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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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 김선주
  • 승인 2024.04.2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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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장난감을 선물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껴안고 놀다가 부셔버리네.
내일이면 벌써 그 선물 준 사람을 생각지도 않는 아이처럼,
그대는 내가 드린 내 마음을 예쁜 장난감처럼
조그만 손으로 장난하듯이 쥐고서 (부셔버리네).
내 마음이 쓰리고 고통당하는 걸, (그녀는) 알지 못하네.

헤르만 헤세가 짝사랑하는 여인을 연모하며 쓴 시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여인을 철없는 아이에 빗대어 노래합니다. 시인은 거부당한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지만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힘주어 말합니다. 시는 오히려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에 대한 사랑의 정감으로 가득합니다. 그대가 내 마음을 몰라줘도 그대는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노래합니다.

1986년도에 가수 서유석 씨는 헤세의 이 시를 보고 자기 이야기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가난한 대가족 집안에 시집 온 형수는 시어머니로부터 살림을 물려받아 지독하게 궁핍한 살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수는 나이 어린 시동생이 밖에 나가 기 죽지 않게 하려고 모진 가난 속에서도 근근이 푼돈을 모아 용돈을 주곤 했다고 합니다. 형수는 가난한 경제적 상황을 통해 시동생을 본 게 아니라, 어린 시동생을 사랑스럽고 감동 어린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유석 씨는 어른이 돼서 헤세의 시를 처음 읽고 나이 어린 시동생을 살뜰하게 챙기던 형수의 마음을 왈칵 느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서유석 씨의 노래를 들어보겠습니다.

서유석 씨는 헤세의 시에 나타난 사랑의 고통과 반대되는 사랑의 정감을 낭만적으로 엮어 아름다운 서정을 자아냅니다. 노래에서도 헤세가 사랑한 그녀는 헤세의 마음을 장난감처럼 망가뜨리기만 합니다. 그러나 헤세는 냉철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거리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적으로 생각하면 그녀를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논리와 수식(數式)으로 계산하여 거리를 도출하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헤세는 오히려 그녀에게 감동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습니다.

‘감동’은 어떤 대상에게 반할 때 나오는 심리적 반응입니다. ‘반한다’는 말은 ‘(사람이 무엇에) 마음이 끌려 홀리다’는 뜻입니다. ‘홀리다’는 말은 ‘(사람이 어떤 대상이나 그의 유혹에) 넘어가 마음을 빼앗겨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 즉 이성이 마비된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서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결혼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서로에게 반했기 때문에 결혼까지 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살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내가 미친 짓을 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때부터 삶의 감동이 사라지고 냉철한 논리와 합리적인 판단이 부부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관계가 삭막해지고 삶이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현대사회는 우리를 정신없이 내몰고 있습니다. 너무 바쁜 삶이 우리에게 감동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감동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빠르게 달리기만을 강요합니다. 전시회에 미술작품을 보고 감동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음악회에서 가족들과 음악을 감상하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여유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우리에겐 삶의 여백도 없고 상상력도 고갈됐습니다. 많은 연봉을 받고,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좋은 차를 타지만 우리는 더욱 궁핍해져만 갑니다. 이것이 존재의 궁핍입니다.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세계를 감동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삭막한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 건조한 마음으로 예배당의 한 시간을 겨우 채우고 가는 믿음,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본 이웃,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궁핍해졌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감동을 찾아야 합니다. 감동은 세계와 사물에 대해 긴장감을 갖고 불안감과 초조감으로 거리를 계산하며 궁핍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치유할 수 있는 신앙의 유산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감동 주시기 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동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축복받았다고 생각하는, 외적 조건이 만족스러울 때 나타나는 반응이 아니라, 내 존재의 뿌리가 하느님을 향하고 있을 때 밑바닥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에너지가 감동입니다.

하나님을 내 축복의 수단으로 삼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이라 이름하는 우상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으로 마주하면 그곳에 존재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시 ‘하나님’은 그런 감동으로 충만합니다.

몰랐네
뭐 모른지도 모른
내 가슴에 대드는 계심이었네.

몰라서 겪었네
어림없이 겪어보니
찢어지게 벅찬 힘의 누름이었네.

벅차서 떨었네
떨다 생각하니
야릇한 지혜의 뚫음이었네.

하도 야릇해 가만히 만졌네
만지다 꼭 쥐어보니
따뜻한 사랑의 뛰놂이었네.

따뜻한 그 사랑에 안겼네
푹 안겼던 꿈 깨어 우러르니
영광 그득한 빛의 타오름이었네.

그득 찬 빛에 녹아버렸네
텅 비인 빈탕에 맘대로 노니니
거룩한 아버지와 하나됨이었네.

모르겠네 내 오히려 모를 일이네
벅참인지 그득 참인지 겉 빔인지 속 빔인지
나도 모르는 내 얼 빠져든 계심이네.

또 시편 8편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로 시작해서 같은 구절로 끝내어 수미상관을 이룹니다. 시인은 하느님을 향한 감동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주의 이름(존재하심)이 우주 만물 가운데 충만함을 느낍니다. 하느님과 그의 세계에 반한 것입니다. 시인의 감동을 풀어 말하면 ‘하나님이 세상 만물 가운데 속속들이 계신 것을 이제야 보게 됐’다는 뜻입니다.

작은 일에 감동하십시오. 감동으로 대하는 세계와 사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호흡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감동하십시오. 사람을 대할 때도 거리를 계산하지 말고 감동으로 대하십시오. 감동은 경외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 세계에 감동하지 않는 믿음은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감탄과 감동이 존재의 뿌리에서부터 샘솟을 때, 우리는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존재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감동이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감동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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