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여 말하라, 주저 없이 솔직하게 망설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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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여 말하라, 주저 없이 솔직하게 망설임 없이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11.04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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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신앙 그리고 미래-3

그 여자가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겠지요” 하자 예수께서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4:25-26)

사마리아 여인의 솔직함이 예수의 마음을 열었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특별한 신원을 예수께서 단순하게 인정하신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기념할만한 계시의 순간에 그분은 왜 사마리아 여인을, 하필이면 왜 이방인을 택하셨을까? 또 왜 여성인가? 왜 좋지못한 평판을 듣고 있는 이 여성을? 여성과 예수님 양쪽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진실이 터져나온 그 만남의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우리는 여기에서 기억에 오래 남을 이야기를 듣는다. 인간의 복잡함, 편견, 긴장, 오해, 열린 만남, 신뢰와 의심, 상호계시, 회심, 열광 그리고 마침내 결단과 투신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수, 사마리아 여인, 사도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다.

요한 사가는 예수와 제자들이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래아까지 여행했어야 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보통으로 유대인이라면 사마리아를 거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여정은 길고 무더웠으며 그들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 마을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피곤하셨고 갈증을 느끼셨다. 이 마을에서 예수님은 이방인이고, 같은 동료들에게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거부당하고 있던 한 사람에게 물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여인은 상황의 모순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 요청에 도전하였다. 그 뒤에 이어지는 생생한 대화는 솔직하게 당장의 만남에 충실하려는 예수님의 의지와 여인의 독립심, 영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 모두는 신선하고 지혜가 가득한 대화에 몰두해 있었다. 이어 여인은 마을로 달려가 “기쁜 소식”을 퍼뜨렸으며 예수님은 하느님의 추수의 징표인, 이 여인의 회심에 감동해 계셨다. 제자들은 당황한 관찰자로 남는다. 

신체적인 세계와 신학적인 세계 모두에서 보여 준 이 여인의 곧고도 실천적인 자세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로 드러내도록 길을 터준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수”를 줄 수 있다는 예수님의 응답에 그 여인은 예수님이 샘에서 물을 길어올릴 두레박이 없다고 말했으나 예수의 힘이 야곱보다 위대한지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영원히 갈증을 없애 줄 물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했을 때, 그 여인은 물을 길어 마을까지 가져가야 할 여자의 일상적인 일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나그네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던 개인사, 즉 남편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그 여인의 정직함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여인의 삶에 관한 당신의 지식을 털어놓게끔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여인은 대화의 주제가 두레박과 물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자 여인은 사마리아인들이 씨름하고 있는 실질적이고 신학적인 딜렘마인, 예배의 장소에 관하여 털어 놓았다. 여인은 예수님의 대답속에서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하였고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라는 단순한 선언으로 응답하신다. 여인은 이 계시를 요청하지 않았다. 여인은 그 계시를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와의 만남에서 나타난 여인의 충실함과 진실성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기에 충분히 수용적인 자세를 드러낸다.  

여인은 이 일을 겪고서 그 계시의 사도가 되었다. 똑같이 올곧은 정직함으로, 여인은 마을로 달려간다. 그리고 일어날만한 거부와 멸시앞에서 여인은 사람들을 종용하여, 가서 자신의 과거사를 전부 알고 있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고 한다. 여인은 자신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새롭게 발견된 진실을 독점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와의 만남에서 얻게된 “기쁜 소식”을 자유로이 전달했다. 여인의 정직함은 사람들이 직접 예수와 만나 진실을 얻도록 하였고 그럼으로서 그들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그분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알도록 하였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여성에게 말길을 열게 하신 예수

오늘날 여성들이 회의를 할 때나 다른 중요한 모임에서 자신들이 내놓은 좋은 영감들이 무시되거나 별로 중요치 않게 여겨지는 경험을 만힝 한다. 또 여성들이 지니고 있는 기술, 재능 그리고 투신들이 별로 존중되지 않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문화적 혹은 사회적 관습 때문에 남성들만 발언하고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 당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더 심각한 상황속에서 우리는 여성들이 경찰, 법정 그리고 때로는 교회에서나 친구들에게 굴욕적인 대우를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신 태도는 오늘날에조차 드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성의 현실에 대한 점차적인 자각은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높여 여성들의 체험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며 여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우리는 지금 수많은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부정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의 불합리함이 마침내 드러나고 있다. 이제 사회는 합리적인 근거없이 “희생자를 비난하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면 경제분야에서 가난에 떨어지는 여성과 아이들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통계를 보면 가히 “가난의 여성화”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매 3명의 성인당 2명의 가난한 사람이 여성이며, 매 4명의 아동당 1명이 가난속에 성장하며, 복지대상자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또 결손가정 대부분을 여성이 책임지고 있으며, 가난한 노인들 가운데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이러한 경제적 현실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성이 물려받은 의존적인 유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지배적인 편견의 결과이다. 또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여성과 남성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고 또 사회의 무력한 사람들, 젊은이들, 노인들, 장애인들, 여성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문제들은 여성들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 사회의 문제이며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나면서 보여준 태도를 두고 다시 한번 성찰해야 한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의 고통은 솔직하고도 단순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과 자녀들의 존엄성을 지켜야 할 싸움에 연대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단순히 물질적 도움을 주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그들이 겪는 뿌리깊은 억압을 알아보고 있는지, 우리의 편견을 고칠 의사가 있는지 되물어야 한다.

우리는 가정 생활에 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성찰하고 여성들의 기본적인 생활조건이 마련되도록 그들과 함께 협력할 생각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가슴을 열고 참다운 평등과 참다운 상호성을 가난한 가족들, 가난한 여성들과 그들의 자녀들 사이에 실현할 결심이 서 있는가?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 정치, 경제적 구조를 이 세계에 세우는데 협력하겠는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오늘날 하느님의 계시를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힘차고 생기있는 사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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