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아직 우리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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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직 우리집이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3.1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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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41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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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고자 하면, 먼저 찾는 것이 ‘집’이다. 몇 해 전까지 우리집은 산중에 있었다. 전라도 무주 땅 해발 500미터에 자리 잡은 산골이었다. 여름이면 반딧불이가 파란 불똥을 피우며 지천으로 날아다니는 말 그대로 청정한 땅이다. 살던 집이 흙집이라 강풍이 불어대거나 온 종일 비가 내리면 그 소리를 맨몸으로, 온몸으로 들어야 한다. 뒤란에서 대숲이 윙윙거리며 울고, 처마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에 한밤 내 뒤 숭숭한 꿈결을 헤집고 다닌다.

무주 우리 시골집은 이제 사라지고

사방에 양식이 널려 있는 계절엔 덜하지만 날씨가 싸늘해지고 들판에 풀들이 서리 맞아 고개를 숙이고나면, 한사코 집안을 들쑤시고 다니려는 쥐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게다가 이 집에 살자 하면, 보일러 없는 구들방에 온기를 더하기 위해서 땔감을 장만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겨우내 아이들은 콧물이 마를 날이 없고, 거칠한 볼따구니를 빨갛게 달구고 눈밭에서 뒹굴며 지낸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니, 시골생활이 그저 궁색 맞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다른 눈으로 보면 시골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과 더불어 사계절을 고스란히 감당하며 생생하게 맞이한다는 뜻도 된다.

자연과의 관계가 생생할뿐더러 인간관계도 생생하게 맞이할 수밖에 없다. 시골에서 집이란 노동과 휴식이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논밭에서 지은 곡식을 집 앞마당에서 갈무리하고, 밥상이 때로는 들로 산으로 옮겨 다닌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거의 하루 온종일 얼굴을 봐야 할 때도 있고, 아이들은 논밭에서도 놀고 마당과 집안에서도 논다. 이른바 가족들 사이의 생활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낱낱이, 피할 도리 없이 가족들이 만나는 장소가 시골이고, 그 생활의 중심에 물론 ‘집’이 있다.

가족들은 하나같이 집 밖에서도 일하고, 집 안에서도 일한다. 숲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집 안에서 낮잠을 청하기도 한다. 사람이 상품처럼 규격화되어 있지 않듯이, 시골집은 규격이 없어서 그 집에 사는 사람을 닮는다. 식구들이 단정하면 집이 단정해지고, 식구들이 정신머리 없으면 집도 어수선하게 마련이다. 집안이 화목하면 집이 따뜻해진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돌담이라도 예쁘게 쌓으려고 애를 쓰게 되고, 허술한 구석이 있으면 돌보고 손을 대는 것이다. 그래야 폭풍우나 눈보라가 치더라도 집안이 든든하고, 겨우내 땔감을 장만하는 수고를 어렵다 하지 않는다.

그 집이 이미 헐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경주로 이사를 간 뒤로, 그 집을 사서 들어오신 아주머니는 예전에 우리가 살던 그 집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조립식 주택을 지었다고 한다. 흙집은 관리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내내 아쉬웠다. 이사 가기 전에 짐을 정리하는 중에 집 주변을 여러 장의 필름에 담기도 했고, 지금도 앨범을 펼치면 그때 그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그 집은 이제 지구상에서 없는 집이 되었다.

아파트는 집이 아니라 방이다 

경주로 이사 와서는 처음에 불국사 가까이에 있는 저층 아파트를 빌려서 살았다. 처음에 이사 올 때는 경주 인근의 텃밭도 있는 그런 집을 원했지만, 땅이든 집이든 다 임자가 인연이 있어야 맺어진다는 데, 아직 인연이 없다 싶어서 일단 비집고 들어가 살기 시작한 곳이다. 아파트는 ‘집’이라기보다 ‘방’에 가깝다. 그 전셋방을 언제든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살다보니,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고 제법 아파트 생활도 익숙해졌다.

사실상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땔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관리비만 넉넉하다면, 그다지 신경 쓸 게 없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그제야 비로소 쥐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아파트가 주는 편리함과 간편함이 좋았다. 다만 그래도 아파트에 맹점이 있다면, 그 공간에도 삶이 묻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추억이 새겨질 만한 구석이 있을까, 하는 다소 낭만적인, 그래서 좀 배부른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아파트는 대체로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인지, 다른 집을 방문해 보면, 가구 배치마저도 비슷하다. 소파와 텔레비전의 위치까지, 어김없이 닮은 집들이다.

우리집만의 색깔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쓸데없는 짐은 좀 덜어내고, 우리 식구들의 영혼이 곱게 숨쉴 만한 공간이 마련되면 좋겠다. 문득 옛집 안방 풍경 가운데 하나가 떠오른다. 예전엔 어느 집엘 가나 가족들의 이런저런 풍경을 담은 나무 액자가 하나쯤 걸려 있었다. 사진이 귀하던 시절인지라, 그 사진들을 조합하여 모음사진 액자를 만든 것이다. 그걸 보면 그 집안의 내력을 읽을 만했다. 가족들의 삶에 의미와 역사를 주고, 그 흔적을 더듬어 찾는, 그래서 정말 서로가 분명한 가족임을 확인시키는 일이다. 집 구석구석을 오늘 한번 둘러봄직하다. 벽지라도 매만지며 ‘우리집’을 손끝으로 느껴 보는 것 은 어떠한가.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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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건너 암자 옆 외딴 집 

아파트에 산 지 한 1년 되었을까 어느 날 생활 광고지를 들춰 보다가 경주국립박물관 근처에 전셋방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었다. 텃밭을 포함해서 140평이라는데, 전세가 3천2백. 지금 사는 아파트보다 더 싸다. 곧바로 그 집을 찾아가 보았고, 박물관 건너편 논 한가운데 달랑 암자와 더불어 있는 집이었다. 오래된 양옥 슬레이트집이다. 마당엔 잔디가 깔려 있었고, 텃밭농사도 지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단박에 계약을 맺고 집을 옮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건너편 박물관에서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이 울리는 소리가 매 시각 들려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녹음한 것을 정시 마다 틀어 주는 모양인데, 그러면 어떠랴! 들녘에 깔리는 밝은 어둠 속에서 종소리는 감겨오고, 옥상에 올라가 보면 반월성이 눈에 들어온다. 동남산이 가깝고, 대릉원은 걸어서 수십 분이면 족하다. 이 집에 살게 되면서, 우리는 양옥의 편안함과 지리상 천년 경주의 유적을 지척에 두고 산다는 보람에 기뻐했다.

아이에게 방문 학습지를 가르치던 교사가 수맥을 봐 준다면서 한번 측정한 적이 있는데, 원래 논자리를 메워서 지은 집이라서 그런지 수맥이 흐른다며 수맥 차단 매트를 사라고 한다. 그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 하리. 좀 걱정은 되었지만, 그냥 산다. 첫 해는 고추 농사도 조금 지 었지만 내가 서울로 일을 나가게 되면서, 영 돌보지 못해 농사를 망쳤다. 그래도 마당에 심어놓은 꽃은 피어났다. 토마토도 익었고, 골드 메리는 오렌지빛 꽃을 여기저기 퍼뜨렸다. 이젠 아예 텃밭 농사 접고 올해는 꽃씨만 잔뜩 뿌려둘 참이다. 마당 가득 꽃무더기 사태 나도록 기도하면서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내 손길이 닿아야 내 집이다. 전셋집이라도 구석구석 내 온기 닿으면 사는 동안 온전히 내 집이다. 단독주택이란 아무리 양옥이라도 주기적으로 손을 봐 줘야 한다. 화장실도 문제가 생기고, 변기가 막히고, 형광등이 나간다. 막히고 뚫고 나가면 새로 얹는다. 기름 통에 등유 채우고, 여름내 햇볕에 삭아버린 나일론 빨랫줄을 다시 걸어야 한다. 그 빨랫줄에 널뛰듯 바람에 나부끼는 옷가지 걸어 “여기 사람이 산다”고 표를 내어야 집이다. 얼마전 월정교를 복원한다는 공고가 붙었던데, 조만간 우리집 앞에 있는 일정교도 복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집은 헐리고 다시 이사를 가야 한다. 그때까지라도 잘 살자, 그래도 아직 ‘우리’집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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