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강의 초대] 갈릴래아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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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강의 초대] 갈릴래아의 예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4.2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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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부터 6주간 12강, 한상봉 강의

오랜만에 제 신학적 삶의 궤적을 훑어보고 있습니다. 1987년, 유월 민주항쟁이 발생한 그해에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은 영적 사건처럼 다가옵니다. 그해에 동무요 동지요 도반이었던 친구들과 읽었던 책이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었습니다. 각주까지 되새김질하면서 읽고 토론했습니다. 당시 저희들은 교내에 ‘제3세계신학연구회’를 만들었고, 정양모 신부님을 지도교수로 청했습니다. 그때 저희가 만든 회보 이름이 <아래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정양모 신부님이 수업시간에 이따금 존경의 마음을 담아 언급하셨던 분이 전국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였던 정호경 신부님이었고, 한국신학연구소의 안병무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책이 정호경 신부님의 <해방하시는 하느님-농민공동체의 교리서>(1987.11)였고, 안병무 선생님의 <민중신학이야기>(1987.8)와 <갈릴래아의 예수>(1990)였고, 문익환 목사님의 <히브리민중사>(1990.5)였고, 김지하의 <밥>(1984)과 <남녁땅 뱃노래>(1985)였습니다.

제 신학적 탐구의 여정에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빠뜨린다면, 제 삶을 관통했던 신앙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뒤로도 제 신앙에 양분을 제공해 주었던, 깨달음의 물꼬를 열어주었던 분들과 신학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체험에 해당하는 것은 아무래도 구티에레즈와 레오나르도 보프, 앨버트 놀런, 안병무와 서남동과 김지하를 만난 사건입니다. 미욱한 탓에 아직 시몬 베유와 도로시 데이, 헨리 나웬과 토마스 머튼, 그리고 장일순, 이현주, 이철수 선생님 등을 만나지 못했던 시절입니다. 이분들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새 하늘 새 땅을 찾아서 ‘걸어서 하늘까지’ 가자는 열망은 그리도 아름다웠지만, 저 자신은 근심어린 눈으로 지상을 떠도는 객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민중신학’을 다시 읽어볼 생각입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민중신학이야기>에서 성서를 보는 열쇠는 “민중 편에서!”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당하는 자’의 편에서 보는 것”이며 “당하고 있는 자의 해방”이 성서의 핵심되는 목적이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참 해석은 이런 해방사건에 참여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민중의 고통은 예수 이전부터 있었고 예수 당시에도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면서, “민중의 고통 속에서 우리가 메시야를 보고 그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예수의 생애 자체가 민중해방이고 예수를 통해서 민중해방사건이 일어나고 있지요. 예수의 고통과 십자가 죽음에서 민중이 고통을 당하고 민중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겠는데 언어가 모자라요. 그 언어를 발견해야 할 거예요.”(<민중신학이야기> 127쪽)

그래서 결국 안병무 선생님이 지으신 책이 <갈릴래아의 예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민중현실 위에서 성서학적 성과와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민중예수를 재구성하신 것이지요. 이 책을 중심으로 강의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참에 여러분과 더불어 다시 민중신학을 공부해보자는 것이지요.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대로 ‘평생 청년으로 살기 위해서’ 첫마음을 보고 싶은 거지요. 30년 전에 출판되었지만 여전히 힘차게 발음하고 있는 <갈릴래아의 예수>를 교재로 하고, 최근의 성서학적 성과를 보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다시 새롭게 그분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동영상 강의] 갈릴래아의 예수

◆ 강사: 한상봉 이시도로(가톨릭일꾼 편집장)
◆ 일시: 일정: 6월 2일~7월 7일까지 6주간 12강
           (매주 금요일 강의 동영상 + 자료 업데이트)
◆ 교재: <갈릴래아의 예수>, 안병무, 2020 개정판
◆ 강의 방법: 동영상 강의
-해당일에 동영상 강의를 열어볼 수 있도록 이메일로 동영상 링크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강의록 PPT + PDF + 음성파일을 같은 날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문자로 강의 동영상을 링크해 드리니, 핸드폰에서 바로 시청할 수도 있습니다.

◆ 수강료: 9만원
              (송금계좌) 농협 352-1189-4554-13 한상봉(가톨릭일꾼)
◆ 수강신청(아래 주소 클릭해 신청서 작성)
https://docs.google.com/forms/d/1mFxr9lqq0KJYJ0B10gcpglT3zrOm3w4mvzd65Ra5oME/

◆ 강의 일정

6/2 1강:  너무 평범한, 너무 다른_예수의 수수께끼
       2강:  어둔 밤, 가혹한 희망_예수의 시대상

6/9   3강:  심판에서 자비로_세례자 요한과 예수
       4강:  민중의 땅_갈릴래아로

6/16   5강:  예수의 사명_하느님 나라
       6강:  그대의 친구는 누구인가_예수와 민중

6/23 7강:  민중사건_사탄과의 투쟁
       8강: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_예수와 여인

6/30 9강:  불경한 땅과 권력의 사유화_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10강:  예루살렘의 끝_체제와의 충돌

7/7 11강:  성문밖 예수_수난사
       12강:  다시 예수운동_민중은 일어난다

 

<갈릴래아의 예수 본문 미리 읽기>

1강 너무 평범한, 너무 다른_예수의 수수께끼

예언자들은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의 전달자로 자처하고 자신은 그 말씀 뒤에 숨는데 반해, 예수는 ‘나’, ‘나의 말’을 전면에 내세운다. 예언자는 말을 선포한 후 기다리거나 홀연히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기다리지도 숨지도 않으며 전장 한복판에 서 있는 지휘관처럼 행동한다.(42쪽)

2강 어둔 밤, 가혹한 희망_예수의 시대상

갈릴래아는 이방인이 많고 유다교 주류에서 소외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전통을 위해 궐기하는 상징적 지방이 되었다. 간교한 안티파스는 바로 그서을 의식했으므로 취임과 더불어 로마의 시리아 주재 총독 바루스에 의해 파괴되었던 세포리스를 재건하였다. 그것은 갈릴래아 비장 유다인들의 저항을 저지하는 요새로 삼기 위함이다.(58쪽)

3강 심판에서 자비로_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이 “오실 이”가 당신이냐고 했을 때, 그이는 도끼를 들고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찍어버릴 분, 쭉정이를 불에 태워버릴 분 ‘심판의 주’를 상정했다. 만일 예수가 “예”라고 대답했다면 그는 심판의 주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하는 일은 저주도 심판도 아니며, 악마에게 사로잡혀 고뇌하는 사람들을 해방해 주는 일이다. 어두움이 아니라 밝음, 죽음이 아니라 삶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91쪽)

4강 민중의 땅_갈릴래아로

예수는 일생을 거의 갈릴래아를 무대로 활동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다가”(마르 1,16) 또는 “갈릴래아에 오시어”(1,9;1,14)라고 편집구를 연속하여 첨가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예수가 갈릴래아와 깊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114쪽)

5강 예수의 사명_하느님 나라

지금 로마제국에서 압제 밑에서 착취와 수모를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온 천하 사람들이 모여 밥상을 함께 하는 현실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묘사는 큰 의미를 제시한다. 만찬의 비유(루카 14,15-24)도 하느님 나라의 비유다. ... 이 이야기는 하느님 나라 도래에 대한 가진 자와 못 가지고 세상에서 소외된 자의 대조를 나타낸다. 이것으로 그 나라의 편파성을 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 현실을 보여준다. 그 나라는 개방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이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38-139쪽)

6강 그대의 친구는 누구인가_예수와 민중

예수는 은둔자가 아니다. 또 그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신비주의자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형이상학적 철학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복음서는 처음부터 ‘홀로’의 예수를 소개하지 않고 ‘더불어’의 예수를 서술한다. 그러나 지금가지 사람들은 그를 유아독존적 존재로 착각한 듯이 그와 더불어 있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그만 ‘홀로’ 부각시켰다.(150쪽)

7강 민중사건_사탄과의 투쟁

확실히 예수는 그 당시 흔히 있었던 마술사처럼 계획적으로 치유행각을 했거나 치유능력을 과시함으로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이니까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전제는 없다. 단지 그가 내 병을 고쳐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주요한데, 그것은 그를 만난 나 자신이 병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믿음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189쪽)

8강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_예수와 여인

여성은 가장 종교적이면서도 종교에서 가장 소외되는 것이 여성이라는 말 그대로가 저들의 현실이다. 저들의 유일한 희망은 군림하는 철권의 메시아가 아니라 저들 편에 서 주는 이, 그게 바로 그들의 메시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무조건 여인들 편에 서되, (‘제자’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저들 사이를 차단하는 남성들의 포위망까지 해치면서 그들과 합류하려는 예수에게서 여인들은 새 세계를 본 것이다.(238쪽)

9강 불경한 땅과 권력의 사유화_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땅은 하느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땅을 몸소 가구는 자는 하느님에게 위탁받고 경작하는 심부름꾼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농민 사이에 있는 지주란 둘 사이에 끼어든 착취자 이상이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에게 돌리는 길은 농민에게 땅이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회개운동이며, ‘희년운동’은 그런 의미에서 민족적인 회개운동이다.(256쪽)

10강 예루살렘의 끝_체제와의 충돌

예수는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크게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주인이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44)고 했다. 이것은 로마제국을 포함한 통치체제의 본질을 예리하게 분석 비판한 것이며, 새 질서는 이러한 통치체제가 전복되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이런 입장이 로마-헤로데 체제에서 어떻게 용납될 수 있을까? ... 예수는 기존체제에 큰 위험인물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한낱 교훈이 아니라 많은 민중과 더불어 사는 현장에서 선언되었음에랴!(284쪽)

11강 성문밖 예수_수난사

예수운동은 투쟁으로서는 일단 실패했다. 예수는 예루살렘 체제를 철저히 거부하되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 문제는 수난사 전체가 어떻게 그토록 무신론적 분위기로 일관되었나 하는 것이다. 겟세마니에서 골고타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도 하느님의 개입은 없었다. 그는 신 없는 현실에서 철저히 패배당하는 약자로서 서술되었을 분이다. 다른 유다인들은 물론이고 제자들마저 배신하여 도망갔으며, 그 중 하나는 배신한다. 마침내 하느님마저 그를 버린 현장이다. “나이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는 비명은 그가 철저히 버림받은 자라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 불의가 판을 쳐도 어떻게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죽어가는 예수! 갈릴래아에서 그토록 초인적으로 서술된 예수를 어떻게 이렇게 서술했을까?(312-313쪽)

12강 다시 예수운동_민중은 일어난다

죽음에서 일어난 예수에게서 연대감을 발견한 민중들은 예수와 더불어 전진하게 되었으며, 바로 그렇게 일어선 저들은 “예수는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고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일어남(부활)은 어디까지나 그의 수난의 반열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만 현실이 된 것이지, 구경꾼들에게도 인식될 수 있는 그런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난”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만 인식되었을 뿐 그를 처형한 빌라도나 가야파는 경험하지 못했다.(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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