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인간은 곤궁 속에 있는 하느님께로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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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인간은 곤궁 속에 있는 하느님께로 가고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12.0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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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35

풀들은 늙지 않는다 4 -豫言

이영진
 

 집들은 스스로 허물어져 빈 자리를 만들었어. 무너지는 것들은 제 속을 비우고 대지를 향해 몸을 맡겼지. 기울어진 토방마루를 지나 뒷산 이름없는 묏등으로 가는 길. 구절초며 흰 찔레꽃, 꽃 피는 모든 것들의 의지가 눈부셨어. 그대가 길 떠나간 뒤, 사람의 온기가 바람에 닳아 식어가는 동안 등뒤에 남은 것들의 쓸쓸함은 깊어만 가고 무너진 빈 자리마다 풀이 자랐지. 바람이 불 때마다 들렸어. 지친 발걸음을 인도하던 그대 겨역할 수 없는 목소리. 우리는 세계를 떠돌며 끝내 자라지 않는 뿌리의 통증을 견뎌야 했어. 땀과 눈물의 자리에 함께 서 빛나던 소금 같은 사내들, 더불어 공유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대 떠도는 생애보다 짧은 저녁 노을이여. 노을은 떠 온 산이 붉어 와도 아무도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다가오는 어둠 앞에서도 끝내 늙지 않는 풀들만 푸르를 뿐 그대 썩지 않는 예언이여. 오늘 누군가는 또 집을 떠나야 하리라.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먼저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한나스는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 카야파는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다.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카야파 대사제에게 보냈다.(요한 18,12-14. 19-20)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디트리히 본회퍼는 반(反)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히틀러의 독재 정권과 싸우다가 1943년 4월 5일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히틀러의 제3제국이 무너지기 직전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게슈타포 장관의 직접 명령으로 39세의 나이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청년 신학자이다.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8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칼 본회퍼는 권위 있는 정신병리학자로서 여러 해 동안 베를린 대학의 교수를 지낸 신뢰받는 학자였다. 본회퍼의 가문은 많은 신학자·예술가·법률가를 배출한 집안이었다. 어머니 역시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황제를 모시는 궁정 목사였으며 조부는 19세기 최대의 교회사가로 이름난 아우구스토 폰 하제였다. 이처럼 본회퍼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그 역시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타고났으며 문필가적 재능과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우수한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도 아름다웠으며 시와 음악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열렬한 복음적 열정이었다.

본회퍼는 17세 때 튀빙겐대학에 입학했다가 다음해 베를린대학 신학부로 전학했다. 교수들은 한결같이 이 젊은 신학도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며, 특히 신학자 하르낙은 그를 ‘천재적 신학 청년’이라고 칭찬했다. 사실 그가 21세 때 베를린대학 신학부 졸업 논문으로 제출한 ‘성도(聖徒)의 친교’는 대단히 우수한 논문이어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를 ‘하나의 신학적 기적’이라고 불렀다. 베를린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목사보(補)로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유니언신학교에서 1년간 연구했다. 여기서 그는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 교수를 알게 되었다. 다음 해 1931년 8월, 그는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베를린대학 신학부 강사로 취임했다.

 

독일 그리스도인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수상으로 임명되었는데 약 한 달 후인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일어나자 히틀러는 ‘권력을 찬탈하려는 공산당의 음모’로 조작 발표하여, 이를 계기로 공산당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대대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긴급권을 행사했다. 1931년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독일민족주의와 반(反) 유다주의 정책을 폈다. 모든 유다인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유다인과의 혼인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유다인들은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히틀러 치하에서 600만 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히틀러 집권 후 독일 교회는 두 가지 싸움을 하게 되었다. 먼저 그리스도교적 자유를 박탈하고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전체주의 국가인 국가사회주의(NS)와 투쟁해야 했으며, 둘째는 어용적인 ‘독일 그리스도인’에 대응하여 ‘고백교회’를 중심으로 싸워야 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고 나자 교회를 이용할 차비를 차렸다. 교회는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독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교회와 민족사회주의를 절충시킨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게르만화 하고자 했다. 이는 ‘민족도 하나, 하느님도 하나, 신앙도 하나’라는 구호 아래 교회를 국가 권력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하였던,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영합하여 일어난 국수주의적 그리스도교 운동이다.

이들은 ‘히틀러의 국가는 교회를 부르고 있다. 교회는 이 부름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는 표어 아래 베를린에서 대회를 열기도 했다. 히틀러는 그후 루트비히 뮐러를 제국 감독으로 임명하고 목사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았다. “나는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 독일 교회에 속한 목사로서 독일 민족과 국가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치며, 독일 민족을 위하여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그후 히틀러는 제국 감독 뮐러와 함께 그리스도교를 뜯어 고치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새 제국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새 교회’를 부르짖었고, “국가사회주의의 정신이 곧 교회의 정신이 되며, 국가사회주의의 의지가 곧 교회의 의지로 대치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독일 교회는 히틀러의 이같은 종교적 간섭과 어용화에 맥없이 무릎 끓지 않았다.

한편 1933년 5월 9일, ‘젊은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니뮐러 목사의 주도로 7천 명 이상의 목사들이 서명한 ‘목사긴급동맹’이 결성되면서 고백교회 운동으로 발전한다. 고백교회 소속 목사들은 체포·감금·파면·교회당 몰수 등의 탄압과 박해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 고백교회는 1934년 바르멘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바르멘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히틀러 치하에서 피의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디트리히 본회퍼이다.

평화와 안보를 혼동하지 말라

본회퍼는 히틀러가 1933년 독일 수상이 되었을 때 한 방송연설에서 수상 직책보다 ‘히틀러’ 라는 한 개인이 우상화 되는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즉 “스스로 신성화 되는 지도자와 직위는 신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본회퍼는 나치정권의 반대자로 지목되었고, 감시 대상이 되었다. 본회퍼는 정치적 계약이나 제도 같은 정치적 방법, 국제자본의 투자 등의 경제적 수단, 군비확장과 같은 군사적 방법으로 진정한 평화가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 하면 이런 것들은 평화와 안전보장(안보)을 혼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평화는 안보와 반대된다. 안보는 불신을, 불신은 전쟁을 초래한다. 안보는 자기를 지키려는 것을 뜻하며, 평화는 신앙과 순종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본회퍼는 히틀러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군비재무장을 서둘렀을 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사태가 더욱 심각한 방향으로 나아가자 본회퍼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시간이 급박하다. 세계는 무기를 가지고 노려보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무섭게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내일 아침 전쟁의 나팔소리가 들릴 수 있다.” 그는 전세계 교회를 향하여 뜻을 모으자고 외쳤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후 7개월 만에 히틀러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선포했으며, 그로부터 5년 뒤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으로 수천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개인의 안전과 동포들의 고난 사이에서

조국 독일의 운명 앞에서 본회퍼는 여러 차례 개인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1933년 10월에 본회퍼는 런던에 있는 한 독일인 교회 목사로 일하게 되었으나, 영국에서 보낸 2년 동안의 이 시절이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었던 최후의 안정된 생활이었다. 그러나 본회퍼는 동포들과 함께 고난을 겪기로 결심했다. 그는 1935년 독일로 되돌아가 고백교회 신학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 신학원 역시 게슈타포의 명령으로 폐쇄되고 본회퍼는 강연이나 저술 작업도 금지 당했다. 그러자 신학원 졸업생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과 침식(寝食)을 함께하면서 가르쳤다. 그후 1939년 6월에 본회퍼는 다시 니버 교수의 주선으로 뉴욕 유니언신학교에서 강의할 기회가 생겼지만 미국에 간 지 한 달 만에 되돌아왔는데, 그가 독일로 되돌아온 지 채 두 달이 못 되어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본회퍼는 당연히 반나치 지하운동에 가담하였다. 그 중에서도 본회퍼는 국방군 정보부 장관 가나리스와 정보부 참모 장 오스터를 중심으로 한 비밀조직에 가담했다. 그 당시 본회퍼와 함께 활동했던 도나니는 가톨릭 신부 J.뮐러를 통하여 교황청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휴전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에 복무하던 고위 간부의 승인 아래 영국 및 프랑스군이 서부 전선에서 휴전에 동의하면 독일 국방군은 국내에서 히틀러를 제거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본회퍼는 도나니의 명령을 받고 영국 정보부의 요청에 따라서 벨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 스톡홀름에 갔으며, 그를 만나 독일 안의 저항운동 상황을 자세하게 영국 국방성에 알렸다. 그러나 저항운동에 협력하던 스위스의 상인 슈미트 부바가 배신하여 1943년 4월 5일 도나니·본회퍼·뮐러 세 사람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국방군 정보부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지하조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같은 해 12월에 가나리스 장관은 오스터의 퇴직과 예비역 편입을 승낙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듬해 44년에는 가나리스 자신도 직위에서 쫓겨났다.

인간은 곤궁 속에서 하느님께로 가고

본회퍼는 1940년~43년, 전쟁과 저항운동을 하면서도 계속 글을 썼다. 그리고 1943년 4월에 체포된 때부터 45년 4월 9일 처형되기까지 약 2년 동안 강제수용소를 옮겨 다니면서 감옥에서 기록한 것을 친구 베트게가 편집해서 출판한 책이 《저항과 복종》이라는 옥중서간이다. 그는 감옥에서 이렇게 묵상했다. “인간은 곤궁 속에서 하느님께로 가고, 구원을 애원하고, 행복과 빵을 구한다. 병과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기를 갈구한다. 인간은 누구나 그리스도인도 이교도조차도 이렇게 한다. 인간은 곤궁 속에 있는 하느님께로 가고, 가난하고 욕을 보고 몸둘 곳 없고 먹을 것 없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죄와 약함과 죽음에 삼켜진 하느님을 본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 있는 하느님과 함께 있다. 하느님은 곤궁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을 찾아오신 다. 육신과 영혼을 그의 빵으로 배불리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죽고, 그들을 모두 용서하신다.”(옥중서간, 41년 7월 18일)

간디에서 히틀러 암살 음모까지

본회퍼는 원칙적으로 비폭력주의자였다. 그는 간디에게서 감명을 받고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1933년 10월 이후 영국 런던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인도에 가서 간디의 평화주의를 배우고자 했다. 간디에게 편지를 쓰고 환영의 답신도 받았다. 그러나 핀켄발테 신학원 책임자로 임명되는 바람에 인도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독일에서는 모든 독일인의 이름으로 참혹한 유다인 학살이 자행되고, 군국주의·국수주의는 인간 존엄성을 사정없이 유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회퍼는 더 이상 원칙적 평화주의에 머물 수 없었다. 하느님의 평화는 ‘오늘’, ‘여기서’, ‘우리 사이에서’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어서 빨리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현실, 즉 복음이 이 참혹한 세계 안으로 들어와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 서 본회퍼는 직접적 정치행동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히틀러 암살 음모에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히틀러는 곧 전쟁’을 뜻했고, 전쟁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악마적 도전이었다. 따라서 본회퍼는 신앙 안에서 국민들이 마땅히 취할 수 있는 저항권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저항권은 보통 ‘민주적 법치 국가에서 기본질서 또는 기본권 보장의 체계를 위협하거나 침해하는 공권력에 대하여 주권자인 국민이 민주적 법치국가의 기본질서를 유지 회복하고, 기본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공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비상수단적 권리’를 말한다. 중세의 교회에서도 자연법에 근거 하여 저항권을 받아들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도 한계상황에서 폭군 살해를 허락하였다.

본회퍼는 교회의 정치적 책임에 대해서 “바퀴 아래 깔린 희생자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것뿐 아니라 바퀴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예를 들어 설명했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으로부터 차의 핸들을 빼앗아야 하지 않겠는가?” 본회퍼는 참된 교회의 모습을 ‘타자를 위한 교회’에서 찾았던 것이다. 오늘 교회는 평화를 위하여 평화를 건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본회퍼는 나치 하에서 박해받는 유다인들을 위하여 소리치는 자만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를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갈라진 종교, 갈라진 백성

큰일을 하자면 언제든지 배신당하여 죽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인가. 본회퍼가 동료의 밀고로 체포당했듯이 예수님 역시 친히 가려 뽑으신 제자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체포당했다. 그리고 먼저 종교 지도자들 앞으로 끌려갔다. 그들의 논리는 언제나 같았다. 만인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로마 황제들은 평화(Pax)를 위하여,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아시아의 번영을 위하여 성전(聖戰)을 일으켰노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상은 제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를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그들이었다. 그리고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민족을 사지(死地)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예수 한 사람이 죽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자기중심적인 기득권층의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백성, 무력하고 소외된 백성들의 열망을 가슴에 품고 산 분이었다. 이 열망이 들판을 불사를 때까지 참고 지켜볼 수 없었던 지배층이 예수님을 체포하고, 심문함으로써 그를 ‘마녀’로 몰아서 화형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내가 숨어서 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요한 18,20) 그만큼 그분은 떳떳했고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한밤중에 은밀히 와서 예수님을 체포해 갔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의 수중에 있고, 백성들은 대놓고 항의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의 의사를 대변하시던 예수님은 경비병에게서 뺨을 맞는다. “대사제님께 웬 말대답이냐?”고 윽박지른다. 관료와 군인들은 오직 주군(主君)을 위해서만 복종한다. 이들에게 정의와 진리와 자비를 요구하는 것은 공염불(空念佛)에 불과하다. 본회퍼가 감옥에서 죽음을 당했듯이, 예수님은 십자나무에 달릴 운명이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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