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별: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 때가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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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 때가 적절하다
  • 이연학
  • 승인 2023.12.0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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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학 신부의 영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공부-식별

뒤돌아 살펴보면 가장 큰 보람도 가장 힘들었던 경험도 식별과 직결된다. 실로 예수님 제자의 인생 전체가 식별의 여정이다. 생각해야 할 범위도 넓고, 얘기하기 만만한 주제는 더욱 아니다. 식별에 관해 무게 있는 책도 저술한 분이 결국 자기가 창설한 공동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경우를 근래 가슴 아프게 지켜보았다. 식별이란 면도날 위를 걷는 듯 지난(至難)한 일임을 새삼 절감했다. 과연 겸손은 식별에 있어서도 시작이지만 동시에 종점이기도 하리라.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이번 달은 경험을 중심으로 식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점만 추려 나누고자 한다.

 

사진출처=labanditatownhouse.com
사진출처=labanditatownhouse.com

사심만 없으면

식별과 관련해서 지금도 가장 큰 도움이 되는 말씀이 있다. 옛날 청원자 시절, 한 수녀님께서 같이 살던 형제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해 주신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말씀이다. “사심만 없으면 어지간한 분별은 다 돼.”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실 수녀님의 이 ‘한 말씀’에 대한 변변치 못한 주석 비슷한 것이다.

‘사심’에 대한 얘기는 옛 사막 교부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345-399년)가 남긴 「8가지 악한 생각」에서 출발하는 게 상책이다. ‘생각’(loghismos)은 ‘사언행위’를 좌우하는 인간 내면의 근원적 충동 혹은 그 ‘세력’을 뜻하는 말이다. 지난달 말했듯 이 8가지가 그레고리오 대교황에게서 ‘7죄종’으로 정리된다. 이는 다시 예수님께서 40일 광야 단식 시기에 겪으신 마귀의 세 유혹 즉 육신, 영광 그리고 권력의 욕망으로 줄일 수 있다. 요한 1서가 말하는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2,16)도 필경 일맥상통하리라. 식별에 관한 한, ‘육신’과 관련되는 세력(식욕, 성욕과 소유욕, 분노와 시기, 우울 등)은 ‘잘 들킨다’는 점에서 의외로 다루기가 수월한 측면이 있다. 식별에 장애가 되는 ‘사심’의 핵심은 ‘정신’(loghistikon)과 관련되는 두 세력, 즉 공명심과 권력욕이다.

‘자아실현’ 혹은 ‘자기계발’은 현대의 신화다. 이 신화는 복음보다 힘이 세서, 수도자, 성직자를 포함해 많은 교회 구성원의 뇌리마저 깊은 곳에서 접수한 듯 보인다. 문제는, 개인과 집단의 뿌리 깊은(뿌리 깊기로 말하면 후자가 더한 듯) 자기보존 혹은 확장의 욕구는 당사자에게 잘 들키지도 문제시되지도 않는다는 데 있다. 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식별과 관련해서도 의미심장하게 지적하신 “영적 타락”의 경우까지 겹치면(「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이하 약칭 GE], 164-165항)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상당한 지위의 교회 사람들에게서 영적 식별이 전혀 작동되지 않는 듯해서 놀란 경우가 많았다. 자기 인식의 부재는 식별의 결핍으로 직결되고, 이 상태에서 남들 눈에는 훤히 보이는 일이 본인에게는 한없이 어둡게 되는 게 보통이다.

본질의 우선 선택

성경 전체를 통해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 선택’(preferential option)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관습과 규정을 무턱대고 거부하진 않으셨으되 무엇보다 원래 취지, 그러니까 ‘본질’을 늘 최우선으로 두셨다는 점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자니 기존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고, 십자가의 죽음도 역사적으로 이 본질 식별의 맥락에서 발생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하신 말씀이 대표적이다. 건물로서의 교회도 의식으로서의 전례도 모두 중요하지만, 모두가 참된 성전인 우리 ‘몸’에서(요한 2,19-21)

1코린 3,16-17 참조) 지금 벌어지는 ‘영적 예배’로 수렴된다는 사실을(요한 4,21-24; 로마 12,1 참조) 잊으면 여타 종교 의례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리스도교가 ‘종교’가 아니라는 본회퍼의 맑고 단순한 직관(religionless Christianity)은 어쩌면 죽음을 눈앞에 둔 감옥 생활에서만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질 식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오해의 소지가 많다. 불온하게 들린다. 실천하는 이에게 인간적으로 복보다는 재앙이 될 확률이 높다.

같은 맥락에서 전통에 충실하다는 말의 참뜻도 늘 되새겨야 한다. 그것은 과거 것들을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그대로 이식하여 지킨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라면 지금 어떻게 하실까? 창설자라면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까?” 이런 질문과 함께 기도하면서 전통을 ‘해석’하는 노고를 늘 감당해야 한다. 전통도 삶도 성경처럼 일종의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교황께서 하신 다음 말씀은 정녕 고무적이다. “영적 식별은 규칙을 적용하거나 과거에 하였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해결책이 모든 상황에 유효하지는 않습니다. … 복음의 새로움이 다른 빛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GE, 173항; 168항도 함께 참조).

겸손, 그리고 자비

영적 식별은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지만 그 쓴맛 단맛을 고루 경험하면서 저절로 생긴 습관이 있다. ‘하느님의 뜻’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 자기 식별에 궁극성을 부여하는 순간 이미 하느님의 자리에 들어가 버린다. 그리하여 식별되지 않은 (신적!) 폭력성이 주변을 숨 막히게 한다.

나침반의 바늘 끝처럼 늘 조금씩은 떨리는(신영복, 「담론」 참조) 것이 좋다. 식별은 한 번의 결정이라기보다 과정이라는 말씀도 그렇지만, “하느님의 인내심과 그분의 때에 대한 이해”를 늘 상기하는 것이야말로 “식별을 증진하는 핵심 조건”이라는 교황 말씀이(GE, 174항)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다.

이 모든 것은 식별에서도 마지막 자리는 겸손이란 사실을 가슴 서늘하게 깨닫게 한다. ‘영적 타락’의 무감각으로 생을 마감한 (지혜의 대명사였던!) 솔로몬보다, 간악한 ‘치정 살인 사건’의 주역 다윗이 식별의 모범이다.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 ‘가슴속의 진실’을 인식하고 부끄러움을(그리하여 진정성을) 회복했을 때, 그 ‘바수어진 뼈’(ossa humiliata)의 현장에서 ‘남모르는 지혜’(in occulto sapientiam)를 얻었기 때문이다(시편 51[50]편 참조).

스스로 이만하면 괜찮다는 철옹성 같은 안정감보다, 살짝 불안한 느낌이 식별에 결정적으로 이롭다. 그리하여, 자비는 하느님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기도 하다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씀도(GE, 105항에 인용) 비로소 깊이 알아듣기에 이른다. 식별의 출처가 겸손이라면, 그 열매는 자비다.
 

이연학 요나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수도회 수도자.
미얀마 삔우륀 성요셉수도원 책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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