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식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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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 김광남
  • 승인 2023.11.2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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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남 칼럼

<살아남은 자의 슬픔>(베르톨트 브레히트). 청년 시절에 읽은 몇 안 되는 시집들 중 하나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시대를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고 불렀다. 실제로 그의 시는 서정적이지 않다. 전통적인 시가 어떤 사물이나 정서를 암시적으로 표현하려 하는 데 반하여 베르톨트의 참여시는 독자에게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면서 결단을 촉구한다. 전통시가 인간과 세계를 변화가 불가능한 '정태적 존재'로 파악한다면, 참여시는 인간과 세계를 부단히 변화하여 발전되어 나가는 '생성의 과정'으로 본다.

어제 저녁, 식사 모임이 있어서 김포시청 앞 식당가를 찾았는데 가는 도중에 산타 모자를 쓰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어느 교회에서 나온 듯 보였다. 거리에서 캐롤을 듣는 게 너무 오랫만이어서 잠시 멈춰서 노래를 들었다. "참 반가운 성도여 다 이리 와서~~"

추억에 잠겨 캐롤을 듣다가, 문득 청년 시절에 읽었던 브레히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임시 야간 숙소'라는 시였다. 우리는 멋진 캐롤을 부르고 구세군 냄비에 지폐 한 장을 넣음으로써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던 우리의 한 해의 삶을 예쁘게 장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임시 야간 숙소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1931년)

 

김광남
종교서적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교회 민주주의: 예인교회 이야기>, 옮긴 책으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하여: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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