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제자: 가장 진실로 인간적인 것의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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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제자: 가장 진실로 인간적인 것의 건축가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11.1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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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신앙 그리고 미래-4

또 거기에는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갈릴레아에서부터 예수께 시중들며 따라 온 여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있었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마태 27,55-56)

여성의 사도신경

나는 당신의 모상대로 여자와 남자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 분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지구를 돌보도록 맡기셨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아이이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여자이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여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을 좋아하셨으며
그들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분은 여자들과 함께 하느님의 왕국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시고
여성제자들은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돌봐드렸습니다.
나는 우물가에서 한 여자와 함께 신학을 논의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처음으로 그 여자에게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알려주셨고
그래서 그 여자는 기쁜소식을 온 마을에 가서 전했습니다.
나는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그 여자를 꾸짖었던 남자 손님들을 비난하셨습니다.
나는 당신을 섬겼던 한 여성에 대하여
그가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안식일날 한 여성을 치유하고 죄를 사하여 주셨던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그 여자를 인간으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있는 한 여인으로,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하여 청소하고 있는 여인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임신과 출산을 어떤 벌이 아니라 깊은 경외심을 갖고
생각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임신과 출산은 변혁을 위한 은유이며
획기적인 사건이고
분노를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태어남입니다.
나는 당신을 자신의 날개아래 새끼들을 모아들이는 암탉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부활하신 후 맨처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가서 전하라’는 환희의 소식과 함께 그 여자를 보내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구세주의 하나되심을 믿습니다.
그분안에는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노예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안에서 모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창조의 물결위에서
이 지구위에서 살아움직이는 성령을 믿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여성적 혼이신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께서는 암탉처럼
우리들을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당신의 날개 아래로 우리를 감싸주시고 계십니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

 

위의 성서구절들을 읽을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생활과 일에 있어 여성들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이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얼마나 무시되어 왔는지 정당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는 이 여성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클레오파스, 요안나, 수산나, 살롬 등. 그들은 예수님의 초기 공생활 때부터 갈릴래아에서 함께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골고타 그리고 부활하신 동산까지 충실하게 그분을 따랐다. 그러한 충실성 때문에 그들은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 되었으며 사도들 중의 첫째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루카의 부활사화구절 (24,1-8)에 보면 빛나는 옷을 입은 한 사람이 겁에 질린 여인에게 상기시킨다. “그분이 전에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느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다. 이러한 기억이 성서의 기록에는 비록 명백한 표현이었지만 여성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가장 친밀한 대화를 나누게 하였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우리는 여성제자들이 충실하게 그들의 스승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많이 망각해왔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처럼 우리는 여성제자들의 현존을 간과해왔을 뿐 아니라, 그들의 제자됨의 내용과 질적인 측면 역시 무시해왔다. 여성들의 직분은 분명히, 봉사의 직분으로서 예수님과의 사랑에 찬 관계에서 비롯되는 직분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돌보고 또한 다른 제자들을 “그들 자신의 양분으로부터” 돌본다. 그들은 예수님 추종자들의 인간적 필요를 채워준다. 그들은 또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 장례준비를 정성스럽게 한다. 여성제자들은 공동체를 대표하여 곡(哭)하는 직분을 수행한다. 예수님의 인격에 관한 이러한 주의 깊고 정성스러운 직분때문에 여성들은 그분의 부활을 첫번 째로 알게 되었고 또한 첫번 째로 알리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여성들의 영성은 행동의 영성이며 관심과 배려의 직분이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에서 확인된 섬김의 영성이다. 발을 씻기심으로서 예수님은 이 섬김의 직분이 의미하는 바를 표현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 요구에 대한 섬김이다. 실상 예수님은 분명하게 역할을 거꾸로 놓음으로써 지도력의 상식적인 형태를 뒤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스승이며 주(主)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요한 13,14-15)

위의 구절은 보통 어떤 상징적인 차원으로만 해석되어왔으며,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섬김의 행동을 여성제자의 봉사직분이라는 맥락 속에서 본다면 “맹목적으로 상징적인 예식”의 차원에 머물게 할 수 없다. 섬김의 행동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행동으로 실재화되는 것은 풍부한 상징적 의미에 있어 매우 기본적인 것이다. 이 육화는 남자들에게 여성들이나 노예의 봉사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쳐버렸다. 여성들에게 이 사실은 아주 명백하다. 그것은 그들이 지니는 봉사직분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곧 육체와 정신의 분리, 여성과 남성의 분리, 노예와 자유인의 분리를 치유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모셨고 장례를 준비했기 때문에 부활을 본 첫번 째 증인이었음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 인간체험의 핵심에 숨겨져 있다. 우리는 이제 겨우 그 신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 생활을 형성해가는 허위의 이분법과 육체와 정신의 위계적 관계, 권위와 봉사의 관계들을 벗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과 그들의 체험이 매우 중요한 실마리라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교회와 여성제자직

교회의 종교교육은 다른세계, 즉 내세에 비중을 두면서 행해져왔다. 구원사업의 과정에서 우리는 신학적 철학적 차원에서 이분법을 강요당해 왔다. 이 이분법은 인간체험을 육체-정신, 거룩함-속됨, 자연-은총, 교회-세계, 수도자-평신자 등으로 해부하여 왔다. 우리는 유년기 때부터 성인들을 찬양하고 모방해왔는데, 이들은 가장 성공적으로 육체와 세계, 속된 것에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강조점은 세계와 육체를 초월하는 데 두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육체를 통하여, 이 세상 속에서 그리고 소위 세속의 질서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내용의 이분법은 우리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기념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분법은, 거룩함이란 실제로 생활을 통하여 짜여지는 것이며 창조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찰과 인간적 행동이 하느님의 계시의 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이미 현존하고 있으나 앞으로 인간역사속에서 계속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못 이해하게 만든다.

여성들은 이러한 이분법에서 가장 첨예하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여성의 육체, 신체성을 강조하고 그들을 성적인 존재로 간주하여 왔다. 실제로 우리 교회역사의 어떤 시기에 여성들은 그들이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죄의 근원으로 간주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이 영혼에 대한 과장된 강조와 육체의 비하라는 무게를 지니고 태어난다면, 그들의 체험은 또한 모든 이분법의 출발인 육체-정신의 이분법을 초월할 열쇠를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생명의 육체성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었다. 첫번째는 아이의 임신이며 두번째는 인간가족의 신체적 안녕에 관한 보살핌이라는 전통적 책임인 것이다. 생명은 보살핌을 요구하며 여성의 생활은 생명의 보살핌에 헌신적으로 기여해 왔다.

여성들의 참된 힘은 “가장 진실로 인간적인 것의 건축가”로 간주되어 왔다. 여성들은 가족과 공동체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핵심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모순은 이러한 “여성의 일”이 너무나 무시되어 왔고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여성의 일은 너무나 기본적이고, 너무나 근본적으로 인간적이기에, 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여성들에게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는 그들의 체험과 그 체험으로부터 얻어지는 지혜를 거부하는 것이다.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여성들은 심오하게 육화적이며, 육체가 단순히 영혼을 간직하는 집이 아니라 정신을 육화시키는 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인간존재의 일치에 관한 치유적 비전은 우리 생활의 또다른 이원법을 치유하는데까지 확산된다. 교회-세계, 거룩함-속됨, 수도자-평신자 등의 이분법은 모두 허위의 계급체제적 가치관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수도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원론의 비전을 나타내고 있다. 어떻게 한 형태의 성소가 다른 형태보다 더 수도적이 될 수 있는가? 오직 한 형태의 생활을 “수도적”이라고 함으로써 다른 모든 형태의 생활들의 거룩함을 교묘하게 절하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인위적 계급제도 아래 인간의 성이 미묘하게 무시되고 있지 않은가?

평신도의 역할이 이 세계에 관한 것이며 “수도자”의 역할은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교육을 받을 때, 우리는 또다시 누가 무엇이 거룩한 것이며, 누가 무엇이 세속적인 것인가에 관한 미묘한 평가에 휘말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목교서에서 주교들이 그들의 책임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정치와 경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이분법의 표현이다.

생활의 심오한 일치를 재발견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엄청난 도전들 가운데 하나이다. 거룩함과 속됨, 수도자와 평신도, 육체와 정신은 삶의 분리된 측면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삶의 모든 측면들은 거룩함 속에 스며들어 있고 모든 사람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이 된다는 것은 육체-정신이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삶에 관한 이러한 심오한 일치의 비전에서 우리는 인간생활의 질에 관한 봉사직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도전, 지구를 존중해야 하는 부르심, 평화를 증진시키는 것 모두가 복음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에 기본적인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행위가 결코 상징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와 봉사가 교회와 세상속에서 하느님의 권위를 참다웁게 드러내는 행위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여성과 그의 체험이 하느님의 계시를 충만하게 드러내는 구심점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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