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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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한상봉
  • 승인 2019.07.1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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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성서의 조연들-35
Antonio Ciseri_EcceHomo_700
Antonio Ciseri_EcceHomo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가 내게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월절을 앞두고 보안 문제로 신경 쓰이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아침부터 소란을 떤 자들은 유다의 원로들이었다.

예루살렘의 수석사제들도 따라와 으르렁대며 한 사내를 내 발 앞에 데려왔다. 보잘 것 없는 행색을 한 젊은이였는데, 그래, 아주 젊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한창 나이에 물에 젖은 쥐처럼 그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곤욕을 꽤 치르고 온 듯 했는데, 그 사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사내가 서 있는 자리 뒤로 아침 동이 터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사내의 검은 실루엣 뒤로는 빛살이 퍼져 나왔다. 그 때문에 나는 잠시 현기증이 일어나 뒤로 주춤거렸다. 원로들은 그가 자신을 ‘유다인의 왕’이라고 선포했다는데, 내가 그 죄의 진상을 밝히려고 물어도 그저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침묵이 일으키는 잔잔한 소용돌이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입에서 침이 말라왔다. 그가 오히려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제 처지를 변호하느라 열을 냈더라면, 내 입에서 나의 평온한 아침을 어지럽힌 죄와 더불어 간단한 재판으로 신속하게 결론을 내렸을 텐데, 그의 침묵이 나를 부담스럽게 한다. 유다인들의 말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 그 사악하고 비열한 입으로 저들의 하느님을 들먹이다가 이내 황제를 들먹이기도 하는 것들이다.

“네가 유다인이 왕이냐?” 하니, 그는 그저 “네가 그렇게 말했다” 고 답할 뿐 제 숨은 생각을 풀어내지 않았다. 나를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라 해도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게 별로 의미가 없다는 판단 때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속모를 사람은 나를 미치게 한다.

나는 그렇게 차분한 편이 아니어서 명백하게 시시비비를 가려 단칼에 문제를 해결하길 좋아한다. 늘 전쟁터를 따라다니던 나는 전진과 후퇴의 명료함이 주는 미덕을 잘 알고 있었다. 내 부하들은 명령이 떨어지면 신속하게 적을 섬멸하였다. 그러니 답이 없는 질문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그 사내가 나를 증오하거나 경멸한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그의 무심함이 내 심기를 어지럽힐 뿐이었다.

차라리 이런 문제는 저들끼리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원로들은 그가 역도(逆徒)라고 하지만, 내가 그동안 만나보았던 반란군들은 저런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죽기까지 큰 소리로 하늘에 대고 기도하고, 우리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제 감정에 겨워 만세를 부르고 죽어갔다. 그러나 그는 텅 빈 동굴처럼 내가 하는 말을 되울리고 있을 뿐, 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우리 로마의 한 철학가가 이런 말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사랑하라. 그리고 침묵하라.” 나는 현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사내의 침묵의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다. 다만 아내가 어젯밤 꿈자리가 사나왔다고 일러주었으므로 나는 이 일을 빨리 내 손아귀에서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나는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바라빠와 예수라는 사내를 두고 도박을 하기로 했다. 반란군을 선동하던 바라빠는 분명한 나의 적이었지만, 사제들과 원로들도 두려워하던 자였다. 그가 로마에 협력하던 사제들과 원로들을 척살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일은 너무나 싱겁게 끝나 버렸다. 사제와 원로들은 예수를 더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인간을 눈멀게 하는 법이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한 고문은 그래서 사람들을 쉽게 파렴치한으로 만들곤 한다. 대의와 명분을 자랑하던 자들도 고문으로 이틀 밤을 넘기지 못하곤 했다. 고통 앞에서 동료를 팔아먹고 심지어 가족들마저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패륜을 두 눈으로 많이 지켜보았다. 그런데 유다 원로들이 품고 있는 예수에 대한 두려움이 바라빠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하였던 모양이다.

나는 저 사람들이 왜 저 가엾은 사내에게 저리도 두려움을 느끼는지 모른다. 내가 파악한 정보로는, 그가 성전에서 한바탕 소란을 부린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다. 그는 반란군이 아니라 선생이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더러 있었다고 한다. 어쩜 종교 밖에 모르는 이 유다인들에게는 군대보다 두려운 것이 종교혁명이었을까?

전통을 무너뜨릴 만한 사상을 저 사내가 갖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그것도 나는 모른다. 그들은 바라빠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예수를 죽이는 데만 몰두하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이다. 뭔가 집단적인 광기가 일어나는 것 같았고, 누가 이 분위기를 조종하는 지 헤아릴 틈도 없이, 나는 손수건을 던져 버렸다. 결국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었던가.

예수를 그들에게 내어주고 물을 받아 손을 씻었다. 참 질기고 지겨운 백성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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