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말하지 않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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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말하지 않는 하느님
  • 김선주
  • 승인 2023.06.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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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사진출처=remnantnewspaper.com
사진출처=remnantnewspaper.com

내가 믿는 하느님은 변덕쟁이였습니다. 질투하는 하느님, 사소한 일에 화를 내는 하느님, 예민하고 까칠한 하느님, 저주하고 멸망시키는 하느님, 그리고 다시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이런 이미지를 가진 신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두려움과 경외로 시작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하고 깨달아 안 하느님이 아니라 교회가 심어준 이미지였습니다. 하느님은 인격적으로 소통할 만한 분이 아니라 두려워서 범접하기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양가감정을 동시에 갖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상반된 두 감정이 모순적으로 내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며 하나의 믿음으로 굳어질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전통과 관습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전통과 관습은 논리나 사유 없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사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지만 하나의 교리는 대를 이어 쉽게 전달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은 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통해 전해 내려온 하느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마당에 있는 여름 호두나무의 초록 그늘 아래서 삼라만상이 나뭇잎 하나에 맺혀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주는 분리된 개체들의 조합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의 그물망이었습니다. 그 그물망이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물코 하나하나와 그물 전체가 한 호흡이었고 한 몸이었습니다. 웅혼한 우주의 바다 위에 내가 조각목을 타고 떠 있는데 그 바다가 다시 내 안에서 출렁였습니다. 나는 바다에 속해 있으며 바다는 내 안에서 출렁였습니다. 이 끊임없이 이어진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우주가 지렁이와 노래기와 바퀴벌레와 모기와 진드기와 강아지와 고양이와 호두나무와 아침이슬과 처마의 물방울과 여름과 겨울과 밤하늘의 별들로 한 바탕에 펼쳐졌습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언어로 감당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의 첫 장부터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인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신비를 인간 언어의 한계 안에 가둘 수 없다는 뜻이었겠지요. 마찬가지로 범우주적인 하느님, 절대자인 하느님,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인간의 언어로 된 66권의 책 안에 가두어 둘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교회 전통은 성서에서 말하지 않는 하느님을 말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로 치부했습니다. 이제 말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새롭게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성서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화엄'(華嚴)에서 찾고 싶습니다. 근래에 화엄에 관련된 책들을 읽다가 나가르주나(龍樹)의 <중론>을 접하게 됐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인도에서 화엄사상의 출발점으로 보는 분이지요.

<중론>(中論)은 <중용>(中庸)이 그러하듯 어떤 상황이나 사태의 중간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中)은 중앙값이 아니라 극단의 논리를 해체하고 통합하여 나타나는 통전성(統全性)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인간의 논리가 가진 모순을 논리로 해체시킵니다. 마치 예리한 메스로 수술을 하듯 우리의 논리가 가진 모순들을 하나하나 해체시켜 그것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참이고 진리라고 규정하며 큰 소리로 떠들며 대드는 싸움꾼들의 논리를 제압합니다.

나는 <중론>을 읽으며 구약성경 <전도서>가 오버랩됐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로 시작하는 코헬렛의 아포리즘은 인간을 환원론적으로 바라보라고 요청합니다. 이어서 펼쳐지는 장들에서 인간 논리와 신념을 탄핵합니다. <욥기> 역시 고난받은 욥의 인내와 승리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라 고난이라는 옵션을 통해 인간의 논리와 생각의 쟁점들의 무의미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신념으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신념이 외면화될 때 나타나는 게 우상입니다. 하느님이라는 우상을 제거하고 보면 삼라만상 가운데 하느님의 호흡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화엄(華嚴)의 세계이고 연기(緣起)의 세계입니다. 교회만이 하느님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면 보이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표어가 ‘삶이 예배가 되는 교회’입니다. 일상과 자연과 우주 가운데 충만한 하느님의 숨결을 경험하면 생명의 신비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질서, 자본의 폭력에 압제당하며 고통받고 시들어가는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로 가득한 일상의 생명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화엄의 바다에서 하느님을 만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교회 전통과 프로그램 안에서 수동적으로 만나는 하느님이 아니라 일상에서 신비와 경외를 경험할 때 우리는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먼 미래에 주어질 구원의 약속에 비해 지금 여기에서 누려야 할, 존재의 기쁨이 더 작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을 천국으로 살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을 산다는 보장이 가능할까요?

오늘도 해가 뜨고 꽃이 피고 강물이 흐르고 별들이 반짝이고 내가 숨을 쉽니다. 이 모든 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해 특별히 주어진 삶의 신비라고 생각할 때, 존재의 기쁨이 찾아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 기쁨을 주셨습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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