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순종하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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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순종하는 사랑으로
  • 토머스 머튼
  • 승인 2023.12.11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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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
사진출처=eremmaryi.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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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도덕적인 삶에서 가장 강조되는 자애야말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의무들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교회는 확실히 외적인 법과 규범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한 조직적인 규범, 예식, 권위도 필요하다. 교회 안에도 위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의 존재 이유를 잊고, 자애와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게 된다면, 우리는 교회와 교회가 추구하는 삶에 대해 매우 왜곡된 개념을 갖게 될 것이다.

교회의 법과 조직이 자애의 내적인 삶을 보존하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법은 무용지물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피상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 법을 피상적으로 준수한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동료 그리스도인들, 동료 인간들과 진지하고, 겸손하며, 헌신적인 자애 안에서 일치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만족할 것이다. 그는 피상적인 법과 조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리스도적 삶 안에서 자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조차 잊게 된다. 그것은 결국 순수한 성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거룩함이야말로 충만한 삶, 넘치는 자애 그리고 우리 안에 숨어 계신 성령의 발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적 자애는 그리스도적 순종을 요구한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고차원의 더 완전한 의지들의 결합은 순종 안에서 이루어지는 저차원의 기초적인 의지들의 결합 없이는 불가능하다. 순종을 배격한 채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순종이 마치 같은 것인 양, 사랑의 실천을 순종하는 것으로만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사랑은 순종보다 더 깊은 그 어떤 것이지만, 순종으로 내면의 영적인 깊이를 열어 놓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사랑은 피상적이고, 감상적이며 감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순종은 사랑이 극단적인 형식주의가 갖는 격식들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힘을 준다. 순종이 없으면 우리의 자애는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될 것이다. 사랑이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객관적인 규범이 필요하다.

너무 자주 당연시되고 일상 속에서는 잊혀져버린 단순하고 기초적인 원칙들을 기억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거룩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이상으로 보이는 것도 이러한 참다운 관점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적 거룩함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랑을 잊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길이 멀고 내밀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바로 우리 앞에 있는 것임을 잊는다면, 그리스도적 삶은 매우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러한 삶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에 제시하신 단순함과 일체성을 잃어버려 연관성 없는 개념들, 교리, 고행주의적 원칙들, 도덕적 사례들, 심지어 법률적이고 전례상의 기술적인 문제들로 얽혀버린 미로가 되어 버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서로 일치시키며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자애와의 연결이 약해지는 만큼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정리가 안되고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모호한 영성 생활의 복잡함과 난해함에 당황하여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적 거룩함을 아주 섬세하고 기술적인 일로 받아들여 전문가만이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게 된다.

수도생활을 하는데 있어 신학적인 지식과 경험은 확실히 도움이 된다. 또한 법과 전례적인 규범이 가톨릭 신자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기 위해 충분히 공부하는 것 역시 유익한 일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올바른 방향의 공부는 우리에게 12세기 시토 수도회 작가였던 페르세느의 아담이 썼듯이: “법은 단지 우리를 구속하고 의무를 지우는 사랑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스도적 삶 안에서 자애의 중요성을 잊게 되면서 생기는 혼란과 오해는 우리에게 환멸감을 안겨 주어 거룩해지는 것,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우리의 이상은 격렬한 시험을 당하게 된다. 그것은 쉽게 패할 수 있는 시험이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단순히 “노력”이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성과 영적인 빛이 때로는 거룩함으로의 소명과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진리가 빠진 의지는 비효율적이다. 진리가 빠진 사랑은 감상주의에 불과하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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