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의 제자, 황제 없이 하느님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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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의 제자, 황제 없이 하느님만으로
  • 한상봉
  • 승인 2019.06.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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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22,15-22: 성서의 조연들-32

본래 제 주인은 바리사이였지요. 저도 그 밑에서 율법을 공부하며 그분의 그림자를 따라 걸었습니다. 제 주인이요 스승이었던 분은 율법을 빠짐없이 외울 수뿐 아니라 새로운 규정을 밝히기 위해 밤낮으로 마음 쓰고 있었지요. 우리 유다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율법밖에 없다고 그분은 늘 다짐을 두었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을 멀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완전히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율법을 귀하게 다룰 필요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사제가 아니었으므로 저희에게 주어진 규정을 통하여 주님께 다가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권력과 결탁한 사제들의 성전보다는 율법이 오히려 순수한 신앙을 보증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우리 유다인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율법뿐입니다. 스승은 언제나 율법을 느슨하게 풀어놓으면 그 순간에 유다인도 흩어질 것이라고 걱정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오히려 단단히 조여 백성을 모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우리 겨레를 사랑했으므로 율법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스승께서 헤로데의 무리들과 더불어 예수에게 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분은 헤로데 역시 믿지 않았지만, 예수를 더 위험한 인물로 여겼던 것을 제가 압니다. 그가 율법을 파괴하려고 군중을 선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을 뿐더러 사람을 앞세워 율법을 허수아비로 만들곤 했으니까요.

말이야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는 게 맞는 이야기지만, 그런 식으로 자꾸 생각하다보면 사람들 사이에 긴장이 풀려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민심은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지금은 융통성이 필요한 때가 아닌 것입니다. 벌써 많은 이들이 율법에서 벗어나 살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지만 생활고(生活苦)보다 앞서는 게 우리의 신앙이잖습니까? 죄인들을 눈감아 주다보면, 세상은 죄로 넘쳐날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 길을 가는데 놓여 있는 걸림돌을 치우기 위해 우리는 미리 약조한 대로 예수를 먼저 추켜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고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사람을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는 고매한 분이여,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아닙니까?”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 헤로데의 무리들이 발끈하여 그를 로마에 고발할 것입니다.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고 답하면 저희와 온 유다가 일어나 그를 죄인으로 단죄할 것입니다.

예수는 속내를 감추느라 더듬거리는 제 입술을 바라보더니, 하늘을 한번 쳐다보시고 땅을 바라보시며 오른 손으로 꼬옥 주먹을 쥐어 보이더군요. 그 손을 들어 세금으로 내는 돈을 이리 가져와 보라고 하더니, 그 데나리온에 새겨진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은전에는 케사르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지요. “황제입니다.” 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 드려라.” 하는 말이 번쩍 귓등을 후려쳤습니다. 갑자기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는데, 우리 계획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의 말은 바람처럼 어디에도 걸림이 없었습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요. 이 세상 어디에도 하느님의 소유가 아닌 게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 대놓고 로마를 거부하지도 않았으니, 우리 말문이 막혔던 거지요.

예수 자신은 바람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했으므로, 그의 제자들은 전대를 메고 다니지 않았으므로, 거처도 없이 방랑하며 남의 처마 밑에서 잠을 청했으므로, 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황제와 다른 세상을 살았던 것이지요. 로마의 녹을 받아먹거나 로마의 그늘아래서 모진 목숨이라도 살아보려고 발버둥칠 줄 알아야 뭐든 눈치 볼 게 생길 텐데. 그를 잡아둘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을 때, 저는 그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갑작스럽게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가 이승의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성전에도 매이지 않고 율법에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백성을 흩어버리기는커녕 사람의 마음을 낚아채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죄인들 속에서 나는 오히려 이집트를 탈출하던 우리 조상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기대에 들떠 상기된 얼굴들입니다.

자유로운 자의 말은 거침이 없습니다. 그 또한 그러했고, 저는 그 뒤로 다시 바리사이였던 스승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매사에 전전긍긍하며 다른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고서야 안심이 되는 세상을 버렸습니다. 저는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고 싶었고, 그 행복을 보여준 사람을 뒤늦게라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할 때, 그분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때로 아주 엉뚱한 것을 집어 들고 스스로 안심합니다. 권력이나 돈이나 성전이나 율법이나 그분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걸 이제야 알았다니, 믿음이 길에서도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니까요.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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