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선생님 영전에 깊이 머리 숙여
상태바
백기완 선생님 영전에 깊이 머리 숙여
  • 박철
  • 승인 2021.02.18 23: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겨울 한복판을 지나 매화가 피고 산수유가 피는 봄이 오는 길목에 백기완 선생님은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1985년 민통련 사무실에서 백기완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당시 문익환 목사님이 의장이었고, 백기완 선생님이 부의장이었습니다. 두 분 다 선이 굵은 분이셨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과 백기완 선생님은 좌중을 압도하는 점은 비슷했지만 운동의 전개방식이 조금 달랐습니다. 두 분으로부터 저는 많은 영향과 진보적 세례를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때 저는 30살이었고 신혼 초였습니다. 뒤늦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의 길을 갈 것인가, 사회운동가의 길을 갈 것인가? 앞으로의 진로와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해 12월 말 장위동 어느 식당에서 민통련 송년모임을 가졌는데 백기완 선생님은 제게 막걸리를 한가득 부어주시면서 “자네는 처남 김의기의 죽음을 잊어선 안돼. 김의기 열사의 길을 가야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이 비수처럼 지금도 제 가슴에 꽂혀있습니다.

제가 36년 전 만난 백기완 선생님은 한마디로 거침없는 백두산 호랑이 같은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거침없는 입담으로 좌중을 압도하셨습니다. 그후로 선생님은 의식과 삶의 지평은 더욱 진화해 나가셨습니다. 선생님의 지성은 얼음처럼 날카로웠고, 불의에 맞서는 열정은 불보다 뜨거웠습니다. 옥중에서는 글로, 광장에서는 사자후를 토하는 연설로 민중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셨습니다.

 

군사독재에 맞서 함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동지들이 하나둘 광장을 떠나갈 때도 선생님은 오히려 민중 속으로 광장의 한복판을 나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은 관념의 유희와 타협을 가장 경계하시고 미워하셨습니다. 언제나 일관되게 노동자 농민 사회적 약자,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싸워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통일운동에도 앞장 서셨습니다. 지난 1967년 재야 대통령으로 불리는 장준하 선생님과 함께 백범 김구 선생님의 통일 정신을 이어받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 민족사와 민족사상 등을 연구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이후 본격적인 통일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선생님은 탁월한 글쟁이기도 하셨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젊은 날,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 책 제목들이 표지를 박차고 나와 가장 보편적이고 편재적인 당대의 언어로 회자될 정도로 선생님은 혁명적 글쓰기를 선보인 작가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말을 사랑한 예술가였습니다. ‘달동네, 새내기, 모꼬지, 동아리’ 등의 순우리말을 대중화 시킨 장본인이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군사독재의 폭압에 맞서 결연히 투쟁했고, 민족의 통일을 앞당기고자 백방으로 힘쓰다가 수차례 감옥에 갇히고 자신과 가족이 온갖 고초를 겪었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대열의 앞자리에 항상 서 계셨습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용산참사, 밀양송전탑,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투쟁, 파인텍 해고, 콜트콜텍 해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저지 투쟁, 쌀 전면개방 반대 농민대회, 세월호 진상규명, 국정농단 심판 촛불집회 등등 억압받는 민중들의 광장에는 언제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최근에는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동참했습니다. 선생님이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쓴 글귀는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민중을 사랑했는지, 민중의 아픔을 진정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민중의 벗’이었습니다.

백기완 선생님은 평생을 시대의 벽과 싸웠던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민족은 분단되어 갈라져있고, 노동자들은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 분단의 장벽을 넘는 것은 온전히 ‘산 자’들의 몫으로 남았음을 기억하겠습니다.

앞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백기완 선생님 같은 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나와서도 안 됩니다. 선생님이 겪으셨던 그 고난의 역사를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들려주신 장산곶매처럼 살다가 가셨습니다. “딱 한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깊이 새깁니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겨진 자들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옷깃을 여미고 다시 한번 선생님의 영전에 깊이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합니다.

백기완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천국에서 함석헌 선생님, 문익환 목사님, 장준하 선생님, 계훈제 선생님, 김근태 선배님 만나서 돼지고기 수육에 막걸리 한잔하시며 재미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오래도록, 세월이 지날수록 선생님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동안 선생님이 계셔서 많이 고마웠습니다.

2021년 2월 18일

백기완 선생 사회장 부산시민문화제에서 박철 올림

*이 글은 2021년 2월 18일 오후5시 부산시청광장에서 있었던 <백기완 선생 사회장 시민민문화제>에서 낭독한 추도사(追悼辭)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