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권총이 발사되지 않으면, 아마도 내일 발사될 것이다
상태바
오늘 권총이 발사되지 않으면, 아마도 내일 발사될 것이다
  • 한상봉
  • 승인 2016.06.27 15: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여덟 단계-9 (죽음, 세번째 이야기)
앙리벨쇼즈, 성 디오니시오의 순교

죽음의 경고

죽음이 우리에게 삶의 본질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참 다행한 일이다. 어떤 이는 가까이 온 죽음에서 이상하게도 “해방의 느낌”을 가지기도 한다. 이때만큼 삶을 충만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많은 걱정과 주의가 별 상관이 없게 된다. 많은 것들이 그것들의 참다운 가치에 따라 분명해지고 확연하게 드러난다. 또한 더욱 심오해진다.

죽음은 가장 용감한 사람들에게도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키게 할 수 있지만 더 긍정적인 영향도 가져다 줄 수 있다.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강력하게 정신을 집중시켜서 영적인 통찰과 도덕적 분별력을 크게 해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은 “행복한 죽음”이란 적절한 예고와 준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죽음이라고 한다.

<준주성범>의 저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썼다.

“당신은 마치 오늘이 당신의 죽음의 날처럼 여기며 모든 행위와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사는 동안 내내, 죽을 때에 발견하고자 하는 자기의 모습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행복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사람이다.”

<무지의 구름>(14세기 페스트가 창궐할 때 쓰여진 신비적 고전서)을 쓴 익명의 영국 저자는 기도할 때 어떻게 마음을 모을 수 있는지 다음의 충고를 하고 있다.

“기도를 시작할 때, 그 기도가 길건, 짧건 상관없이 가장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길은 기도가 끝났을 때에 당신이 죽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기도를 끝내기 전에 당신이 죽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론 확실하게 당신은 기도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에 의지하는 것은 잘못이고, 당신자신에게 그것을 약속하는 것은 실수이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에서 “우리 모두는 탄환이 들어있는 권총을 우리 머리에 대고 살고 있다. 오늘 권총이 발사되지 않으면, 아마도 내일 발사될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발사될 것이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다르게 행동해야 하는가?” 묻는다. 이럴 때 어떤 걱정을 내려놓아야 하며, 어떤 일이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판단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우리는 전쟁, 테러리즘, 그리고 비이성적인 폭력 등 죽음의 실제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개인의 죽음이 대부분 병원이나 양로원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죽음을 마치 없는 것처럼, 직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의 행동과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중대한 이유나 급박한 약속처럼 보이지 않고, 통계숫자로 우리의식 속에 남게 된다.”고 엘스버그는 말한다. 그러나 죽음은 항시 우리 곁에 있다. 이때에 죽음의 포로가 되지 않고 넘어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왕 앞에 자신의 양심을 내보이며 죽음을 불사했던 토마스 모어의 평온함과 자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에서 성공회를 분리시키려던 헨리 8세에게 저항했던 토마스 모어는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며 충성을 맹약하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 나는 오늘 죽는다네. 그러나 내일은 자네가 죽을 것이네.”

성인들이 ‘매 순간이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여기며 살지는 않았겠지만, 죽음에 대해 충분히 묵상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 이상 족쇄가 되지 않았고, 죽음이 그 권능을 잃었을 때, 행복을 포함한 모든 것이 가능했다. 죽음을 넘어서면 자유가 기다린다.

생명의 씨앗

순교자들은 참으로 그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포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처형대로 나아가면서 찬송가를 부르거나 공개적으로 기도했다. 용기와 확신에 가득 찬 그들의 모습에 처형자들조차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었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북돋아 주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인 테툴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그들의 강력한 신앙을 선포하였다.

마르틴 루터 킹 2세 목사는 1967년의 한 인터뷰에서 “나는 매일 죽음의 위협과 함께 살고 있다. 만일 죽음이 나를 정복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전혀 내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니라 높고, 고귀하고, 선한 진실들을 전하는 나의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가, 이다.” 라고 말했다. 몽고메리 버스타기 거부운동 이후로 엄청난 폭력과 증오의 대상이 되면서, 기도는 더 간절해졌다. 그때에도 킹 목사는 “어디에선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마르틴 루터! 의를 위하여 일어서거라. 정의를 위하여 일어서라. 진리를 위하여 일어서라. 그러면 보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1968년 4월 멤피스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청소원들의 파업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당연히 살벌한 상황에서, 그는 이렇게 연설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오래 사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나를 산꼭대기에 올라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나는 꼭대기에서 둘러봅니다. 약속된 땅을 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과 함께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오늘밤 우리가 한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늘밤 행복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도 무섭지 않습니다. 나의 눈은 영광스럽게 오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그는 다음날인 4월 4일 암살되었다.

결국 성인들의 행복에 관한 한, 죽음 앞에서도 ‘내적인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이며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고 해도 “우리의 영혼과 운명이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는 분명한 믿음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서 14,7-8)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