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죽임당한 그 자리에서 부활하는 해방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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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죽임당한 그 자리에서 부활하는 해방전통
  • 김진호
  • 승인 2019.09.09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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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운동의 재건-3

십자가 처형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이것은 고대의 전형적인 ‘잔혹극’의 한 실례다. 잔혹극이란 ‘희생양’의 배제를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형식으로 공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권력의 지엄함을 승인하게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중을 향한 단순한 위협 수단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겪는 고난 상황은 억제된 욕구를 통해 무의식 속에 감금된다. 그러나 무의식은 돌출구를 향해 끊임없이 인간의 내면을 요동치고 다닌다.

사진출처=pixabay.com

여기서 체제는 피압박 대중의 욕망분출 방식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욕망 분출의 기회를 봉쇄하는 극단의 배제집단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배제집단을 천민 계층(maginal human)이라 하는데, 대중은 이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카타르시스를 (대체로) 일상 속에서 경험한다. 이때 극단의 배제집단은 자신의 욕망분출의 계기를 잡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을 ‘광기’의 사람들, 즉 악령 들린 사람들로 만드는,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배제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사회적 지배의 기재로 활용된다.

다른 한 유형은 잔혹극을 통한 욕망의 카타르시스다. 대중은 출구를 찾아 정처 모르게 내면을 휘젓고 다니는 무의식적 욕망을 분출할 안전한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잔혹극의 희생양이다. 대중은 억압된 욕망에 분풀이라도 하듯 분노를 한껏 그에게 폭발시킨다. 그리하여 권력은 그 대상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잔혹하게 처벌한다. 권력이 마치 정의의 심판자이기라도 한 듯이. 요컨대 잔혹극은 대중의 축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축제를 축제로서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자신이 역모자의 적극적 추종자임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십자가형은 처형자를 위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인 사람을 재판 없이 함께 처형하는 관례를 동반했던 것이다.

〈마르코복음〉 15장에는 빌라도 법정에서의 일화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빌라도는 폭동 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인 바라빠와 예수 중 누구를 살릴 것인가고 군중(오클로스)에게 묻는다. 군중은 바라빠를 내놓으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를 처형하라고 선고했다고 한다. 이 줄거리 자체는 역사적 개연성이 전혀 없다. 군중이 법정에서 판결에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고, 빌라도에 관한 성서 밖의 다른 문서들에 따르면 그의 인물 됨됨이는 유다 백성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압력에 굴복할 것 같지 않다. 더욱이 폭동을 일으킨 반란혐의자를 석방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마도 법정 안에서의 일을 도무지 사실적으로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람들 사이에서의 소문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허구성 속에서도 청중에게 호소력을 갖는 어떤 역사적 뼈대가 들어있을 것이다. 청중은 이 단락에서 바로 그것을 읽어냈을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그 비밀이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라는 문구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청중이 생각해낼 수 있는 상상력의 범주가 사실성을 지니는 것이 바로 이 구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처형과정을 가슴 아프게 되뇌며 이 이야기를 퍼뜨렸던 사람들은, 예수에게 환호했던 자들이 도리어 그이를 죽이라고 소리친 것을, 그이의 주검 앞에서 퍼붓던 그들의 야유를, 그 가슴 아픈 배신감을 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대망하며 그 나라를 쟁취하겠다고 열광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도리어 그 나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선동자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사람들은 바로 이 장면에서 되뇌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변혁을 위한 부활

메시아가 일으킨 변혁을 향한 불, 아니 메시아라는 변혁의 불. 그것을 지르는 데 공범이었던 자들이 어느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을 발하는 화재경보기에 놀라 무대에서 흩어져버린다. 이제 그들 중 누구도 성전의 억압의 장치들을 불 질러 태워버려야 한다는 ‘불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다. 화재경보기가 울린 뒤, 불을 냉동시켜버릴 듯 거세게 내뿜을 소방차의 잔인한 물줄기가 온 세상을 뒤덮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이 세상을 향해 찢어질 듯 경고음을 발한 뒤, 그 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불의 호소’만이 허공 속에서 춤판을 벌이며 남은 공연을 실연할 뿐.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고, 추종자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멀찍이서 침묵 속에 관망하는 가운데, 처절하게 찢겨지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예수는 죽어간다. 여기서 ‘신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잔혹극의 가학성, 권력과 대중의 공모 속에 벌어지는 역사의 사디즘(sadism) 속에 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신은 죽었다. 아니 가학성을 가학적으로 보복하는 신은 죽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변혁 행위를 꿈꿨으나 하느님은 변혁행위를 통해 예수와 만나지 않았다. 예수사건은 바로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는 모든 이의 침묵 속에 도살당한다. 바로 그 현장, 신마저 침묵하고 있다는 바로 그 현장에서 변혁 행위의 주체인 신도 함께 도살당한다.

그런데 신은 죽지 않았다. 권력과 대중의 가학성 속에 목 베인 신은 바로 피학성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가학성에 도살당하는 고난의 담지자가 됨으로써, 새로운 가학성의 주체가 되는 변혁의 순환 도식, 윤회의 수례바퀴에서 벗어난 것이다. 해탈이다. 곧 예수는 죽임 당함으로 비로소 함께 도살당한 하느님과 만난 것이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모든 하느님나라 사건의 원사건 말이다.

인류의 해방주의자들의 무수한 변혁 실천이 성공을 거둔 그 지점에서 돌변하여 발현하는 그 해방주의자들의 가학성, 그래서 성공하자마자 인류의 해방 대망에서 그 숭고한 해방자의 계보에서 그들의 전통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변혁의 성공은 승리의 환호성을 가져오지만, 성공과 함께 그 전통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후대인들은 다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도살당한 신의 사건, 신의 마조히즘(masochism), 여기서 우리는 숭고한 해방 전통의 계보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본다. 신이 죽임당한 곳에서 하느님 사건은 해방 전통이라는 불수레를 타고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신의 마조히즘, 그 예수사건은 바로 당신의 죽임당함에서 절정에 이룬다. 신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만남은 모든 죽임당한 자들과의 만남이며, 모든 죽임당함을 넘어서려는 전통과의 만남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사건은 해방사건의 원 사건이며, 동시에 죽임당함의 부활사건이다. 그리고 이 부활사건은 모든 죽임의 전통에 대한 비판을 극단화한다. 정박지를 거부하는 순례자의 길은, 그 유목민적 삶은 바로 생명의 전통, 부활사건의 속성인 것이다.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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