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 할머니, 그분들도 한 때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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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 할머니, 그분들도 한 때 소녀였다
  • 신배경 기자
  • 승인 2019.08.1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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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이 만난 현장] 제7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미사
사진=신배경
사진=신배경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증언이 있었던 1991년 당시 나는 ‘위안부’라는 명칭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그때는 ‘정신대’라고 표현했는데, <여명의 눈동자>라는 TV드라마에서 ‘여옥’이라는 여주인공이 정신대에 끌려가는 이야기를 통해 공부(?)를 하게 되었고, 우연히 731부대 관련한 책을 읽게 되었다. 사춘기에 막 진입한 나이에 감당하기 벅찬 내용들이었고, 단어마저 생소하여 국어사전을 찾아가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짓밟힌 인권을 드라마를 통해,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악몽을 꾸었던 때가 내 나이 14세. 그 또래였던 것이다. 당시 소녀들이 끌려갔던 나이가.

민감했던 나이에 ‘알게 됨’을 겪은 ‘위안부’라는 단어는 나의 무의식 안에 ‘숙제’로 남았던 듯하다. 몇 년 전 <뉴스타파>에서 북한 거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취재한 자료를 보던 중 내 안에 남겨진 숙제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할머니들을 ‘위안부 피해자’로 바라보기 전에 ‘한 여인의 삶’으로 만나지 못했다는 부채의식이었다.

<뉴스타파>가 인터뷰한 할머니들은 남에서 온 낯선 사람들 앞에서 당시의 경험을 꺼낼 때마다 울고 계셨다. 주름이 너무 많아 젊었을 때의 얼굴이 짐작조차 가지 않는 할머니들은 바로 조금 전 겪은 억울함을 토로하듯 한과 눈물을 쏟아내셨다. ‘날수의 시계’는 억지로 돌고 돌아 그녀들의 얼굴을 깊게 패어놓았지만, 그 당시에 멈춰진 ‘여인의 시간’은 온 몸의 상흔과 한으로 남았다. 할머니도 여인이다. 그 ‘여인의 생’이 여인이라 불리기도 전에 ‘소녀의 시간’에 멈춰진 것이다.

 

사진=신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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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조급증이 밀려온다. 살아계실 때 사과 받으시길 바라는 마음이 나만의 마음은 아닐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장례식장을 찾았던 겨울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할머니의 고향 옆 동네에서 처녀들을 데려간다는 소문이 돌아 딸들을 일찍 시집보낸 집이 더러 있었는데, 할머니가 바로 일찍 시집을 간 경우라고 했다. 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가 같은 1926년생이었기 때문일까? 김복동 할머니의 노제에 참석해 행렬을 따라 걷는 동안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이외에 ‘여인 김복동’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동안 궁금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발걸음이었다.

 

사진=신배경
사진=신배경

1992년에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1400회를 맞이한 2019년 8월14일 오늘 평화로 소녀상 앞에서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천주교전국행동> 주관으로 제7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미사가 있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살아있는 증인으로 증언을 하신 장소, 일본에게 사죄와 배상을 당당히 외치신 장소, 대학생들이 맨 몸으로 지켜낸 소녀상이 자리 한 곳이다.

이날 미사를 집전하신 박현동 아빠스(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께서 강론 중에 “영화 '김복동'에서 평화나비 대학생들이 한일'위안부'합의의 부당성에 항의하며 격렬히 외치며 저항하는 장면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경찰들에 끌려나오면서도 할머니들을 대신하여 목소리를 냅니다. 이러한 외침이 나비의 날개짓 처럼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깊이 공감한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의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 이후 철거 위기에 놓인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전국의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돌아가며 밤을 새웠다. 혹한을 견디지 못한 보온병의 물이 얼어버렸던 그 겨울 길고 긴 밤을 거리에서 노숙했던 청춘들을 기억 한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건네고 가는 사발면과 햇반으로 일 년을 버틴 날, 평화의 소녀상을 만드신 작가님을 모셔와서 감사패를 드렸던 그들을 보았다. 주위를 에워싸고 경고하는 경찰들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외치는 그들의 음성을 들었다. 그들의 날개짓이 내게도 공명을 일으켜 ‘기림일’미사에 참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8월14일 제대가 차려진 자리는 결코 쉽게 마련된 자리가 아니다. 할머니들의 용기가, 할머니들의 상처와 고통에 함께 아파한 많은 이들의 연대가, 여인의 빼앗긴 세월을 기억하려는 마음들이 오랜 시간 모이고 쌓여 만들어진 희망이 잡은 자리였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희망을 잡고” 우리에게 닿은 날개짓이 또 다른 공명을 일으킬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희망하려 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기도문]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 가운데 오신 주님,
당신은 가난한 이들과 갇힌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고,
고통 받는 민중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요,
역사의 주인임을 가르쳐 주셨나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회복과
정의로운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드리나이다.
십자가의 주님,
빼앗긴 산하의 소녀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로 모진 고초를 당하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수십 년 세월 동안 홀로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슬픔을 굽어보소서.
이들 피해자들의 생명과 인간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은 책임자들은
생존자들의 증언에도 진실 부인과 망언으로 응대해왔고,
2015년 12월 28일 한일 정부의 굴욕적인 합의 강행으로
역사를 왜곡하여 전쟁범죄의 올바른 해결을 회피하려 했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의 가운데서도, 생존 할머니들은
진실과 역사 정의를 향한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있나이다.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정의의 주님,
민족의 암흑기에 그 십자가를 온몸으로 짊어졌던
일본군 '위안부' 생존 할머니들이 부활의 해방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 연대 실천을 통해 정의로운 기억의 역사,
새로운 희년의 역사를 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신배경 클라우디아
가톨릭일꾼 애니메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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