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복종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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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복종과 사랑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10.15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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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본회퍼, 복있는 사람, 2016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이름을 들으면 단박에 히틀러 암살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된 예언자적 신학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옥중서신-저항과 복종>이 먼저 앞을 가로막는다. 본회퍼는 테겔 군형무소에서 편지를 쓰며, 고난당하는 이들과 함께 자신이 고난당하는 것을 하느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으로 여겼다. 1945년 4월 9일 본회퍼는 플로센뷔르크 형무소에서 처형되어,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처럼 시신이 불태워졌다. 전쟁 막바지였다. 그러나 본회퍼의 죽음은 그가 하느님에게서 얻을 자유로 가는 정거장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순교자들처럼 그는 의연한 기쁨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어서 오라, 영원한 길 위에 있는 최고의 향연이여.
죽음이여, 덧없는 육신이 성가신 사슬을 끊고
눈먼 영혼의 벽을 허물어라.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던 것을 마침내 볼 수 있게.
자유여, 우리는 오랫동안 훈련하고 행동하고 고난을 겪으면서
그대를 찾아다녔노라.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느님의 얼굴에서 그대를 보노라.”
(본회퍼, ‘자유에 이르는 길 위의 정거장들’ 중에서)

허나, 이러한 기쁨은 본회퍼 자신의 말마따나 “오랫동안 훈련하고 행동하고 고난을 겪으면서” 얻은 값비싼 은혜였다. 이처럼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또렷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신앙은 거저 얻을 수 없다는 무거운 진실과, 그 진실을 따라 살고 싶은 이들에게 ‘예수의 제자됨’이 정말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것은 교회의 이런저런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 예수가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직자들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으러 교회에 가는 것도 아니다. 교회 안에는 인간의 완고한 율법과 거짓 희망과 위로의 말씀으로 넘쳐난다. 그러한 것들은 예수의 순수한 말씀을 흐리게 하여 신자들의 참된 결단을 방해하고 있다. 교회 안에는 “예수의 말씀 자체가 아니라 교회 제도의 교설이 우리와 예수 사이에 끼어들고 있다.”고 본회퍼는 비판한다.

예수의 부드러운 멍에 “나를 따르라.”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일시적인 징계와 영원한 벌로 인간을 마음대로 협박하고,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이든 믿고 행하라고 인간에게 명령하면서, 인간을 대상으로 영적인 독재를 하려는 요청이 아니다. 율법의 딱딱한 멍에를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멍에를 지라는 것이다.

“예수의 계명을 온전히 따르고, 예수의 멍에를 아무 저항 없이 짊어지는 사람은 자기의 짐을 가볍게 짊어지고, 이 멍에의 부드러운 압박 속에서 옳은 길을 지치지 않고 걸어갈 힘을 얻는다.”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이 주교와 사제, 수도자와 다른 목회자 등 몇몇 소수의 신앙인에게만 요구된다는 교회의 태도에 반대한다. 이 명령이 오늘날 노동자, 상인, 농부, 군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오히려 자기 제자들에게 버림받은 채 십자가에서 홀로 죽으셨다. 정작 그분이 생의 막바지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십자가 양편에 매달려 있던 살인자들이었다. 십자가 아래에는 원수와 신자들, 의심 많은 자와 두려워하는 자들, 조롱하는 자와 인생에 실패한 자들이 서 있었고, 예수는 그 시간에 그들 모두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하느님 자비는 원수들 가운데서도 살아 있었다. 은총으로 “나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최후의 시간에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시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를 따르라.”는 요청을 오늘 듣는다. 그분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신앙,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투쟁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숙적(宿敵)이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값싼 은혜란 투매(投賣) 상품인 은혜, 헐값에 팔리는 용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

본회퍼는 “값싼 은혜를 판매하는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은폐해 주는 값싼 덮개를 발견한다.”고 했다. 이들은 예수가 언제나 어디서든 당신 피로 우리를 이미 용서하셨으니, 뉘우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죄에서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 (정 마음에 걸리면 가톨릭에서 고해성사를 보면 되겠지. 가톨릭에는 전대사라는 선물도 있다.) 그들은 예수를 섬길지언정 따르려 하지 않는다. 주님이라 부르며 기도할 뿐, 스승이라 부르며 따라 걷지 않는다. 그래서 편안한 신앙이다. 누릴 것 고스란히 누리면서 가능한 신앙이다. 입으로 청하고 돈으로 지불하는 신앙이다. 십자가 없이 영광만 누려도 좋을 신앙이다. 그래서 값싼 은혜로 사는 저렴한 신앙이다.

그러나 값비싼 은혜는 밭에 숨겨진 보물이다. 이 보물을 발견한 이는 가서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기꺼이 팔아서 그 밭을 산다. 이 은혜가 값비싼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이자 마지막 말씀이 “나를 따르라.”였다.

베드로는 부르심을 두 번 받았다. 처음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께서 부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베드로는 생업인 그물질을 그만두고 즉시 그분을 따라나섰다. 마지막은 생애의 끝자락에 등장한다.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본회퍼는 “이 두 경우 사이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뛰어든 한 제자의 생애 전체가 놓여 있었다.”고 말한다. 그 제자는 예수를 거듭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순교할 때까지 그분을 따랐다. 그가 받은 은혜는 값비싼 은혜였다.

그러나 교회가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박해가 끝나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헐값으로 얻을 수 있는 은혜가 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예수를 엄중히 따르면서 얻는 값비싼 은혜는 수도원에 제한되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특정 집단의 특정한 사람들이 행하는 유별난 행위로 여겨졌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몇몇 사람의 칭찬할만한 특별한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리신 명령이다. 하지만 수도원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겸손한 행위가 성인들의 칭찬할만한 행위로 변질되었고, 따르는 자의 자기부정은 경건한 자들의 최종적이고 영적인 자기주장으로 둔갑하였다.”

본회퍼는 예수를 따르는 것 자체가 그분이 주시는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면서도 ‘예수 따르기’는 거절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자신과 자신의 신앙을 기만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교회 주변에는 “까마귀처럼 ‘값싼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그 시체로부터 독(毒)을 받아 마시는 사람”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 결과, 예수 따르기가 교회에서 실종되었다고 본회퍼는 한탄한다.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

“부르심이 있자, 부름 받은 자의 복종 행위가 즉각 이어진다. 제자는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응답하지 않고 복종의 행위로 응답한다.”

본회퍼는 예수의 부르심에 복종하는 것밖에는 믿음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한다. 제자는 예수가 부르면 베드로처럼 지금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상생활에서 “걸어 나오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제자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삶에서 철저한 불안전 속으로, 전망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것에서 전혀 전망할 수도 없는 뜻밖의 것 속으로,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유한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던져진다. 이를 두고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만 매이는 것, 부르시는 분의 은혜를 통해 모든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57-62)

하지만 복음서에서 확인하는 것처럼, 누구나 자신이 원한다고 모두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제자는 제자됨을 자청했으나 예수의 길이 고난의 길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따라 오라고 부르지 않는다. 두 번째 제자는 먼저 자기 볼일을 보고서 따르겠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예수의 부르심과 부르심을 받은 자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세 번째 제자는 자기 뜻대로 하면서 조건을 제시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예수가 바랐던 따르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예수의 뒤를 바짝 따르기 위해, 세리는 즉각 세관을 떠나고 베드로는 당장 그물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본회퍼는 “그분의 말씀은 교리가 아니라 새로운 실존”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와 함께 머물고 예수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분의 부르심은 모든 속박을 풀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박만 받게 했다. 모든 다리를 끊고, 끝없는 불안 속으로 걸음을 옮겨,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본회퍼는 “믿는 사람은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믿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의 크기를 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고 단언한다. 믿음이 값싼 은혜가 되지 않으려면 복종의 첫걸음을 떼야 한다. 이 복종의 첫걸음은 베드로가 배에서 떠나고, 부자청년이 재물에서 벗어나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예전과 다른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가톨릭교회가 예수의 부르심에 복종하는 삶을 수도자와 성직자들에게 특별한 가능성으로 열어놓았고, 다른 신자들은 교회와 그 명령에 복종하면 그만이라고 가르쳐 왔다고 비판했다. 다른 교회에서는 “일요일에 그대의 집을 떠나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나오라.”는 명령으로 바꾸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행위로는 결코 그리스도께 이르지 못한다. 이와 관련해 복음서는 부자 청년 이야기에서 분명한 태도를 보여준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 19,2l; 마르 10,21) 여기서 자발적 가난은 예수를 따르는 길로 제시된다.

이 대목에서 본회퍼는 놀라운 이야기를 한다. “복종이 무엇인지는 복종하면서 배우는 것이지 질문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던 부자청년과 어느 율법학자는 하느님의 계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또 다른 방법은 없는지” 계속 질문에 빠져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논쟁을 통해 얻지 못한다. 영생을 얻고 싶지만 예수를 따르기 싫은 자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느라 서로 논박하고 단순한 계명을 복잡한 추론으로 밀어 넣는다. 교회 안에는 예수도 알아먹을 수 없는 신학논쟁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다. 그분은 누가 우리 이웃인지 논박하지 말고, 네가 가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라고 명령한다. 복음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다만 단순하게 복종하는 자가 없을 뿐이다.

본회퍼는 예수의 말씀을 내적인 자유로 이해하는데 반대한다. 예수께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여라.” 하였지만, “그래서야 어떻게 생계를 이어 가겠어. 이 말씀은 마지막에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내적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뜻일 거야.”라고 우리는 둘러대기 쉽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나라를 덤으로 얻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체적으로 부르시고, 우리는 구체적인 복종으로만 실제로 믿음에 이른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3-26)

예수는 “어떤 부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지 않으신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예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은 명령에 복종하는 대신에 명령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려 든다.

일상의 십자가, 고독한 예수 따르기

그런데 문제는 교회조차 베드로처럼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내심 그런 주님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매이는 것이며, 따르는 자를 그리스도의 법, 곧 십자가 아래 세운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세례는 그리스도인에게 날마다 죄와 악마에 맞서 싸우게 한다. 하루하루는 육체와 세상을 통한 그날그날의 시련으로 제자에게 그리스도의 새로운 고난을 안겨 준다. 이 싸움에서 입은 상처와 그리스도인이 이 싸움에서 얻은 흉터는, 십자가를 통해 예수와 친교를 맺고 있음을 드러내는 생생한 표지다.”

예수와 친교를 맺고 있는 제자는 나와 예수 사이에 어떤 것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나와 세상 사이에, 나와 가족 사이에, 나와 교회 사이에 계신다. 중간에서 그분은 나와 직접 연결되어 있던 세상과 가족과 교회마저 끊어놓기도 하고 연결시키기도 하신다. 그분은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기도를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웃에게 간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간다. 그분은 내가 타자에게 이르는 모든 직접적인 길을 차단하신다.

산상설교: 그리스도인의 비범한 삶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부르심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본회퍼는 그 핵심을 산상설교에서 찾는다. 제자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세상에서 필요한 안전장치도, 한 푼 재산도, 위안 삼을만한 영적 능력과 지식도 없지만 행복하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 살지만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세상이 축제 기분에 젖어있어도 멀찍이 비켜서서 슬퍼한다. 축제의 환희에 젖은 배가 이미 침수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일부러 슬픔을 추구하거나 세상을 경멸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동포들의 슬픔에 연대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책망하면 잠잠히 있고, 사람들이 폭력을 가하면 견디고, 사람들이 밀어내면 물러난다. 그들은 온유하여 앙갚음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의를 갈망한다. 세상의 죄가 그들 어깨를 누르지만 그들은 결국 주님 만찬에서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 때문에 자신들의 명예와 존엄성을 잊고 죄인들의 공동체를 찾아다닌다.

“그들은 약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천대받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 부당한 일을 겪는 사람들, 배척받는 사람들, 괴로워하고 걱정하는 모든 자에게 대한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을 품는다. 그들은 죄와 허물에 빠진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자비가 끼어들지 못할 만큼 심한 곤경이나 지독한 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다. 선악에 때 묻지 않고, 그리스도께 온전히 그리고 통째로 속한 마음을 지녔다. 거울 같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는 이 사람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선으로 악을 극복하는 평화의 사람이다. 그들은 미움과 전쟁이 난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의 발기인이 된다. 제자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 때문에 세상에서 받는 보답은 인정이 아니라 배척이다. 의로움 때문에 고난 받는 제자들은 가난한 이들과 동일한 약속을 받는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분과 함께하여 모든 것을 얻었다.

그래서 예수는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 때문에”란 표현은 제자들이 모욕을 당하지만 실제로 모욕을 받은 당사자는 예수 자신이라는 뜻이다. 예수 제자단은 가난과 고난을 통해 세상의 불의를 매우 강력하게 증명한다. 이들에게 예수께서 “복이 있다, 복이 있다.” 외치시면, 세상은 “꺼져, 꺼져 버려!” 소리친다. 이들이 상급으로 받을 하느님 나라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그 나라에서) 하느님께서 눈물짓는 외인들의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시고, 굶주린 이들에게 손수 만찬을 차려 주신다. 상처 입은 육신과 고문당한 육신은 거기에서 아름답게 변모된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는 전혀 쓸모없는 자들로 여겨졌지만, 예수의 눈에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선의 상징”이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소금이 세상에 스며든다. 그들이 세상의 빛이다. 그들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한, 삶 전체가 이미 그분처럼 빛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은 ‘형제애’다. 제자공동체(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에 우리의 재산, 우리의 명예, 우리의 목숨을 바쳐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원수에게도 그러해야 한다고 예수는 가르친다. 본회퍼는 마음이 증오로 찌든 사람에게 무엇보다 사랑을 선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여라.’ 원수가 우리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겨 우리를 저주하더라도, 우리는 두 손을 들어 올려 그를 다음과 같이 축복해야 한다. ‘우리의 원수 그대들, 하느님에게 복음을 받은 그대들이여, 그대들의 저주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습니다. 그대들의 빈곤이 하느님의 부요함으로 채워지고, 그대들이 헛되이 맞서 싸우는 분의 복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대들이 이 복만을 받는다면, 우리도 그대들의 저주를 달게 받겠습니다.’”

본회퍼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로마 12,20)는 구절을 기억하며,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한다. 이것이 최상급 계명이라 한다. 이런 사랑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다. 사랑은 원수가 자기에게 어떤 모욕을 가하는지 묻지 않고,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만을 묻기 때문이다.

“제자가 이 길 위에 확고하게 서면 설수록, 그의 사랑은 더욱더 확실한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 원수의 증오를 확실히 이겨 내게 된다. 그 사랑은 제자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전적으로 원수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따르는 제자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넘어서는 비범한 사랑을 요청받는다고 한다. 이 비범함의 본질은 “예수를 따르는 이의 실존이며, 빛나는 등불이자 산위의 도시이며, 자기부정의 길, 완전한 사랑의 길, 완전한 진실의 길, 완전한 비폭력의 길”이라 말한다. 이들은 항상 그리스도만을 바라본다. 그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이 비범함은 그분에 대한 온전한 복종에서 비롯된다. 

 

* 이 글은 <가톨릭일꾼> 2020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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