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우리는 한쪽 눈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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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우리는 한쪽 눈을 잃어버렸다
  • 김선주
  • 승인 2024.02.19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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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사순절이 시작됐습니다. 부활절 전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절기를 사순절이라 합니다. 여기저기 사순절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때맞추어 사순절 묵상집들도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가 정초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대림절)이 4주인 데 비해 사순절은 그보다 긴 40일을 지킵니다. 사순절이 그만큼 기독교 교리의 핵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한다는 믿음과 부활 신앙은 내세적 구원과 관련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를 떠받치고 있던 기둥이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빼고 그리스도교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특히 그의 죽음이 모든 인류를 대신한다는 대속의 교리는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견고하게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대속교리는 사진의 누끼를 따듯 예수의 그리스도됨이라는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배경을 지워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 진행된 사건이고 그 사건에 구원의 은총이 집중되기 때문에 나머지는 굳이 다룰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 이외의 다른 배경은 묵상의 영역에서도 삭제됐습니다.

이런 묵상은 우리의 현실을 배제시키고 내세의 구원만을 강조하며 초월적 신비주의를 낳았습니다. 이를 일상의 언어로 말하면 ‘비현실적’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사순절은 비현실적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한정시켜 봄으로써 수난의 모든 과정이 천상의 계획과 실천으로 격상됩니다.

이런 인식은 사람의 아들 예수를 학대하고 잔혹하게 살해한 정치권력과 사회적 배경을 당연히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예수의 수난과 죽음만 중요할 뿐 예수처럼 정의와 진실을 외치다 억압받는 상황은 외면합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를 죽인 정치 메커니즘과 폭력적 지배방식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외면하는 것이 사순절의 경건한 태도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죄 없이 억압당하고 감금되는 오늘날의 사건으로 해석되지 못하고 신화적 예수 상으로 상징지워졌습니다.

십자가가 인류를 위한 예수의 구원의 상징이라면, 그것은 동시에 정의와 진실을 외치다 무고하게 감금되고 죽어간 사람들의 표징이기도 해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오른편 강도는 민간을 약탈하고 살해한 강도(强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에 항거하다 붙잡힌 독립투사였습니다. 강도라고 잘못 번역된 오른 편 십자가의 사나이가 한 회개는 도덕적 결함과 위법한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적 인식이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전환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회개는 세계관의 전환(Paradigm Shift)이었던 것입니다.

오른편 강도의 이야기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포커스가 맞추어지고 배경이 삭제되는 과정에서 왜곡된 것입니다. 핍박받는 식민지 백성이 자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붙잡혀 사형당하는 장면이 왜곡된 것입니다. 식민지 백성이 불의한 지배자의 압제에 맞서 싸우는 것은 정당한 행위입니다. 부패한 권력자가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무고한 시민을 압제할 때, 이에 맞서 싸우는 것은 정의입니다.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만드는 검찰의 악행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입니다. 뚜렷한 혐의도 없이 300번이 넘는 압수수색을 감행하는 검찰을 독재로 규정하고 그 배경과 음모를 밝히는 기사를 쓰는 것은 진실입니다. 역사는 정의와 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순절은 역사적 예수보다 신화적 예수만을 강조합니다. 신화적 예수는 사람의 아들 예수를 살해한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을 그 배경에서 지워버리고 메시아 예수만 클로즈업시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예수는 내세에서 우리의 영혼을 기다리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예수일 뿐, 지금 여기(Here and Now)를 사는 우리와는 무관합니다. 그 예수는 독재 정권에 억압받는 시민들과는 무관한 예수입니다. 경제 구조의 모순에 의해 금융 학살을 당하는 서민들과는 무관한 예수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외치다 압수수색을 당하고 감금당하고, 부패한 언론에 조리돌림 당하는 지식인과는 무관한 예수입니다. 우리와 무관한 예수가 지고 간 십자가 또한 우리와 무관합니다.

십자가는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와 그들을 살해한, 부패한 권력의 살인도구입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영광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정의와 진실을 짓밟는 포악한 권력자의 흉포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신화적 예수 한쪽만 보도록 길들여졌습니다. 한쪽 눈을 감고 나머지 한쪽 눈으로만 십자가를 보는 것이 사순절의 경건이라면 나는 차라리 경건하지 않겠습니다.

사순절에 예수의 죽음과 구원의 십자가를 묵상한다면 진실과 정의에 못질하는 부조리한 정치, 경제 권력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죽인자들이 오늘까지 살아남아 진실과 정의를 압살하는 배경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배경이 삭제된 신비적 예수만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살해한 야만의 배경을 함께 봐야 합니다. 사순절에 잃어버린 한쪽 눈을 회복하는 것이 또 다른 경건의 시작입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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