 목수일 하는 최주광 목사는 “일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많아지면 불안도 커진다.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던 지난날의 치기 어린 외침은 사치였다”고 고백합니다. 10년 동안 신학공부를 했지만, 그래서 한동안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정작 생활전선에 나서며 처음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으면서 그가 느낀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운전 아니면 단순노동뿐이었다”고 합니다. 면접을 보고 나면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따로 연락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이럴 때 하느님 믿는 사람도 바로 그 하느님께 간절하게 자비를 청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집니다.

이 절실한 삶의 현장에서 ‘가톨릭일꾼운동’에서 진척을 보이지 못하는 나 역시 최 목사처럼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복음적 분투가 나의 복음적 분투와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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