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혁명,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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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혁명,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한 일
  • 최태선
  • 승인 2024.04.0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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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명성교회에서 열린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께서 성서를 인용하시며 축사를 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대통령님은 이곳에서 말하는 자유를 ‘시장의 자유’로 이해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말씀을 해석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분이 하신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박수를 치신 분들은 국가를 숭배하는 이교도들이었다.

한 마디로 참람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더 이상 참람하지 않은 것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하부구조가 되어 국가를 신으로 섬기는 국가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곳에 속한 사람들은 물론 그 사실을 보고도 참람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모두가 ‘이교도’들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참람한 사건을 목격하고도 여전히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대세라는 사실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런 곳을 박차고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사람들이다.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돌아서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도무지 돌아설 줄을 모른다. 그들의 사고에는 완벽한 사람은 없다거나 완벽한 교회는 없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어느 목사를 데려다놓아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근본적으로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완전히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란 영원히 개혁의 대상이라는 말을 하거나 자신들의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교회들은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은 돌아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과 싸울 수 없고, 그들과 싸울 필요도 없다. 다만 그런 그들이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랄 수 있고, 그 일을 아파하며 그 일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돌아서는 일 자체가 의미 있는 선택은 아니다. 돌아서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을 피터 모린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가톨릭일꾼의 공동창립자였던 피터 모린은 ‘푸른 혁명’(Green Revolution)을 주장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늪 한가운데서 탈(脫)자본주의의 섬을 만들자는 것이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다. 피터모린이 말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의 사회로서 근본적으로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방식을 따르는 곳이다.

하느님 나라는 다만 ‘자본주의의 늪’만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문명의 존재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 한 복판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그곳을 보여주는 곳이다. 교회란 근본적으로 그런 하느님 나라의 전진기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스파이’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이 단순히 자본주의의 늪에 탈자본주의의 섬을 건설하는 일이라거나 그리스도인들을 스파이들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책무는 단순히 하느님 나라를 세상 한복판에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보여주고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가 되어 그것을 본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편지의 내용을 이해하고 세상이 틀린 곳임을 깨달아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기를 원하게 되고, 세상을 전복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온 세상을 구원하게 되어야 한다.

아마도 피터모린이 그것을 푸른 혁명이라 명명한 것에는 이러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전달하는 사람이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늪 한 가운데에 탈자본주의의 섬을 세우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맞다. 푸른 혁명이란 피(붉은)의 혁명이 아니라 평화의 혁명임을 주장하는 것이며, 특히 그것이 혁명이라는 것은 세상을 전복함을 의미한다. 복음은 이처럼 평화의 방식으로 세상을 전복하라는 하느님의 요구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런데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시장의 자유’로 인식하게 된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돈이 가진 힘 때문이다. 사실 사람으로서 돈이 가진 유사전능성을 두려워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돈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미워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시장의 자유로 왜곡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 속에서 돈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모해보이고,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윤석열 대통령과 같은 분이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마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환영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돈의 노예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돈은 권력과 짝을 이루어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통해 거절하신 ‘힘과 영향력’이라는 사실을 명성교회와 그곳에 속한 사람들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일은 단순히 명성교회와 같은 일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와 교회 전체의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그리스도교와 교회에서 돌아서 나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서 나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나와서 푸른 혁명의 대열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비극은 돌아서 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안티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비난하고 비웃는 사람이 된다. 그 모습이 바로 성서에서 말하는 ‘배나 지옥자식’이 된 모습이 아닐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평화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난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들이 된다. 그렇게 슬퍼하면서 바보 같은 사람들이 된다.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는다. 그러나 그들은 상하지 않고, 죽지 않는다. 부활은 그런 것이다.

나는 푸른 혁명에 동참하는 바보들의 행진을 꿈꾼다. 로마 황제와 같은 윤석열 대통령님에게 ‘주님’이라는 호칭을 거부하고 기꺼이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말하는 사람들, 돈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세상에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경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든 문명의 대세가 된) 자본주의의 늪 한 가운데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내 눈으로 꼭 보고 싶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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