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 지상의 방 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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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지상의 방 한 칸
  • 이연학
  • 승인 2024.01.2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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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학 신부의 영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환대

15년쯤 전 안식년, 가르멜 수녀님들의 강의 요청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한 덕에 인근 나라들도 둘러볼 기회를 얻었다. 첫 선교지 탐색 여행이었던 셈이다.

“성당이나 수도원엔 가지 마라”

베트남 호치민에서 이른바 ‘패키지 여행’으로 메콩강 하류 지역을 돌아보던 때 일이다. 일행이 탄 고물 버스는 가톨릭 신자 수가 인구의 반이나 된다는 롱쉬엔(Long Xuen)시를 가로질러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유명한 절로 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바다 가까이 이른 이 장대한 강은, 저물녘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들끓으며 몸을 뒤채고 있었다.

넋을 잃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현지인 가이드가 버스 안에서 일행에게 해 준 말이 나그네의 한껏 흡족해진 미감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미처 숙소를 잡지 못한 경우 절로 가세요. 잘 재워 줄 겁니다. 그러나 가톨릭 성당이나 수도원으로는 가지 마세요. 안 받아 줄 겁니다.” 가이드나 일행이 내가 가톨릭 수도자임을 알 리가 없었건만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후 3, 4년이 지나 충청도 어느 시골 순교 성지에서 겪은 일도 함께 기억난다. 한국 몇몇 수도회 수련소에 지금도 일정 기간 수련자들에게 무전여행을 내보내는 양성 프로그램이 있는 줄로 안다. 지나가던 젊은이를 거기서 우연히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도 돈 없이 시골 마을을 전전하던 수련 수사였다. 그런데 그가 메콩 삼각주 여행 가이드와 같은 말을 했다. 절은(더러는 예배당도) 낯선 사람을 받아 재워 주지만 성당이나 수도원은 아예 갈 엄두를 못 낸다는 것.

낯선 이에 대한 환대는 초기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식과도 같았다. 수많은 고대 문헌은, 환대야말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실천임을 증언하는 기록으로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환대는 오늘 교회 안에서 거의 ‘멸종’되어 버린 덕목이다. 오히려 이슬람교와 불교 같은 타종교에서 더 잘 실천되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사진출처=felixinclusis.tumblr.com
사진출처=felixinclusis.tumblr.com

나그네 하느님, 나그네 인간

예로부터 사람을 나그네라 일컬었지만(Homo viator), 성경을 잘 보면 하느님도 낯선 나그네(Deus viator)라 보아 별 무리가 아닌 듯하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구절의 배경은 아브라함이 마므레 참나무 곁에서 얼결에 하느님을 모셨던 이야기(창세 1,1-15 참조. ‘천사’는 사실상 하느님을 지칭한다). 이 하느님께서 마침내 사람이 되셔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그리하여 마리아가 구세주를 낳아 누인 곳은 마구간의 구유였으니,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7).

이렇게 시작된 하느님의 지상 여정은 평생 불편하기 그지없는 떠돌이 신세였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헤로데가 자신을 죽이려 하니 몸을 피하라고 일러 주는 말에 “그 여우에게” 전하라시며 덧붙이신 말씀은 또 이러했다. “보라, …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13,32-33).

마르타 삼남매의 집을 즐겨 찾으신 이유도 고단한 지상 여정에서 진심 어린 환대와 우정이 당신께도 참으로 소중했기 때문이었을 터. 과연 하느님께선 당신을 받아 줄 ‘지상의 방 한 칸’을 평생 고대하셨다.

변방, 환대의 출처

이처럼 강생하신 하느님께서 변방의 나그넷길을 걸으신 게 분명하다면, 그 뒤를 따르는 제자의 팔자가 다를 수 없다(2베드 2,11; 필리 3,20 등 참조). 동병상련(同病相憐), 이런 ‘이방인 처지’(xeniteia)야말로 웅숭깊은 환대와 인간애의 출처임이 분명하다. 변방의 나그네만이 가난한 이, 아픈 이, 이방인과 여러 형태의 소수자에게서 나그네이신 하느님을 뵙고 맞아들인다. 그리고, 역설이지만, 사람들은 그런 눈빛의 얼굴에서만 하느님을 뵙는다.

6세기의 「베네딕도 수도 규칙」에는 첫 그리스도인들과 이전 수도승 전통의 복음적 신앙 감각이 생생히 간직되어 있다. 예컨대 ‘(손님을) 맞이하다’라는 뜻으로 ‘수쉬페레’(suscipere) 동사가 일관되게 쓰이는데, 같은 단어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뜻으로도 쓰인다(58,21). 손님을 맞는 수도승 자신이 (수도원의 주인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손님이라는 자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렇다. 지상에 참된 의미로 ‘주인’은 아무도 없다. 모두 손님일 따름이다. 하느님께서 길손이셨던 바에야! 라틴말 ‘호스페스’(hospes)가 주인과 손님을 동시에 뜻한단 사실이 이 맥락에서 사뭇 의미심장하다.

이웃의 몸이 그리스도의 현존

환대에 관한 53장 전체에서 “손님=그리스도”라는 등식이 세 차례에 걸쳐(!) 강조된다(1.7.15). “온몸을 땅에 엎드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흠숭받으시고 영접받으시게”(7) 하고, “아빠스와 모든 회원들이 같이 손님들의 발을 씻어”(13) 주며, 이런 환대로 정작 하느님의 자비를 입는 쪽은 손님이 아니라 수도자라는 사실(14), 수도자가 손님에게 강복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가 정상인 현상(24), 손님이 오면 아빠스가 단식 규정을 해제하고 그와 함께 식사하는 일(10; 마르 2,19 함께 참조) 등은 모두 이에 대한 증언이다. 이는 「파코미오 규칙서」나 「사막 교부 어록집」, 「이집트 수도승 이야기」, 요한 카시아노의 「담화집」 등 이전의 수많은 수도승 문헌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전통의 계승이다.

미사 중 축성된 그리스도의 몸은 “신비적 몸”(corpus mysticum)인 반면 이웃의 현존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진짜 몸”(corpus verum)이라 본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도 이에 공명한다.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환대할 것”(53,2),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의 환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더욱 영접되신다.”(53,15)라는 표현 역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의식과 실천에 큰 자극과 도전이 된다. 어떤 면에서는 이 오래된 전통이 오늘 그리스도인 일반의 의식과 실천보다 훨씬 ‘현대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어쩌다가 이토록 명백하고 소중한 초기 교회 전통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말았을까. 그러고도 별다른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까. 되살릴 길은 없을까. 오늘 신앙인들 특히 수도자들과 함께 진지하게 질문해 보고 싶다. “현실이 그렇다.”는 말은 좀 성의 없고 무책임하지 않은가. 

 

이연학 요나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수도회 수도자.
미얀마 삔우륀 성요셉수도원 책임을 맡고 있다.

[출처] <경향잡지> 202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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