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성녀 엘리사벳, 라뽀니라고 부른 저 여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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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성녀 엘리사벳, 라뽀니라고 부른 저 여인은 누구인가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1.0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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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39

눈물꽃 아름다운 날은

-김윤배

당신 메마른 살
모래 언덕처럼 내 가슴
무너져내립니다
기다림으로 당신 생은 무거웠나니
발걸음마다
눈물꽃 자욱했습니다
당신 슬픈 살 속에서
눈물꽃 아름다운 날은
몸 내내 흐르는 물소리
풀잎 소리 들었습니다
눈물꽃 시들고
슬픔으로 숨쉬던 살 시들어
당신은 당신 영혼 만나기 위해
당신 속으로 길 떠납니다
모래바람  끝
당신 가슴 깊숙이
비수를 찌르던 일 생각납니다
당신과 하나이기 위해
애오라지 당신이기 위해
칼끝은 깊고 깊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5-18)

빈 무덤 사건과 막달라 여자 마리아

요한복음은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요한 20,1)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이다. 그 첫 증인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오매불망,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당혹스러운 광경이다.

성서는 마리아의 절박한 심경을 ‘달음질하여’ 제자들에게로 갔다고 표현한다. 나중에 함께 와서 빈 무덤을 확인한 다른 제자들도 당황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른 두 제자가 숙소로 돌아간 뒤에도 마리아의 발걸음은 떼어지지 않았다. 무덤 밖에 선 채 울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이 깊은 자에게 그 사랑은 되돌아오는 법이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사태를 파악하고 일찌감치 포기하는 심정으로 집으로 갔으나 마리아마저 예수님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리아의 사랑은 때마침 나타난 천사와 나눈 대화에서 다시금 드러난다. 천사가 “왜 울고 있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한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0,13)

 

이번엔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마리아에게 묻는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여보셔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주셔요. 내가 모셔 가겠습니다.”(20,15) 마리아는 슬픔이 너무 커서 지금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단지 동산지기라고만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실 적에야 비로소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라뽀니(선생님이여).”하고 응답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속에 하나의 인격으로 새겨져 있었기에 그분이 마리아의 인격을 불러낼 때, 비로소 서로는 옳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은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게 하신다(20,17-18). 실제로 네 복음서 모두가 막달라 마리아를 초기 그리스도교의 으뜸 증인이라고 알려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묻히심과 부활하심을 목격한 사람이다. 그녀는 부활소식을 알리러 제자들에게로 보내졌다. 그래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그녀를 ‘사도들에게 보내진 사도’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도요 복음전도자가 아니라 죄인이자 참회자로서의 모습이다. 교회에서 나온 소설이나 신심서적에서는 마리아를 남자인 예수님과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했던 여인, 그래서 쾌락과 매춘을 버린 여성으로 묘사한다. 이런 태도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참모습을 왜곡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여성 신자들의 위치를 깎아 내리는 태도이다.

복음서 전승을 자세히 보면, 처음부터 막달라 마리아를 복음 선포자로 인정하는 데 주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코 전승은 여자들이 “너무도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하였다.”(마르 16,8) 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열한 제자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여자들의 말을 헛소리려니 여기며 믿지않고 사실인지 확인하러 갔다고 전한다(루가 24,11 참조).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는 첫 사도가 마리아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교회 전통 속에서도 여성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역사적으로 부각된 적은 별로 없었다. 교회 안의 가부장주의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성인 가운데 많은 수가 여성이었음을 살펴보면서, 성령께서 여성들에게 빈 무덤 사건에서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관심을 쏟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 아닌 어머니 교회와 성녀

성인전은 주로 교사 · 신비가 · 선교사 · 수녀원장 · 군인 · 여왕 · 농민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성인 역시 태반이 여성이다. 그들이 성녀가 된 것은 단순히 좋은 아내와 어머니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때로는 결혼을 하고서도 동정을 지켰던 사람들이 많으며, 명도회 회장으로서, 또는 자신의 고유한 사도직을 통해 헌신하고, 마침내 순교한 분들이다. 그렇게 여성들은 창조적이고 독립적이며 교회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성인전에서는 성녀들을 그다지 매력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성인전에서는 성녀들을 성적 순결, 복종, 케케묵은 신심, 완전한 순명을 따른 사람들로 그리고 있다. 그들은 그다지 지성적이지 않으며 감정적이다. 또한 주로 수녀 · 과부 · 여왕들의 이야기일 뿐 보통 여자들에 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인전이 매우 가부장적인 문화와 신학에 의해 왜곡되어 있으며, 성녀들의 참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진실을 가릴 수는 없었다.

실제로 성인전에 등장하는 성녀들은 일차적으로 아내라든가, 딸이라든가 하는 가족상의 위치나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생식능력에 매이지 않는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남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뽑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하느님의 거룩한 무리[聖徒]라는 것이다. 그 부르심은 종교 · 문화 · 인종 · 계급 · 성을 포함한 모든 장애를 뛰어넘었다. 예수님은 가부장적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새로운 제자공동체로 바꾸셨다. 이런 관행이 남아서 지금도 우리는 ‘자부이신 교회’라 부르지 않고 ‘자모이신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가. 교회 전통 속에서 제자직과 공동체에 관한 부르심에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생애를 걸고 응답해왔던 것이다.

성녀 엘리사벳의 초상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1207-1231)은 12-13세기의 여성들처럼 복음적 영감을 받아서 철저한 제자직에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아시시의 클라라와 프란치스코처럼 가난한 떠돌이 거지로 살아감으로써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다. 헝가리 왕의 공주로 태어난 엘리사벳은 네 살 때 튀링겐의 영주 루트비히 4세와 정혼하여 열네 살 때 결혼해 세 자녀를 낳고 열여덟 살에 과부가 되었으며 스물네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결혼은 정략적인 것이었으며, 성녀로 시성된 것은 아마도 과부의 신분을 끝까지 지킨 데서 얻어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엘리사벳의 성녀다운 모습은 다른 데 있었다. 즉 영적 부부관계, 결혼과 모성에 의해 규정된 역할로부터의 독립, 자신의 소명을 이루기 위한 투신, 사회의식과 정의감이다.

루트비히와 엘리사벳의 결혼은 정략적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사랑의 결합이었다. 그녀는 종종 상류층 여자들을 겨냥하여 정해진 예법과 관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여 시집 식구들과 그 지역 귀족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사랑을 소중히 여기고 종교적 헌신을 도왔다. 이들은 함께 자라면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익혀 나갔던 것이다. 그들의 부부생활은 가부장적 지배와 복종의 생활이 아니었다. 루트비히는 엘리사벳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것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 안팎의 비난과 험담에 맞서 보호해 주기도 했다. 그들의 사랑과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마음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지 못할 만큼 컸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사랑을 공개적으로 거침없이 표현했다. 그래서 때때로 루트비히를 꼭 껴안고 키스를 퍼붓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루트비히에 대한 절절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소명이 파묻혀 버릴까 봐 밤새 깨어 기도해야만 했다. 왕족이라는 특권적 신분과 어머니라는 지위 때문에 복음적 열정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가난하게 살고 싶은 열망에 불타오르던 엘리사벳은 당시 귀족 부인들이 형식적으로 하던 자선행위와 질적으로 다른 삶을 원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깊은 감회를 받아 가난한 이들을 관대하게 돕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가난한 이로 살기를 원했다.

프란치스코조차도 거리에서 구걸하는 일은 형제들에게만 허용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일체의 성적 한계를 뛰어넘어 가난한 이들과 지내는 가운데 거리에서 구걸하는 삶을 통하여 예수를 따르고 싶어했다. 그녀의 영적 지도자였던 마르부르크의 콘라트가 귀족 신분의 엘리사벳에게 걸식생활은 적합지 않다고 반대하자 마르부르크에 병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펼쳤다. 당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설물 관리자는 대부분 성직자나 수녀들이었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그 역시 새로운 것이었다.

 

가난한 귀부인이 맺으려는 정의로운 사랑

엘리사벳은 많은 이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부유층과 귀족 계급의 생활양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자들이 소유한 많은 소비재는 하인들이나 가난한 농부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임을 알았다. 농부들과 밑바닥 노동자들이 왕족과 영주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야만적 착취에 계속 참여하기를 원치 않고, 오로지 정당하게 얻은 음식만을 먹겠다고 서약했다.

이러한 엘리사벳의 서약은 중세교회에서 말했던 ‘자선’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에 공공연히 항거했다. 이는 귀족사회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래서 루트비히 가족은 그녀를 공격했고, 주위의 상류층 인사들은 비웃었으며 어리석고 정신 나간 모양이라며 수군거렸다.

남편 루트비히가 죽은 뒤, 시동생은 바르트부르크의 저택에 계속 머물고 싶다면 식탁에 차려놓은 음식을 모두 먹으라고 강요했다. 그녀가 정당하게 얻은 음식과 불의하게 얻은 음식을 계속 구별하는 행위를 못 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강요에 저항하여 엘리사벳은 집을 떠나 극빈자로 살았다. 이런 처지를 보고, 하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등쳐먹고 사느니, 차라리 손수 일해서 사는 길을 택하셨지요.” 엘리사벳은 자녀들을 데리고 바르트부르크를 나온 후 몇 달 동안 집도 없이 무일푼으로 살아야 했을 때, 철저한 제자직의 사명에 가장 가깝게 갔던 것이다.

한편 루트비히가 죽고 나서, 엘리사벳의 유산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교황청에서 허락받은 영적 지도자 콘라트는 엘리사벳의 법정 대리인까지 맡았다. 엘리사벳은 그에게, 완전히 가난하게 살기 위해서 특권 신분과 부를 포기하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콘라트는 엘리사벳이 자기에게 완전히 복종하면서 금욕적 생활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과부가 된 귀족 부인에게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수도생활이라는 틀에다 강제로 맞춰놓으려 했다.

그는 엘리사벳의 의지를 꺾으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육체적 · 정서적으로 학대했다. 자신의 명령을 조금만 어겨도 매질을 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우애관계를 맺는 것마저 막았다. 콘라트는 엘리사벳이 세운 병원의 원장이 되어 모든 권리를 독점하고, 병원 사람들에게 세속적 · 영적 아버지로 군림했다. 성인전에는 이런 방법으로 콘라트가 엘리사벳의 완덕을 위해 애썼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 엘리사벳은 콘라트를 매우 두려워했다. 겉으로는 콘라트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실제로는 자신이 원했던 삶을 남몰래 살았다.

엘리사벳은 영적 생존을 위해 애쓰는 한편 자기 자신을, 억수같이 퍼붓는 폭우에 몸을 굽히긴 해도 꺾이지 않는 갈대로 표현했다.

“폭우가 잦아들면 갈대는 잔잔하고 아름답게, 다시금 충만한 힘을 드러내면서 꼿꼿이 일어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을 굽히고 낮추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뒤에 우리는 반드시 잔잔하고 아름답게 다시금 똑바로 일어서야 합니다.”

마침내 엘리사벳은 한 자선단체에 속하게 되었고, 자신의 소유를 모두 포기하고 비천한 ‘세속 자매들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당대에 종들이 하던 가장 천한 가사일을 맡아 했다. 그럼으로써 대부분 낮은 계급 출신인 자선단체 자매들과 하나가 되고자 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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