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 피터 모린 기념미사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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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피터 모린 기념미사에 초대합니다
  • 가톨릭일꾼
  • 승인 2022.04.2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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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일) 오후 2시~5시. 성분도 은혜의 뜰

2022년 가톨릭일꾼 월례미사를 시작합니다. 가톨릭일꾼에서는,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전까지 카페 엣꿈에서 매월 한 차례 우리에게 복음적 영감을 주었던 성인/증거자/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기리는 미사를 봉헌해 왔습니다.

2019.6.10. 성 요한 23세 교종 기념미사
2019.7.8. 조셉 카르댕 추기경 기념미사
2019.8.12. 시몬 베유 기념미사
2019.9.9. 헨리 나웬 기념미사
2019.10.14. 아시시 프란치스코 기념미사
2019.11.11. 도로시 데이 기념미사
2019.12.9. 토머스 머튼 기념미사

사회적 거리두기가 대폭 완화된 이번 봄부터 다시 월례미사를 복원하여 봉헌코자 합니다.

이번 미사는 5월 15일 오후 2시 ‘성분도 은혜의 뜰’에서, 도로시 데이와 더불어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했던 피터 모린 기념미사로 봉헌하며, 더불어 가톨릭일꾼/도로시데이영성센터 창립 6주년을 기념합니다. 저희가 2016년 5월 15일 합정동 초원장학회 강당에서 창립미사를 드린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사 집전과 강론은 이영우 신부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이영우 신부님은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대학동 고시촌 담당사제이며, 현재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에 ‘참 소중한 센터’ 열어 상처와 실패 안고 홀로 사는 중장년 남성들의 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강론에서 피터 모린처럼 사심 없이 헌신하는 이영우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미사 후에 참석자들의 생활 나눔과 새로 출간된 <그래요 그대-예수를 만난 사람들>(한상봉, 성서와함께, 2022) 북토크를 진행합니다. <그래요 그대>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예수님의 생애를 재구성하면서 복음적 진실을 소설 형식으로 되짚어 봅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고유한 자기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보잘 것 없는 생애라 해도 누구나 고유한 인격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네들의 이름을 낱낱이 불러주는 예수님을 이 소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날 참석자 가운데 다섯 분을 무작위로 선정해 이 책을 선물로 드립니다. 당일 현장에서도 책을 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일꾼 공동창립자 피터 모린 
&
가톨릭일꾼 창립 6주년 기념미사

일시: 2022년 5월 15일(일) 오후 2시~5시
장소: 성분도 은혜의 뜰 02-318-2425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104길 45-3 (동자동)
*참석하실 분은 가능한 미리 참석여부를 아래 주소를 클릭해서
 (귀찮은 일이지만) 참석여부를 알려주시면
 미사를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은혜의 뜰은 실내와 뜰로 나뉘어 있는데
 참석인원에 따라 공간을 바꾸려 합니다.
 (단 의무사항은 아닙니다. 누구나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참석을 희망합니다-> 아래 클릭>
https://docs.google.com/forms/d/1MxwybdhSYKf_8W3soG3iEIhNP8KnqtXTkLjvNR2MjuE/

 

찾아오는 방법

*오시는 길: 지하철 서울역 하차, 12번 출구에서 220미터 직진후, 좌측 한강대로 104번길로 450미터 진입하여 성 베네딕도수녀회 서울지구 정문 쪽 골목 20미터 지점에 위치한 단독주택 형태의 건물입니다. (주차는 수녀회 마당에 할 수 있지만 비좁습니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합니다. 

서울역 주변 공용주차장 안내:
https://whereisyourprofit.com/%EC%84%9C%EC%9A%B8%EC%97%AD-%EC%A3%BC%EC%B0%A8%EC%9E%A5-%EC%9C%84%EC%B9%98-%EC%9A%94%EA%B8%88-%ED%95%A0%EC%9D%B8/

 

피터 모린―농업 코뮨과 ‘환대’의 사상가

짐 포레스트

 

나중에 피터 모린으로 알려진 아리스토드 피에르 모린은 도로시 데이와 함께 ‘가톨릭일꾼’ 운동을 창시했으며, 그 운동의 유토피아적인 비전은 주로 그에게서 나왔다.

그는 1877년 5월 9일 남부 프랑스 랑게독 지방의 마을 울테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모린은 열여섯살에 ‘그리스도의 형제단’에 들어갔다. 그 조직은 검소한 생활과 경건함,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를 강조하는 기독교 공동체였다. 1898년부터 다음해까지 모린은 의무적인 군복무 때문에 공동체 생활을 중단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는 종교적 의무와 정치적 의무 사이의 긴장을 느꼈다. 프랑스 정부가 많은 종교학교들을 폐쇄한 1902년에 모린은 ‘그리스도 형제단’을 떠나 기독교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가톨릭 평신도 운동인 ‘러시용’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1908년에 그 운동이 점점더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것에 환멸을 느껴 거기서 물러났다. 1909년에는 군대의 징집이 없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는 2년 동안 사스카치완 주에서 농장을 경영하였다. 하지만 그 농장일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도랑파기, 채석장 일, 밀 수확, 벌목, 철도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는 벽돌공장, 제철소, 탄광에서도 일을 했다. 때때로 사람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는 대가로 일용 필수품을 얻기도 했다. 그는 또 부랑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는 1932년에 뉴욕주 북부의 한 가톨릭 소년 캠프에서 잡역부로 일하면서, 헛간에서의 생활공간과 식사를 제공받았고, 사제의 서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이러한 힘든 노동과 자기성찰의 시간을 통해서 모린은 신(神)이 보낸 선물로서 가난을 껴안게 되었다. 그의 걸림이 없는 삶은 그에게 공부와 기도를 위한 시간을 제공하였고, 거기서 복음서의 기본 가치를 바탕으로 한 질서, 즉 “인간이 좀더 쉽게 선(善)해질 수 있는” 사회에 대한 비전이 자라났다.

일이 허락하는 한 자주 그는 뉴욕으로 가서 바우어리 거리의 싸구려 여인숙에 머물렀다. 뉴욕에서 그는 공립도서관에 가거나 누구든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국 거리의 사람들에게 도달하는 방법은 거리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타고난 교사로서, 생기있고, 통찰력이 풍부하며,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꺼이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잡지《공화국》의 편집자 조지 슈스터가 있었다. 슈스터는 모린에게 가톨릭 개종자로서 당시 자유기고 저널리스트로 생활하고 있던 도로시 데이의 주소를 건네주었다. 1932년 12월, 모린은 도로시 데이를 만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비친 모린의 모습은 그저 또하나의 거리의 예언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모린을 만나자 곧 그를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하였다. 즉, 그녀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찾아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한편으로, 모린은 도로시 데이를 중세기의 개혁가이자 평화 협상가였던 시에나의 성(聖) 캐서린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모린은 데이가 “산을 움직이고, 정부들에게 세속적·영성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우선 가톨릭적인 교육이 필요했다. 모린은 그녀가 역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즉 국가의 흥망성쇠가 아니라 성인들의 삶을 중심으로 보기를 원했다. 그녀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신성한 것이며, 어떠한 사회변혁 프로그램도 신성한 것과 공동체를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했다.

모린은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 평화로운 사회변화를 위한 준비로서 신문을 하나 시작하자고 데이에게 제안했다. 그녀는 그런 새로운 일을 위한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 확신이 없었지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본은 기도로 마련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 보내주십니다. 당신은 인쇄업자에게 돈을 지불할 수 있을 겁니다. 성인들의 생애를 읽어보십시오”라고 모린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모린이 신문 이름으로 제안한 것은〈가톨릭 급진주의자〉였다. ‘뿌리’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radix)에서 유래하는 말 ‘급진파(radical)’는 피상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개인적·사회적 문제들의 근원에까지 다가가는 사람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나 데이는 신문의 이름은 그 신문이 상정하는 독자들의 사회계층을 가리켜야 한다고 느꼈고, 그래서〈가톨릭일꾼〉으로 정했다. “남자가 제안하고, 여자가 결말을 짓는 법이지요”라고 하면서 모린은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1933년 5월 1일 신문 첫호가 제작되어 막 배포되려 했을 때, 모린은 실망하여, 자신의 이름을 편집진에서 제외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신문이 아이디어와 원칙과 새로운 사회를 위한 전략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무운시(無韻詩) 형식으로 자신이 쓴〈읽기 쉬운 에세이〉와 복음서로부터의 몇몇 인용과 교황의 회칙을 제외하고, 신문의 나머지 부분은 단지 또하나의 급진적 항의(抗議) 저널일 뿐이었다.

급진파 중에서도 급진파인 모린의 생각으로는, 항의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데 거의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스트라이크는 내게 아무 감명을 주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는 낡은 질서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은 ‘비난’이 아니라 ‘무시’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미래사회에 대한 비전이며, 이와 함께 각자의 삶 속에서 이 비전을 조금씩 실현시켜갈 단계별 건설적 프로그램이었다. 그는〈가톨릭일꾼〉지가 단지 또하나의 불평꾼 그룹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녹색혁명’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모린은 일 자체가 비인간적인 곳에서 작업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올리기 위한 투쟁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는 “고용주들을 해고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먹고살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모린은 받았다. 그의 대답은 “농장에는 실업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일꾼〉지는 노동자 소유의 소규모 공장과 농업 공동체 속의 속박이 아닌 협동적 삶을 강조하면서, 탈중심화된 사회를 대변해야 했다. 농업 공동체 속에서 노동자와 학자가 합류하여 함께 땀을 흘리고, 사색하고, 기도하면서, 그 과정에서 ‘노동자-학자의 통합’을 향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모린은 생각했다.

모린은 흔히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않고 과거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유토피아적 낭만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점차로 ‘일관공정(一貫工程)’ 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에 공감하게 되었고, 노동조합이 활성화되고 작업조건이 좀더 개선된다고 해서 산업주의가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공동체가 대중사회보다도 월등히 나은 것이라는 그의 견해를 공유하게 되었다.〈가톨릭일꾼〉에 발표한 그의 에세이들에서 모린은 되풀이하여 옛 기독교의 관습이었던 ‘환대’의 실천을 되살릴 것을 제창했다.

곤궁에 처해 있으면서 구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곤궁하지 않은 이들에게 선(善)을 위해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현대사회는 걸인을 게으름뱅이, 거렁뱅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강제추방한다. 그러나 희랍인들은 곤궁에 처한 이들이야말로 신(神)들이 보낸 대사(大使)라고 말하곤 했다. 그대가 게으름뱅이나 거렁뱅이라고 불릴지 모르지만, 실은 그대는 하느님의 대사이다. 신의 대사로서, 그대는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당연히 음식과 옷과 거처를 제공받아야 한다.

모린은, 모든 가정에는 ‘예수님의 방’이 있어야 하고, 모든 교구에는 ‘하느님의 대사들’을 맞이할 준비가 갖추어진 환대의 집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창립된 지 일년 내에 그 신문 못지않게 ‘환대의 집’들로 유명해졌다.

대화를 통한 교육을 강력하게 믿는 사람으로서 모린은 ‘생각을 명확히 하기 위한 원탁 토의’를 제창했다. 금요일 밤의 모임은 곧 ‘가톨릭 노동자’ 공동체의 전통이 되었다.

‘가톨릭일꾼’의 회원들은 모린의 요청을 받아들여 농업 코뮨을 시작했다. 모린은 이 코뮨을 ‘농업경영 대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 좋아했다. 1938년에 모린은 ‘가톨릭 노동자’ 공동체가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턴에서 매입한 10에이커 넓이의 메리 농장으로 옮겨갔다. 불행히도, 거기에는 늘 밭일을 하거나 문의 돌쩌귀를 고치는 일을 하는 것보다 신학이나 정치를 논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여분의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있을수록 이루어지는 일은 더 적은 것 같았다”고 도로시 데이는 말했다. 작은 문제들에서 불화가 생겨났다. 오직 모린만이 늘 기초적인 일거리들을 돌보는 것 같았다. 1944년에 그 농장의 일부는 팔리고, 나머지는 스스로를 ‘진정한 가톨릭일꾼’이라고 여기는 한 말썽꾼 무리에게 주어졌다.

다른 ‘농장들’도 건설되었으나, 그러나 그것들은 농업 공동체라기보다는 농촌 지역에 있는 ‘환대의 집’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가톨릭일꾼’ 운동이 창시된 1933년에서 1944년까지 피터 모린은 자주 여행을 하면서, 교회에서나 거리 모퉁이에서나 듣고자 하는 이가 있으면 누구에게든 얘기를 했다. 1944년에 가벼운 뇌졸중으로 보이는 증세가 있은 후에 모린은 서서히 기억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5년간을 뉴버그 근처 ‘가톨릭일꾼 메리팜 피정센터’에서 조용히, 그리고 겸허하게 살았다. 1949년 그의 죽음은〈뉴욕타임스〉와 바티칸의 신문〈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보도되었다.〈타임〉지는 모린이 “버려진 옷을 입고, 기증받은 무덤에 안치”되었다고 썼다. “자신의 침대에서 잔 적이 없고, 누군가가 준 옷밖에 걸친 적이 없던” 사람으로서는 적절한 매장이었다.

그가 죽은 후 뉴욕의 스테이튼 섬에 위치한 한 ‘가톨릭일꾼’ 농장은 그를 추모하여 ‘피터 모린 농장’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피터 모린 농장’은 뉴욕주 말보로에서 계속되고 있다.

[출처] 녹색평론 통권 제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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