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안내] 상처입은 치유자, 예수의 얼굴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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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안내] 상처입은 치유자, 예수의 얼굴을 찾아서
  • 가톨릭일꾼
  • 승인 2022.04.1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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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부터 매주, 8회, 한상봉 강의

그대가 누군가 사랑하게 된다면 그이의 얼굴을 보고 싶을 것입니다. 류시화 시인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그대가 곁에 있어도/나는 그대가 그립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얼굴을 알고 싶고,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전설이 베로니카의 손수건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종도 그 얼굴을 보고싶어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마노펠로에 있는 카푸친회를 찾아갔습니다. 예수께서 베로니카에게 얼굴을 새겨주었다는 손수건이 그곳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예수의 초상은 전설이나 그림이나 상징일 뿐입니다. 정작 예수의 얼굴은 마음으로 보아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네가 예수의 얼굴을 진정 보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같이 하여라.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 네 마음에 와 닿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이 너의 영혼 속에서 하나의 얼굴이 되어 나타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는 예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오이겐 드레버만은 <예수를 그린 사람들-명화를 통해 느끼는 기독교의 진실>에서, 엘그레코, 렘브란트, 히에로니무스 보쉬, 오토 딕스, 브리겔, 프라 안젤리코, 막스 리버만, 조르주 루오, 크리스티안 롤프스, 빈센트 반 고흐, 얀 프로스트, 루카스 크라나흐, 게오르그 그로스, 한스 홀바인 등 많은 화가들의 성화를 통해 예수의 일생을 재구성하고, 정작 예수께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일지 가늠해 봅니다. 예술적 언어를 통하지 않고, 종교를 말하기란 어렵습니다. 화면에서 은닉되어 있는 복음적 진실을 발견하려는 오이겐 드레버만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면서, 이 책을 소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는 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찬히 꼼꼼히, 어루만지듯이 알아가는 과정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번 강의는 드레버만의 책을 기대어 강의하면서, 이 책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그림들도 덧붙여 소개하고, 제가 그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성찰해 왔던 예수의 진면목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드레버만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형상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완벽한 초상인 나자렛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 희망 안에서 여러분을 강의에 초대합니다.

이 소설은 다음주에 시중에 보급될 예정입니다.

 

* 덧글: 이번에 그래요 그대-예수를 만난 사람들>(한상봉, 성서와함께, 2022)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거의 500쪽에 가까운 분량인데, 예수의 속살을 들여다 보고 싶은 욕심의 결과물입니다. 현대성서신학의 성과를 반영해 그분과 그분을 만난 이들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신앙고백처럼 소설을 쓰면서 느낀 이야기도 간간히 강의에서 덧붙여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2022년 가톨릭일꾼 ‘예술과 구원’ 동영상 강의에 초대합니다

◆ 주제: 상처입은 치유자, 예수의 얼굴을 찾아서
◆ 강사: 한상봉 이시도로(가톨릭일꾼 편집장)
◆ 일시: 6월 2일(목)~7월 21일(매주, 8회)
◆ 교재: <예수를 그린 사람들>(오이겐 드레버만, 피피엔, 2010)

강의 방법: 동영상 강의
-해당일에 동영상 강의를 열어볼 수 있도록 이메일로 동영상 링크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강의록 PPT + PDF + 음성파일을 같은 날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수강료: 8만원
송금계좌: 농협 352-1189-4554-13 한상봉(가톨릭일꾼)
수강신청 방법:
1. 아래 주소를 클릭해서 수강신청서 작성하시면 됩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1ZYzEdPpKNmg1lDHkFzJ8lz0lAWXgmE1E7QuFhPhHAoQ/

◆ 강의 내용

1강 6/2(목)  네가 예수의 얼굴을 보고자 한다면
2강 6/9(목)  강생, 일상 속에 숨어들어온 거룩한 신비
3강 6/16(목)   사랑 때문에 자유로운
4강 6/23(목)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듯이
5강 6/30(목)  허락된 절망은 없다
6강 7/7(목)  나는 기적을 믿는다
7강 7/14(목)  지옥에 내려가신 예수
8강 7/21(목)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우정 안에서

◆ 강의 상세내용

1강 네가 예수의 얼굴을 보고자 한다면

절망하고 소외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마음이라야 마음의 빛을 발하고, 예수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그리스도의 그림을 보면,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이미 예수를 품고 살아 왔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어떠한 덧칠이나 모함이나 험담이 있을지라도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임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나자렛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순간에.

2강 강생, 일상 속에 숨어들어온 거룩한 신비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보다 더 강렬하게 삶의 은혜와 행복을 느낄 때도 없을 것이다. 루카복음서에 나오는 크리스마스 전설도 마찬가지다. 목자들의 이야기에서 천사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구원, 곧 ‘지상의 평화’를 전한다. 제 목숨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물론 주변 사람들과 화해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기쁨에 겨워 온 세상을 다 품을 수 있으리라.

3강 사랑 때문에 자유로운

예수는 난파되어 조난당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기회 없는 사람들, 배척당한 사람들, 쫓기고 박해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 한다. ... 인간이란 모두 보잘것없어 스스로 무엇을 받을 자격이라곤 아예 없지만, 그럼에도 오로지 자비와 은총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 예수가 모습을 보이면 그를 연모하여 환영하는 무리들은 모두 속수무책으로 내몰린 사람들, 좌절한 사람들, 부서진 사람들, 밖으로 떠밀린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올바로 대접하려면, 저는 마부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부자들의 수레바퀴에 걸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그이들이 신음하는 바닥으로 내려와야 한다.

4강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듯이

산상설교는 복음서 전체의 보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산상설교는 늘 세상과 동떨어진 이상주의로 의심받았다. 한마디로 실현될 수 없는 이야기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구속력이 없다고 말한다. 기껏해야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영역, 그러니까 수도원 같은 데나, 세속 권력의 보호와 감시를 받는 곳에서만 가능한 삶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산상설교는 그저 사람답게 사는 게 가능한 조건을 쉽게 풀어놓았을 뿐이다. 죄 많은 세상에서 만인이 생존하려면 모든 걸 주고, 용서하고, 필요한 것을 선물하는 은총이 필요하다.

5강 허락된 절망은 없다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반드시 ‘법’보다 은총을 앞세우신다. 무엇보다 그러지 않고서는 저런 사람들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공정함’을 내세워 고집하는 사람들은 ‘법’을 지킨답시고 동정심 없는 엄정함과 냉혹한 엄격성을 고집하다가 하느님을 잃어버린다. 옳고 어쩌니 하는 그런 문제 따위는 실제적인 고통 앞에서 무의미하다. 이때 하느님의 사람은 정의보다 자비가 필요한 순간임을 알아챈다.

6강 나는 기적을 믿는다

밤이 되었을 때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로 예수가 다가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겁을 집어먹고 물속에 빠져 들어갔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았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발밑에도 바닥이 없다. 언제 어디서 허무와 무상함이 우리를 덮칠지 모른다. 그러니,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에 대한 신뢰 안에서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무한의 빛에 비추어 유한한 것들을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주어진 삶을 담백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7강 지옥에 내려가신 예수

“성금요일, 예수를 따르던 자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일시에 분쇄된 그날 저녁 무서운 슬픔과 혼란을 겪었음에 틀림없다. 이들은 아주 지독한 공포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 만약 이 스승이 처형 전야에 자신의 모습을 미리 그려볼 수 있었다면 선뜻 십자가에 올라가 지금처럼 죽으려고 했을까?”(도스토옙스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마치 피와 고통의 유독한 하수가 흘러 들어간 우물과 같다. 인간의 역사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인간 삶에 궁극적인 답을 줄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는 믿음에 기대어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하느님을 믿고, 어떻게 죽음 저편의 삶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여기에는 오직 사랑만이 대답을 줄 수 있다.

8강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우정 안에서

부활절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를 만났다. 사랑은 상대방을 유일한 존재로 만든다. 사랑은 상대방을 천국에 이르는 문으로 만든다. 사랑을 통해 처음으로 인간 자아의 존재를 찾은 사람은 사랑 속에서 신적인 힘을 느끼며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다.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 어떤 사람을 우상화 시킬 때, 그 사람은 우리에게서 점차 자유를 빼앗고 우리의 헌신을 복종으로 둔갑시킬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달랐다. 그녀는 예수에게서 자기 자신을 찾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예수는 신이 된 것이다. 그분은 그녀를 위해 자신이 투명하게 됨으로써 하느님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녀는 그분을 통해 그녀가 하느님 품에 안겨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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